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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33
한자 靑邱圖
영어공식명칭 Chunggu Map
이칭/별칭 청구요람,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추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34년연표보기 - 『청구도』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12월 22일연표보기 - 청구도(2008-1) 보물 제1594-1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12월 22일연표보기 - 청구도(2008-2) 보물 제1594-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4월 22일연표보기 - 청구도(2008-3) 보물 제1594-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청구도(2008-1), 청구도(2008-2), 청구도(2008-3) 보물로 재지정
현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현 소장처 영남 대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경산면 대학로 280[대동 214-1]
현 소장처 고려 대학교 중앙 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성격 고지도
작가 김정호
서체/기법 필사본
소유자 국립 중앙 도서관|영남 대학교|고려 대학교 중앙 도서관
관리자 국립 중앙 도서관장|영남 대학교 총장|고려 대학교 중앙 도서관장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가 수록된, 고산자 김정호가 1834년에 필사본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전국 지도.

[개설]

『청구도(靑邱圖)』는 1834년(순조 34)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전국 지도이다. 현존하는 옛 지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가로 462㎝, 세로 870㎝이며, 축척은 약 1:216,000 이다. 옛 지도 가운데 일정한 크기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축척이 동일한 전국도 가운데 가장 정밀하고, 이후 판각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본(異本)으로는 『청구 요람(靑邱要覽)』이 있다.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라고도 부른다. 2008년 12월 22일에 3점의 『청구도』가 각각 보물 제1594-1호[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 제1594-2호[영남 대학교 도서관 소장], 제1594-3호[고려 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청구도』는 채색 필사본이며 건곤(乾坤) 2책으로 되어 있다. 제1책은 청구도제(靑邱圖題),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 본조 팔도 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道總目),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동방 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 삼한도(四郡三韓圖), 삼국 전도(三國全圖), 신라 주현 총도(新羅州縣總圖), 고려 오도 양계 주현 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 본조 팔도 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 군국 총목표(軍國總目標)로 구성되어 있고, 제2책은 본조 팔도 주현도 총목(本朝八道州縣道總目), 도성 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로 구성되어 있다.

당진시 지역은 『청구도』의 제17층 14판, 15판과 제18층 14판과 15판에 지도가 실려 있다.

[특징]

『청구도』는 전국을 건곤 2책, 남북으로 29층, 동서로 22판으로 구분하였다. 책의 판심 부분에 층수와 판수를 기록하여 원하는 지역을 쉽게 찾아 볼수 있도록 했다. 지도의 첫머리에는 갑오년[1834]에 최한기가 쓴 서문 격인 '청구도제'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최한기는 "친우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깊이 도지(圖志)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폈다."라고 기술하여 최한기김정호가 친한 친구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김정호가 '획야분주', '경선과 위선', '배수의 6체'를 이용하여 『청구도』를 제작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김정호는 자신이 만든 '청구도 범례'를 수록하였는데, 여기서 『청구도』의 제작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또한 『청구도』가 종래의 방괘법에서 벗어나 평환법(平圜法)을 쓰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방괘법은 사정(四正)과 사우(四隅)의 거리가 일치하지 않아서 지도의 정확성을 기하기가 어렵다. 이에 비해 평환법을 쓰면 지도상의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도식(地圖式)을 그려 설명하였다.

그리고 범례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 첫째, 산마루와 물줄기가 지면의 근골과 혈맥이 되어야 한다. 둘째, 산명 밑에 읍까지의 리수로서의 지지 간행에 나타난 것이 틀리게 된 것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지지에 기록되어 있는 리수가 읍을 중심으로 기록하여 상하좌우에 약간 틀림이 있는데, 이는 지면이 좁아서 배열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점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방면에 부르는 호칭이 지역에 따라 사, 방, 면 등 다양한데, 이것을 통일하여 면으로 부르고 있다. 다섯째, 산등성이와 기슭을 다 연결하면 지면이 어지러우니 유명한 산 서너 봉우리만 그려 넣은 점을 밝히고 있다. 여섯째, 진보, 사원, 역창 등을 그 소재지에 써 넣되 가로세로에 구애받지 말고 편하게 써 넣은 점을 밝히고 있다. 일곱째, 책 끝에 신라 구주도, 고려의 오도 양계도, 조선의 성경합도 등을 붙였지만, 동방 제국도, 삼한도, 한사군도는 고증이 안 되어 삭제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덟 번째, 일정한 규식을 정하여 도(圖)와 지(誌)가 서로 대조되어 조정에서 필요하게 만든 점을 밝히고 있다.

