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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02
한자 唐津築港竣工記念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5년 5월연표보기 -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 건립
현 소재지 마을 회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657-4 지도보기
원소재지 마을 회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657-4
성격 비석
재질 자연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20㎝[높이]|65㎝[폭]
소유자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관리자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에 있는 축항 기념비.

[개설]

당진 지역에는 많은 포구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해상교통의 중심지는 송산면 당산리에 있던 오도항(鰲島港)이었다. 그것은 당진군의 중심 도시였던 당진 읍내리와 가장 가까운 항구였기 때문이다. 육로가 발달되지 못했던 시기의 당진 지역 주민들, 특히 당진 읍내리의 주민들은 오도항에서 출발하여 인천을 경유하고 서울로 들어갔다.

오도항이 언제부터 본격적인 항구의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일제 강점기에는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객선은 많을 때는 100여 명의 승객을 태웠고, 적게는 15~20명을 수송하였다. 이 때 화물도 함께 실었는데 오도에서 인천으로 가던 화물은 주로 쌀, 벼, 잡곡 등의 곡물들이었고, 인천에서 오도로 들어오던 화물은 청어, 동태, 마른 북어, 석유, 양잿물, 정종, 소주, 광목 등 당시의 생필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당시 인천항을 왕복하던 정기 여객선은 조운호, 신흥호, 한성호, 칠복호, 풍천호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인천 기선 회사가 주로 운영하였다.

이와 같이 여객과 화물 수송량이 증가하던 1930년대, 오도항의 항구를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는 1933년에 시작하였고 1935년에 준공하면서 축항 준공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195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도항은 1995년 12월 석문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더 이상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항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건립 경위]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唐津築港竣工記念碑)는 오도항의 항구를 축조한 1935년 5월에 세워졌다. 기념비의 발기인은 당진 번영회(唐津繁榮會), 조선 해양사(朝鮮海洋社), 수산 회조부(須山回漕部), 조선 운○ 주식 회사(朝鮮運○株式會社), 인천 기선 주식 회사(仁川汽船株式會社) 등이다.

[위치]

원래 기념비는 오도항 마을 주민의 밭둑에 뉘어져 있었다. 그 후 기념비를 세워 민가의 마당 끝에 옮겼다가 다시 현재 장소인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657-4번지 오도 마을 회관 앞에 세웠다.

[형태]

기념비는 높이 120㎝, 폭 65㎝의 자연석 중앙에 가로 38㎝, 세로 100㎝의 직사각형으로 면을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자연석을 활용하여 외곽은 다듬지 않았고, 글씨가 쓰인 곳만 평평하게 다듬고 글씨를 새겼다.

[금석문]

앞면에는 ‘唐津築港竣工記念碑(당진축항준공기념비)’라고 새겼다.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과 일본어를 사용하여 기념비의 설립 경위를 기록해 두었다.

[현황]

기념비는 원래 있던 장소에 있지 못하고 계속 옮겨 다녔다. 그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된 듯하고, 뒷면의 글씨도 몇 글자는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다. 특히 건립 연대로 추정되는 ‘소화 10년’의 ‘昭和’라는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되었는데, 어느 주민이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지우고자 글씨를 일부러 삭제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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