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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68
한자 報德寺重修碑
영어공식명칭 Stele of Repairing Bodeoks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산39-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76년연표보기 - 보덕사 중수비 건립
현 소재지 보덕사 중수비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산39-3 지도보기
원소재지 보덕사 중수비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산39-3
성격 비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50㎝[가로]|93㎝[비신 높이]|16㎝[두께]|137㎝[귀부 포한 전체 높이]
관리자 보덕사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보덕사 입구에 있는 중수비.

[개설]

보덕사 중수비(報德寺重修碑)는 조선 후기 승려 혜행(惠行)이 보덕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전면에는 중수와 관련한 기록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중수할 때 시주한 신도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건립 경위]

보덕사 중수비는 승려 혜행이 1676년(숙종 2) 보덕사를 중수하면서 세웠는데, 건립 경위는 전하는 바가 없다. 보덕사는 해안을 향한 암벽에 의지하여 세웠고, 영험한 돌부처를 모신 초가지붕의 암자였다고 하는데 신도들의 시주를 바탕으로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보덕사 중수비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산39-3에 있다. 보덕포 서호산 절벽 위에 있는데, 현재 사원 건물이 새롭게 세워지면서 평지와 맞닿아 있다. 절의 오른쪽 입구 일주문 안에 인철식 기념비가 있고, 보덕사 중수비는 그 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 사원 경내에 있었는데 입구 쪽으로 옮겼다는 말도 있다.

[형태]

보덕사 중수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웠고, 비석의 크기는 가로 50㎝, 높이 93㎝, 두께 16㎝이다. 받치돌을 포함한 포함한 전체 높이는 137㎝이다.

[금석문]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전면〉

임자년 가을 7월에 내가 마침 호남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가 보덕사에 이르렀다. 나는 영광 사람으로 서호산수 간에 눈에 지나친 것이 많다. 이곳은 호산이 명려하고 경치가 맑고 깨끗하여 그 불상이 영험하니 곧 기도를 드리면 문득 이루어지니 신기하고도 기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불상을 보호한 시렁의 높이가 3~4장 길이로써 이에 2층의 누각을 이룬다. 뒷기둥은 겨우 1척 남짓한 것을 암벽의 위에 의지하고 있으니 실수해 떨어질 근심이 있고, 지붕은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겨 수십 년의 오램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인연 있는 이를 시주하게 해서 석공을 맞이하고, 높은 바위를 깨뜨려 뜰과 계단을 만들어 그 위에 집을 지으니 이젠 10여 명이 들어가도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다. 아! 생각하면 신도들의 공덕과 석공의 힘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처럼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제공할 수 있는 전당을 이를 수 있었을까. 이 사실의 전말과 시주한 사람들과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훗날 이 자연의 경관을 감상하는 유능한 사람이 있어 빛나는 발전이 있기를 바라노라.

강희 15년(1676) 8월 9일 화주승 혜행이 기록하다.

〈후면〉

시주질 장익길 임풍남 김수진 오금분 유구금 김국립 한옥 한금 박춘산 석생 백계운 이송산 윤막산 김득생 김기생 김기백 박종립 정사룡 오술남 남외남 최승남 이남 하열날 박해룡 장수봉 한대승 김상 김수명 김기인 김응희 이수남 장인남 윤풍남 한인호 이성립 최근말 장득길 최추금 이의일 최심림 김류 박영길 박득영 최귀남 박귀남 이영록 한내치 양계 김인죽 이계영 천용남 최원백 명수암 배웅박 임승금 조국보 장엄 김오남 황동 OOO OOO OOO OOO 이O 나예남 문영길 석호 이석견 이계운 이계신

[관련 내용]

보덕사는 보덕포에 접해 있는 사찰이다. 보덕포는 원래 천혜의 어항이었다. 이곳은 인천 지역에 땔감을 실어 나르는 포구였고, 멀리 연평도의 조기잡이 배들이 접안하는 포구가 있었다. 또한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접안하던 포구였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보덕포에는 일본 주재소가 설치되었다고 전하며, 주민들은 5~6가구에 불과하였지만 주점이 10여 호에 이를 정도로 흥청거렸다고 한다.

보덕사는 원거리를 떠나는 여행객과 환송하는 주민들의 기도처였다. 그리고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보덕포는 1991년 석문 방조제의 완공으로 바닷물이 차단되어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보덕사는 현재 주지승인 정안(正眼)이 1982년 부임하면서 각종 건물을 중수하고 신축하면서 크게 융성하여 당진시 석문면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었다.

[현황]

보덕사는 매우 번성한 사찰이다. 이 때문에 일주문 안에 있는 중수비도 잘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비문은 너무 오래되어 마모가 심하고 선명하지 않다.

[의의와 평가]

보덕사 중수비는 조선 후기 쇠락해져 가는 보덕사를 중수하고 나서 세운 비석으로, 현재 보덕사의 근원을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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