김정호『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약 27년 전에 『청구도』를 만들었다. 『청구도』『대동여지도』에 비하여 면 이름, 호구 수, 경지 면적, 군병 수 등 지역에 관한 지지적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주기 자료를 지도 상단 여백에 기록하였다. 전국을 100리, 동서 70리로 잘라 남북 29층, 동서 22판으로 만들었으며, 1층 1판이 지도책의 한 면이 된다. 그리고 방안 눈금으로 나누어 그렸다. 방안 하나는 남북이 100리, 동서가 70리가 되도록 구분하였다. 실제 지도의 크기는 가로가 17.5㎝, 세로 25㎝이므로, 조선 시대 10리는 4㎞가 아니라 약 5.4㎞임을 감안하여 지도의 축척을 계산하면 21만 6000분의 1이 된다. 대축척의 지도로 건곤 두책을 상하로 연결시키면 전국도가 된다. 또 지도책 한 면에 외곽선을 그어 10리 눈금을 그리고 이를 통해 축척과 거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든 방안 지도이다.

[『청구도』의 당진 지역]

『청구도』의 당진 지역을 분석해 보면 몇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소속 월경지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지도에도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예를 들면 범천면-홍주지, 비방면-덕산지, 덕흥면-천안지, 신남면-홍주지, 감천면-면천지 등이다. 둘째, 도서도 중요한 섬이 일부 표시되어 있다. 영옹암(令翁岩)[현 영웅암], 내도(內島)[현 안섬], 난지(蘭芝)[현 난지도], 산도(蒜島)[현 국화도] 등이 지도에 그려져 있다. 셋째는 주요 산 지명은 많이 표시되어 있는 데 비해 고개 명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 산 이름으로는 신암산, 다불산, 태산, 안국산, 마산, 남산, 삼봉산, 이배산, 몽산 등이 표시된 데 비해서, 고개 명은 노은치(老隱峙) 고개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은치 고개는 이 당시 당진현에서 면천군으로 가는 관로상에 위치한 고개로 당진 대덕리에서 면천 죽동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아주 주요한 고개이다. 넷째, 지도상에 호(戶)[호구], 전(田)[경지], 곡(穀)[곡총], 병(兵)[군사], 경(京)[서울까지 거리] 등 지지적 요소가 가미되고 계량 단위에 석(石)과 결(結)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당진의 경우 읍치소인 ‘당진(唐津)’ 지명 옆에 ‘호 삼천사백, 전 오천륙백 결, 곡 삼천삼백 석, 병 삼천일백, 경 이백삼십 리(戶三千四百, 田五千六百結, 穀三千三百石, 兵三千一百, 京二百三十里)’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즉, 당진의 호구가 3,400이고, 경지가 5,600결, 곡총은 3,300석이고, 군사는 3,100명, 서울까지는 230리라는 것이다. 또 ‘면천(沔川)’ 지명 옆에 ‘호 삼천사백, 전 이천팔백 결, 곡 이천이백 석, 병 삼천사백, 경 삼백삼십 리(戶三千四百, 田二千八百結, 穀二千二百石, 兵三千四百, 京三百三十里)’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즉, 면천의 호구가 3,400이고, 경지가 2,800결, 곡총은 2,200석이고, 군사는 3,400명, 서울까지는 330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진과 면천을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다섯째, 그 당시의 당진, 면천 지역 면명을 다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초천면, 정계면, 고산면, 마산면, 합북면, 합남면, 죽림면, 신북면, 현내면 등이다. 여섯째, 아산군 일서면 우평(牛坪)이 삽교천을 월경하여 현 우강면 부장리 지역에 표시되었다. 이 ‘우평’에서 유명한 ‘소들강문’의 ‘소들’이 유래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창(倉)에 대한 상세한 표현이다. 삽교천 주변, 역천 주변, 아산만 주변 등에 창을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범천면-남창, 비방면-해창, 신종면-창, 덕흥면-창, 외맹면-창, 감천면-북창 등이다. 여덟째, 삽교천 이서 현 우강과 합덕 일대에 ‘백리대야(百里大野)’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조선 당시 이미 상당한 정도로 간척이 이루어져 삽교천 연변에 대평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현재의 예당평야의 일부이다.

[의의와 평가]

『청구도』는 필사본이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지만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데 저본으로 사용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보다 필사하기에 쉽고 지지적(地誌的) 요소가 더 많이 기록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군현의 비교가 쉬운 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므로 가급적 같은 장소에 소략하게나마 같이 표현하여 시너지 효과를 강조하였다.

『청구도』가 갖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존하는 고지도 중 가장 크며 축척이 약 1:216000에 해당하는 가로 462㎝, 세로 870㎝인 전국 지도이다.

둘째, 산계와 수계를 사용하여 지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그린 점이다.

셋째,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특히 월경지와 창(倉) 표시가 뛰어나다.

넷째, 계량 단위에 석(石), 결(結)을 사용하고, 거리에 리(里)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다섯째, 사용하기 편리하게 첩책(帖冊)으로 만들었다.

여섯째, 각 읍의 병(兵)[군인], 호(戶)[호구], 전(田)[경지], 곡(穀)[곡총]의 수를 군현별로 읍치 옆에 기록하여 그 군현의 전반적인 크기를 쉽게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만들었다.

일곱째 ,경위선 표식과 기하 원본의 확대 축소법을 적용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앞서 제작된 어느 고지도보다 과학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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