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04
한자 影幀
영어공식명칭 Portrait
이칭/별칭 초상화,영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길 134[금곡리 211]|송산면 무수리 산10|대호지면 충장 1길 73-48[도이리 373-1]|대호지면 대촌길 55-25[적서리 391-20]|신평면 독암길 7[거산리 510]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8년 12월 30일 - 이만유 장군 유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8월 30일 - 한음 선생 영정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5월 21일 - 최충 영정 당진시 지정 향토 유적 제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5월 21일 - 차천로의 영당 당진시 지정 향토 유적 제2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9월 25일 -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국가 민속 문화재 제21호로 재지정
소재지 충장사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 1길 73-48[도이리 373-1]지도보기
소재지 해동 영당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 산10 지도보기
소재지 한음 선생 영당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길 134[금곡리 211]지도보기
소재지 문원사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대촌길 55-25[적서리 391-20]지도보기
소재지 한원사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독암길 7[거산리 510]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사람의 용모·용태를 그린 회화.

[개설]

영정은 인물화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초상화라는 용어가 최근 만들어진 용어라고 할 때, 영정은 삼국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초상화를 이르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영정의 역사]

우리 나라에서 초상화가 어느 시기에 처음 그려졌나는 기록상으로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백제의 아사 태자[阿佐太子]가 그렸다는 일본 '쇼토쿠 태자상[聖德太子像]'이나 안악 3호분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그려져 있는 무덤 주인의 부부상(夫婦像)이 가장 오래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통일 신라에 접어들면서 전채서(典彩署)라고 하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였던 기관을 설치하였다. 이 기관에 소속된 화가들이 담당하였던 업무 중에 왕상(王像)이나 공신상 등 초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전문 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궁예 조(弓裔條)에 보이는 '부석사 신라왕상(浮石寺新羅王像)'이나 박사해(朴師海)의 『창암집 (蒼巖集)』에 보이는 ‘원주 경순왕영전 중수기(原州 敬順王影殿重修記)’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겠다. 또한 통일 신라 때에는 승려의 초상[僧像]을 그리는 일이 활발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현재 '쌍계사 진감 선사 비명(雙磎寺眞鑑禪師碑銘)'을 비롯한 각종 비문 및 『조당집(祖堂集)』에 전래되는 범일 국사(梵日國師)의 진(眞)에 대한 시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또한 통일 신라 시기에 그려진 일반 사대부상으로는 당대 최고의 문장과 명필을 자랑하던 최치원(崔致遠)의 상이 현재에도 비록 이모본이나마 도처에 봉안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는 숭불 사상의 영향으로 여러 종류의 초상화가 사찰에 봉안되었다. 왕 및 왕비의 진영을 비롯하여 나라에 공을 남긴 이의 초상인 공신도상, 나아가서는 일반 사대부상들의 초상화가 각종 사찰에 봉안되어 천복을 기원하였다. 이렇게 사찰에 초상을 봉안하는 전통은 조선 초기까지도 뿌리 깊게 영향을 미쳤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초상화의 제작이 대상 인물의 신분에 따라 구분이 뚜렷해지게 되었다. 첫째는 어진, 즉 왕의 초상화이다. 둘째는 공신상이다. 공신상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울 때마다 공신호(功臣號)가 주어지고 초상을 그리도록 했다. 셋째는 기로도상(耆老圖像)이 있다. 기로도상은 원로 대신들 중에 덕망과 학식이 높은 사대부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대부분이 화첩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번째는 일반 사대부상이다. 다섯째는 사찰의 승려상을 들 수 있다. 여섯째는 여인상이 있다. 이러한 조선 시대의 초상화는 유교 통치 이념에 따라 가묘와 서원에 봉안하였기에 수요가 폭발적이었는데, 지금은 수차례의 전란으로 많은 수의 초상화가 불타거나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각도, 각지의 서원·사우 및 영당에는 후손 및 유림에 의하여 선조나 명현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봉안, 향사되어 오고 있다.

[당진의 영정]

당진시에는 영정을 모신 사당이 여러 곳에 있다. 당진에 있는 영정은 대부분 후손들에 의해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는 경우이다. 이덕형의 영정인 '한음 선생 영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이 보존된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의 한음 영당은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영당으로 대표적인 사당이다. 1590년경에 당시의 궁중 화가 이신흠(李信欽)에 의해 처음 그려진 영정을 한음의 9대 종손 이의익(李宜翼)이 1860년대에 당시의 궁중 화가 이한철(李漢喆)에게 부탁하여 여러 본의 전신 및 반신모본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가 한음 영당에 보존된 것이다.

해동 영당은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에 있으며 최충 영정[당진시 향토 유적 제3호]이 모셔져 있다. 최충의 초상화는 건물 뒷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검은 색 상자에 보존되어 있다. 초상화는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림을 그린 인물과 시대는 정확하지 않다.

충장사에는 국가 민속 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에 2004년 포함된 남이흥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남이흥 영정은 조선 중기 전형적인 양식의 공신상이며,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크기는 191×99.5㎝이고 그린 이는 알 수 없다. 남이흥 영정의 상용 형식은 낮은 오사모(烏紗帽)에 정장 관복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좌안 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 좌상이다. 가슴에는 문관임을 나타내는 해태 문양의 흉배가 부착되어 있다. 남이흥 장군의 영정은 초상화로서는 격조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대호지면 적서리문원사에는 오산 차천로의 영정[향토 유적 제2호]이 봉안되어 있는데, 사당에 모신 영정은 선조 때의 인물화가 이신흠이 그린 것으로 차천로는 당시 40세 무렵이었다고 한다.

신평면 거산리에 있는 한원사는 이만유 장군 유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과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만유 장군의 영정은 좌안 팔분면(左顔八分面) 전신 좌상으로 오사모에 갈매기 포를 입었다. 해태 무늬를 수놓은 흉배로 보아 종2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인좌의 난에 도순무사로 출정했을 때의 직위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