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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16
한자 南正
영어공식명칭 Nam Jeong
이칭/별칭 명충(明忠),화산(華山),해도초인(海島樵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기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남정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7년 - 남정 도호 의숙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남정 청림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1년 - 남정 충청도 지계서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남정 대종교 대법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남정 민종식 의병진 정산 의병소 소집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남정 호남 의병 도총영 본군 13진 도총령 군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남정 중국 망명, 청림교 지부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남정 만주 독립군 의성단 창단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남정 정의부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 남정 조선 혁명군 대본영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남정 일본 경찰에 체포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7년 8월 31일 - 남정 경성 지방 법원 판결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남정 한국 광복군 국내 지대 사령부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8월 31일 - 남정 대한민국 총동원 중앙 본부 고문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50년 7월 20일연표보기 - 남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남정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남정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남정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1길 73-48[도이리 373-1]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남정 이주지 - 경성[현 서울특별시] 사직 공원 뒷산
거주|이주지 남정 수감지 - 서울 서대문 형무소
거주|이주지 남정 낙향지 -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 도이리
학교|수학지 도호의숙(桃湖義塾)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지도보기
활동지 남정 활동지 -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장안면 무성산
활동지 남정 활동지 - 중국 만주 봉천 회덕현 오가자
활동지 남정 활동지 - 중국 길림성 수하현
묘소 국립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한국 광복군 국내 지대 사령부 고문|대한민국 총동원 중앙 본부 고문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의병·독립운동가.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서 출생한 남정(南正)[1880~1950]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국내에서 민족 종교인 청림교와 용화교를 앞세워 신도들을 규합하고 중국 만주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선봉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교육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했으며, 중국에서 폭탄 6개를 가지고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 총독부 폭파를 도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가계]

남정의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명충(明忠), 호는 화산(華山), 필명은 해도초인(海島樵人)이다. 아버지는 남정우(南廷虞), 어머니는 여산 송씨(礪山宋氏)이다.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10대 후손이다.

[활동 사항]

1887년에 도호 의숙(桃湖議塾)에서 수학하고 1897년 충청남도 공주군 시곡면 무성산(武城山)에 입산 수도하면서 청림교를 설립하였다.

1901년 충청도 지계서(地契署) 위원(委員)이 되었고, 1902년 대종교 대법사로 있으면서 청년을 규합하여 신앙을 통해 민족 독립을 고취하였다. 4년 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밀령으로 백남익, 민종식 등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이에 참가하여 이듬해인 1906년 5월 청양 정산 창의소 소집관(召集官)으로 임명되어 공주, 홍주, 정산 등지에서 항일 의병 활동에 전력하였다. 1908년 대한 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자 호남 의병 도총영(都總營)을 혼성 편대할 때 본군 13진 도총령 군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내 및 중국 만주와 노령 등지에 48개 청림교 지부를 결성하였다. 1920년에 남정편강렬(片康烈), 양기탁(梁起鐸), 한동추(韓東樞) 등과 함께 만주 독립군 의성단(義成團) 창단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1923년에 의성단을 포함한 37개 독립 단체가 규합된 정의부 소속의 용화 의숙을 설립하여 운용하였다.

1926년 4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선 혁명군 대본영을 조직하고 고려 혁명군 단장(高麗革命軍團長)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 청사를 폭파하고자 폭탄 6개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시도 직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027년 경성 지방 법원 제3호 법정에서 판결을 받고, 1928년 출옥 후 일본 경찰로부터 5년간 주거에 제한을 받고 서산군 대호지면 도이리[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서 은거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 광복군 국내 지대 사령부 고문을 맡았고, 1947년 8월 31일 대한민국 총동원 중앙 본부 고문을 맡았다.

[저술 및 작품]

남정은 「용화교 기도문」을 제작하였다.

[묘소]

대전 국립 현충원에 남정의 묘소가 있고,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1길 73-48[도이리 373-1]에 개축한 생가지가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남정은 1986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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