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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008
한자 集姓村
영어공식명칭 Single-Cla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한 동성동본의 성씨 마을.

[개설]

집성촌(集成村)은 성(姓)과 본(本)[본관, 관향]이 같은 동성동본의 성씨 집단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를 '동족(同族) 마을', '동족 촌락(同族村落)', '동성(同姓) 마을'이라고도 한다. 집성촌은 조상을 함께 하는 특수한 혈연관계 속의 주민들이 특정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형태이다. 공동체 조직이 발달한 우리나라 농촌 마을의 독특한 구조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각성(各姓)보다 동일한 혈연관계가 공동체적 농경 사회를 운영하기 용이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성촌의 구성원을 바탕으로 한 해 농사를 지었으며, 농사가 끝난 가을에는 ‘시제[時祭, 時享]’라 불리는 제사를 통해 종중 내의 결속을 강화하였으며 ‘종갓집’과 ‘항렬(行列)’을 기반으로 종중의 계통과 질서를 세웠다.

[형성 시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집성촌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당진에 본관을 두고 있는 신평 이씨신평 호씨를 제외하고, 현재 당진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많은 집성촌의 입향조(入鄕祖) 중 가장 오래된 시기는 고려 말까지 보고 있다.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덕목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다는 입향조의 태도를 문중의 정신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당진 지역이 고려 시대 수도였던 개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측면도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당진시 우두동에 집성촌을 형성한 무안 박씨정미면 봉생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능성 구씨가 대표적이다. 특히 능성 구씨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정미면 봉생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렀다.

하지만 본격적인 집성촌의 형성은 조선 후기에 접어드는 17세기경이다. 형성 배경으로는 상속 제도의 변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 예학(禮學)의 발달, 종법적 가족 제도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남성의 지위가 여성의 지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격상된 조선 후기에 들어서 부계 혈족 중심의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농업 기술 발전과 간척지의 증가도 집성촌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영농의 공동 작업, 경제적 상호 부조, 집단 이주의 개척, 농업 기술의 발전과 수확량의 증대, 새로운 농경지의 확보는 집성촌 구성원의 경제력을 크게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당진 지역의 경우 대다수 집성촌의 입향조는 붕당 정치의 전개와 정치적 격동기를 보내면서 서울을 떠나 당진 지역에 들어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활용하여 집터와 묘지 터를 잡아 나갔다. '명당(明堂)'임을 내세워 가족을 유입시켰고, 양반이라는 신분과 안정적인 경제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종숙(宗塾)’ 개념의 서당을 세워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애썼다. 이로써 당진 지역에도 많은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적어도 농촌 근대화가 진행되기 이전까지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어 왔다.

[현황]

당진 지역 집성촌의 전체적인 현황은 아직 조사된 바 없다. 다만 『송악면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조사된 송악읍의 집성촌은 19개로 파악되었고, 『송산면지』 집필 과정에서 조사된 송산면의 집성촌은 12개로 나타났다. 또한 『석문면지』 제작 시에 조사된 석문면의 집성촌은 21개였다. 이를 통해 보면 한 개의 읍면에 대략 15개 내외의 집성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진 지역은 현재 3동 2읍 9면으로 구성되었고 우강면은 각성 마을로 집성촌이 거의 없음을 감안하면, 당진 지역의 집성촌은 전체적으로 200개 내외로 추산된다. 이곳에서는 당진 지역에 세거지를 이루며 유구한 전통을 간직한 여러 성씨 가운데 송악읍, 송산면, 그리고 석문면에 분포한 집성촌을 소개하고자 한다.

[송악읍의 집성촌]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은 당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며 아산만에 접해 있어서 해산물이 풍부하고 곳곳에 간척지가 조성되어 농경지가 발달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송악산으로 높이는 해발 149m에 불과할 정도로 대부분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현재 송악읍의 북부인 해안 지대는 모두 개발되어 공업 지대가 되었지만, 산업화 이전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송악읍에 형성된 집성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송악면 집성촌 현황-

[연번/리명/마을명/성씨/파명/입향조/입향 시기/거주 기간/세대 수]

1. 가교리[능성 구씨, 판안동파(判安東派), 구예(具藝), 1330년대, 670년]

2. 전대리[곡촌, 강릉 김씨, 모암공파(慕菴公派), 김영준(金永俊), 1520년대, 17대(480년), 20여 호]

3. 복운리[구억말, 경주 김씨, 전서공파(典書公派), 김부광(金孚光), 1600년대, 14대(400년), 10여호]

