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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82
한자 金濟俊
영어공식명칭 Gim JeJun
이칭/별칭 이냐시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정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96년연표보기 - 김제준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김제준 순교
추모 시기/일시 1925년 - 김제준 복자 서품
추모 시기/일시 1984년 - 김제준 성인 서품
출생지 솔뫼 성지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골배 마실 - 경기도 용인 한덕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동면 묵리]
성격 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1984년 5월 6일 성인품(聖人品)에 오름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조선 후기 천주교 순교자.

[개설]

김제준(金濟俊)[1796~1839]은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로, 세례명은 이냐시오다. 김제준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聖人品)에 올랐으며, 할아버지 김진후[비오]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福者品)에 올랐다.

[활동 사항]

김제준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김제준은 할아버지 김진후와 작은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장성한 후 고우르슬라와 결혼하여 1821년 김대건을 낳았다.

솔뫼에 사는 동안 김제준 집안은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았다. 1791년 윤지충이 제사를 거부한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할아버지 김진후가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김진후가 또 한 차례 체포되었다가 유배형을 받았으며,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에서 감옥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순교하였다. 김제준의 작은아버지 김종한은 박해를 피해 경상도에서 살던 중 체포되어 1816년에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이런 가운데에도 김제준은 신앙 생활에 충실하였으나 박해가 계속되었으므로 1827년 무렵 고향 솔뫼를 떠났다.

김제준의 가족은 처음에 서울 청파로 이사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한덕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에 한동안 살다가 인근 골배 마실[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정착하였다. 골배 마실에 살고 있는 동안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 신부가 입국하자 김제준은 서울로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였다. 1836년 모방 신부는 골매 마실 근처 은이 교우촌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고, 김제준을 회장에 임명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한 배교자의 밀고로 회장인 김제준과 마을 신자들이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던 중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외국으로 유학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한때 형벌에 못이겨 배교를 하였으나, 다시 취소하고 신앙을 지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묘소]

김제준의 묘소는 없지만 솔뫼 성지에서 매일 미사 때마다 성인과 복자들 이름으로 호칭 기도를 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김제준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諡福式)이 로마에서 거행될 때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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