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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102
한자 漢津浦口
영어공식명칭 Hanjin Inlet
이칭/별칭 대진(大津),한나루,나루머리(津頭)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시설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최초 설립지 한진포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현 소재지 한진포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지도보기
성격 포구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에 있는 해안 포구.

[개설]

현재 당진시 동북쪽의 송악읍 한진리 아산만한진포구는 옛날 대진(大津), 한나루, 나루머리[津頭] 등으로 불리던 나루터였다. 한진포구에서는 ‘썩어도 준치’라고 준치가 많이 잡혔다. 한때는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며 연평도의 조기를 잡아오기도 하였다. 아산만에서 서해로 통하는 큰 포구로, 한진포구와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를 잇는 정기 나룻배가 다녔다.

아산 현감 토정 이지함과 관련한 영웅 바위 생성과 한진 개항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지명인 ‘한곡리(漢谷里)’라는 지명도 인천에서 증기선을 타고 내려온 포구인 한진리(漢津里)와 그의 장조카 심재영이 사는 부곡리(富谷里)의 합성어이다.

[건립 경위]

원래 고지도에는 아산만 건너 경기도 땅에도 서로 마주보면서 대진(大津) 나루가 있었다. 한진은 예로부터 대진(大津)이라고 불렸다. ‘큰 나루’ 라는 우리 고유 명칭을 훈차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홍주에 “대진이 신평현 북쪽 114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해동 지도』[면천]에 ‘대진(大津)’이 확인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이미 백제 때 창(倉)과 관(館)이 있었으며 당나라를 오가는 상인과 사신이 대진을 통해 왕래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도 대진항은 면천, 홍주, 결성, 보령, 남포, 서산 등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큰 나루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洪州牧) 편에, "하룻밤 사이에 육지가 함몰하여 바다가 되었다[一日夜地間 陸陷爲海]."라는 기록에서 한진항 개항의 연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산만 사이에 남북으로 큰 단층대가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단층 작용으로 정말 하루 사이에 육지가 바다가 되었을 수도 있다.

『조선 지지 자료』 면천편 포구명과 도진명에 "한진(漢津)[한나루]이 한진리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지형도』[아산]에는 송악읍 북쪽 바닷가에 한진리(漢津里)가 확인된다.

[변천]

조선 시대에는 아산만대진으로 반대편 평택의 만호로 나룻배로 건너 다녔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숭어 어란, 준치, 삼치 등을 남진환(南進丸)이란 50톤급 증기선으로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 수산사[수협]와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한진장이 5일장으로 열리고 인천과 정기적으로 증기선이 여객선으로 다니던 큰 포구였다. 이 증기선은 1960년대 말까지 다녔다. 점차 도로 교통이 발달되고 삽교천 방조제와 아산만 방조제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한진포구는 점차 쇠퇴하였다. 현재는 겨우 포구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한진 바지락 축제가 열리고 있다.

[현황]

현재는 부곡 공단이 들어서 있고, 서해안 고속 도로가 개통되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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