4. 가교리[범당골, 안동 김씨, 익원공파(翼元公派), 김별(金鼈), 1646년대, 14대(360년), 10여 호]

5. 월곡리[대동, 연안 김씨, 내자시윤공파(內資寺尹公派), 김둔(金鈍), 18세기 후기, 8대(230년)]

6. 본당리[우두, 청송 심씨, 첨정공파(僉正公派), 심봉채(沈鳳彩), 18세기 전기, 9대(280년), 23호]

7. 고대리[광주 안씨, 사간공파(思簡公派), 안담(安曇), 16세기 중기, 17대(450년)]

8. 반촌리[승선동, 남원 윤씨, 충간공파(忠簡公派), 윤지(尹榰), 17세기 전기, 13대(380년), 15호]

9. 복운리[구두멀, 경주 이씨, 석탄공파(石灘公派), 이협(李浹), 1650년대, 13대(350년), 13호]

10. 금곡리[광주 이씨,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 이윤만(李允蔓), 17세기 후기, 11대(350년), 60여 호]

11. 정곡리[바드물, 덕수 이씨, 춘당공파(春塘公派), 이진(李畛), 18세기 전기, 11대(330년), 10여 호]

12. 반촌리[주절동, 성주 이씨, 총제공파(總制公派), 이식(李植), 17세기 초기, 16대(400년), 10여 호]

13. 봉교리[봉하재,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이유연(李有然), 17세기 중기, 12대(350년), 40여 호]

14. 전대리[방축골, 진주 정씨, 제학공파(提學公派), 정수후(鄭壽厚), 17세기 후기, 15대(350년), 20여 호]

15. 복운리[순창 조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조동순(趙東順), 18세기 후기, 5대(200년)]

16. 봉교리[한양 조씨, 양절공파(良節公派), 조주(趙珠), 16세기 후기, 14대(430년), 20여 호]

17. 한진리[충주 지씨, 덕산공파(德山公派), 지일성(池日成), 16세기, 13대(400년), 10여 호]

18. 복운리[굴머리,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최명이(崔命敡), 1750년대, 9대(250년), 12호]

19. 월곡리[절강 편씨, 통정공파(通政公派), 편파회(片坡會), 1650년대, 15대(350년), 20여 호]

[송산면의 집성촌]

당진시 송산면송악읍에 연접해 있고 북면은 아산만이다. 송산면 당산리에 있는 오도항은 당진 지역의 해상 관문으로 각광받았다. 대다수 당진 지역민들은 이곳을 경유하여 경인 지구로 오갈 수 있었다. 지형도 송악읍과 동일하여 대부분 구릉지로 형성되었고, 가장 높은 산은 창택산(倉宅山)인데 해발 104m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하지만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라 조선 시대 면천군의 봉수(烽燧)로 활용되었다. 집성촌이 발달하기 좋은 지형을 갖추어 많은 성씨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황은 다음과 같다.

-송산면 동족 마을 현황-

[연번/리명/성씨/입향조/입향 시기/거주 기간/세대 수]

1. 무수리[나주 김씨, 김대현(金大鉉), 1753년, 260년, 60여 호]

2. 금암리[연안 김씨, 김극보(金克寶), 17세기 중엽, 350년, 10여 호]

3. 가곡리[영산 김씨, 김긍신(金兢愼), 19세기 초, 170년, 70여 호]

4. 동곡리[남평 문씨, 문인명(文仁明), 18세기 중엽, 270년, 60여 호]

5. 유곡리[밀양 박씨, 박제숙(朴齊淑), 18세기 초, 300년, 100호]

6. 무수리[성주 배씨, 배덕종(裵德宗), 18세기 초, 300년, 20여 호]

7. 금암리[파평 윤씨, 윤황(尹湟), 19세기 초, 200년, 6호]

8. 삼월리[덕수 이씨, 이행(李荇), 1517년, 500년, 30여 호]

9. 무수리[전주 이씨, 이세량(李世良), 16세기, 400년, 50여 호]

10. 매곡리[경주 최씨, 최기선(崔己宣), 18세기 초, 300년, 20여 호]

11. 무수리[해주 최씨, 최순형(崔順亨), 16세기경, 400년, 30여 호]

12. 상거리[남양 홍씨, 홍백원(洪百源), 1670년, 340년, 20여 호]

[석문면의 집성촌]

당진시 석문면은 당진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북으로 아산만에 접해 있는 면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개펄이 발달하였고, 해안선을 따라 염전이 성업을 이루었다. 또한 주요 지점에는 포구가 형성되어 경향 각지로의 여객을 운송하였고, 어업이 성행하여 어항으로서의 기능도 갖추었다. 석문면 역시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지이여 높은 산이 없다. 가장 높은 산이 석문산(石門山)인데 80.2m에 불과하고 난지도(蘭芝島)에 있는 선배산이 123.8m이다. 야트막한 산과 밭과 논이 풍부하며 하천이 발달해 있다. 역시 집성촌이 형성되기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현황은 다음과 같다.

