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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99
한자 金石文
영어공식명칭 Monumental Inscrip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17일 - 채운포석교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17일 - 영탑사 범종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17일 - 영랑사 범종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1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12월 29일 - 남이흥 신도비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6월 20일 - 석장승(돌미륵) 당진시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4월 10일 - 당진안국사지매향암각 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12월 30일 - 이의무 신도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3호로 지정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금속류나 석물 등의 각종 유물에 새긴 글씨 또는 그림.

[개설]

금석문(金石文)은 글자 그대로 쇠붙이나 석물에 새겨진 그림이나 글씨를 가리킨다. 금석문은 각 연대에 따라 글씨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데, 광개토 대왕릉비·진흥왕 순수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의 탑비는 불교사 연구에서 유일한 자료가 되며, 고려 시대의 많은 묘비들은 고려사 자료를 보충하고 시정하는 데 큰 가치를 지닌다. 이들 금석문은 서예 연구 자료로서도 매우 귀중하다.

[고대의 금석문]

국내의 금석문 중 고대 금석문의 경우는 주로 석벽에 새긴 것이 몇 점 있으나 비갈류(碑碣類)가 대종을 이룬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 기원전 222년, 진시황(秦始皇) 25년에 만든 무기의 일종인 과(戈)가 있다.

[삼국 시대 금석문]

고구려 유물인 광개토 대왕릉비는 외형에 있어서나, 글씨에 있어서나, 내용의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성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금석 유물로서 가장 귀중한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최근에 발견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청북도 충주시]의 고구려비는 규모는 비록 작으나 비의 외형과 서체가 모두 광개토 대왕릉비와 공통되는 것이 있어서 고구려의 유적임이 확인되고, 고구려 세력이 남진했을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금석 유물로는 공주 무령왕릉의 매지권(買地券) 2점과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 지적당 탑비(砂宅智積堂塔碑)를 들 수 있는데 후자는 일부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백제로서는 망국의 한을 담은 유물이기는 하나 평백제비(平百濟碑)와 유인원비(劉仁願碑)가 금석으로서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신라의 금석 유물로는 진흥왕 순수비와 탑비를 들 수 있다.

[고려 시대 금석문]

고려 시대의 금석 유물은 고승(高僧)을 추모하여 세운 탑비가 주종을 이룬다. 사적비는 묘도 문자(墓道文字)[묘갈, 묘비, 묘지 및 묘표 따위에 새겨 넣은 글자]와는 달리 어떤 특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전적(戰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전적비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인 곳에 세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있다.

[조선 시대 금석문]

조선 시대의 금석 유물로는 신도비(神道碑)를 들 수 있다. 신도비는 고려 시대에는 없던 것으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처음으로 세워졌고, 정종·태종·세종의 능에까지 신도비를 세웠으나 “국왕의 사적은 국사에서 상세히 기술되므로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라는 의논이 일어나 세종 이후부터는 세우지 않고 묘표(墓表)[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만을 세웠다. 그러나 일반 관료나 명인의 무덤에는 고려 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던 비갈(碑碣)이 세워졌다. 당대에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고 가장 유명한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얻어서 비를 세우는 것이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당진의 금석문]

당진에 있는 금석문은 주로 비갈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일부 금문(金文)이 존재한다. 비갈류로는 묘와 함께 설치된 신도비와 묘비, 중수비, 송덕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신도비로는 이의무 신도비[1540년 건립.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3호], 이안눌 신도비[1712년 건립], 남이흥 신도비[1714년 건립.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 이첨 신도비[1968년 건립], 안민학 신도비[1922년 건립], 구문로 신도비[1926년 건립], 구서 신도비[1926년 건립], 구예 신도비[1926년 건립], 윤황 신도비[1934년 건립], 김광렬 신도비, 김교 신도비 등 다수가 있다. 중수비로 제작된 석비로는 합덕제 중수비 무리와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1935년 건립], 오봉제 수리조합 건설 기념비[1933년 건립], 보덕사 중수비[1676년 건립], 채운포 석교비[1689년 건립.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7호] 등이 있다. 송덕비로는 옛 면천군당진현에서 군수와 현감을 지낸 수령들의 송덕비와 일제 강점기 세워진 구휼비나 송덕비가 다수 존재한다. 이 밖에 석문으로 특이한 것은 1390년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당진 안국사지 매향 암각[또는 배바위 매향비]이 있고, 돌미륵[1428년 건립. 당진시 향토 유적 제8호]과 의두암[1888년 각자], 그리고 면천읍성 축성 과정에서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석문이 다수 존재한다. 또한 하마비면천 향교, 당진 향교석문 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특이한 금석문으로 신평현성안국사지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에 양각된 것이 있다. 당진에는 사찰의 범종에 새겨진 금문이 있는데, 영탑사 범종[1760년 주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과 영랑사 범종[1759년 주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1호]이 그것이다. 이들 범종에 새겨진 금문은 당진에 존재하는 희귀한 금석문 중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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