-석문면 집성촌 현황-

[연번/리명/마을명/성씨/파명/입향조/입향 시기/거주 기간]

1. 초락도리[초락도, 소주 가씨, 세한파(世漢派), 가병옥(賈秉玉), 1880년대, 6대(130년)]

2. 삼화 1리[삼곶, 김해 김씨, 삼현문민공파(三賢文愍公派), 김연(金淵), 1600년대, 14대(400년)]

3. 장고항 1리[장고항, 김령 김씨,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김경일(金慶一), 1600년대, 13대(400년)]

4. 삼화 2리[외창, 선산 김씨, 양양공파(良襄公派), 김고(金考), 1500년대, 20대(500년)]

5. 삼화 3리[찬동, 함창 김씨, 참의공파(參議公派), 김훈(金訓), 1500년대, 18대(500년)]

6. 초락도리[초락도, 밀양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박종남(朴宗男), 1700년대, 10대(300년)]

7. 대난지도리[대난지도, 온양 방씨, 간의공파(諫議公派), 방현형(方顯亨), 1730년대, 10대(300년)]

8. 장고항 2리[원장고항, 은진 송씨, 도정공파(都正公派), 송흠룡(宋欽龍), 1820년대, 6대(200년)]

9. 교로 3리[큰마실, 평산 신씨, 사간공파(思簡公派), 신효선(申孝先), 1600년대, 13대(400년)]

10. 삼화 2리[외창, 광주 안씨,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안극효(安克孝), 1600년대, 17대(400년)]

11. 삼봉 1리[숙구지, 원주 원씨, 시중공파(侍中公派), 원몽선(元夢善), 1730년대, 11대(300년)]

12. 통정리[통정, 교동 인씨, 참의공파(參議公派), 인홍헌(印弘憲), 1700년대, 12대(300년)]

13. 교로리[교로리, 나주 임씨, 진사공파(進士公派), 임항(林恒), 1600년대, 14대(400년)]

14. 통정리[기름재, 안동 장씨, 화성군파(花城君派), 장덕수(張德水), 1600년대, 14대(400년)]

15. 교로리[교로리, 천안 전씨, 문효공파(文孝公派), 전덕대(全德大), 1830년대, 8대(200년)]

16. 교로리[교로리, 한양 조씨, 양절공한풍군파(良節公漢豊君派), 조징(趙澄), 1550년대, 15대(450년)]

17. 소난지도리[소난지도,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館稼亭公派), 최의규(崔義奎), 1800년대, 8대(200년)]

18. 통정리[통무시, 청주 한씨, 부사공파(府事公派), 한영세(韓永世), 1500년대, 19대(500년)]

19. 삼화 2리[외창, 신평 호씨, 호성징(扈聖徵), 1670년대, 12대(340년)]

20. 삼화 1리[삼곶, 남양 홍씨, 예사공파(禮史公派), 홍사관(洪士寬), 1600년대, 14대(400년)]

21. 초락도 1리[초락도, 남양 홍씨, 학곡공파(鶴谷公派), 홍박연(洪博淵), 1800년대, 8대(200년)]

[의의와 평가]

당진 지역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동족 마을을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이 세거지를 이룬 곳은 대체로 평야 지대 대신에 구릉지를 위주로 했다. 일부는 지주로서 부를 누리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소규모 영농을 바탕으로 자영적 경제 구조를 이루었다. 이들은 경향과 소통하면서 지속적으로 중앙 진출을 도모했다. 또한 여의치 못하면 향촌으로 낙향하여 조선 시대 학문의 지방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리학의 보급은 이들의 권위를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이들은 비슷한 수준의 가문과 중첩된 통혼 관계를 유지하며 가문 내 결속을 강화했다. 특정 양반 가문의 족보를 통해 통혼 관계를 살펴보면 당진 지역의 양반 사족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종중 친족의 힘을 모으기도 하고, 소작인과 노비를 동원하여 인근 지역인 개펄을 개간하기도 했다. 이것은 자신과 종중의 경제력과 인구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진 지역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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