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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19
한자 安鍾和
영어공식명칭 An Jonghwa
이칭/별칭 함재(涵齋),사응(士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0년연표보기 - 안종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안종화 식년시 문과 병과 급제, 궁내부 낭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안종화 가선대부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안종화 휘문 의숙 4대 숙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안종화 충주에 통명 학교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안종화 사망
출생지 안종화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안종화 이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오곡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안종화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수평리
성격 관료|학자
성별 남자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가선대부

[정의]

근대 개항기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관료이자 국학자.

[개설]

안종화(安鍾和)[1860~1924]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에서 태어나 종2품 가선대부를 지낸 관료이자 학자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안종화는 을사늑약 파기를 위한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직접 교육에 나서 휘문 의숙 교사와 숙장을 지냈고, 각종 교과서와 역사서를 발간하여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가계]

안종화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함재(涵齋), 자는 사응(士應)이다. 아버지는 음직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안기원(安基遠)[1823~1896],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다. 시조인 고려 대장군 안방걸(安邦傑)의 36세손이다.

[활동 사항]

안종화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마에 힘써서 불과 18세에 『동사절요(東史節要)』라는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안종화는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었던 식년시에 3등으로 급제해 진사가 되었고, 이어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궁내부 낭관(宮內府郎官)에 올랐다. 1895년에는 궁내부 주사(宮內府主事)에서 법부 서관(法部書官)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조정의 명을 받아 보빙(報聘)[답례로 외국을 방문함]의 임무를 띠고 일본에 갔으나 국가적 변란을 듣고 귀국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안종화는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을 비롯한 신하 70명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화와 매국 적신(賣國賊臣)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을사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안종화의 개인적인 상소문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안종화를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렸다.

이후 안종화는 근대 교육을 위한 각종 교과서와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집중하였고,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를 위해 1906년 휘문 의숙의 교원으로 『수신(修身)』과 『지지(地誌)』를 가르쳤다. 1908년에는 휘문 의숙의 4대 숙장을 지냈으며, 1909년 4월에는 충주에 통명 학교(通明學校)를 세웠다.

1910년 8월 대한 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자 안종화는 송악으로 낙향하여 노모를 봉양하며 두문불출하였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서거하자, 상경하여 고종의 인산(因山)[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안종화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매일 산에 올라가 통곡하였고, 술만 마시다가 결국 1924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해방 후 안종화가 보유하고 있던 1만 권 가량의 서적은 유족들에 의하여 충남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안종화가 살던 고택이 지금도 당진시 송악읍 오곡리에 남아 있다. 원래 ‘안종화 고택’으로 알려졌는데, 소유자가 바뀌어 현재는 ‘송규섭 가옥(宋圭燮家屋)’이 되었다. 충청남도 민속 문화재 제27호이다.

[학문과 저술]

안종화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우선 역사서로 『동사절요』가 있다. 안종화가 18세 때 쓴 것인데, 30년 정도 집에서 보관해 오다가 1904년에 김학진(金鶴鎭)[1838~1917]의 교감(校勘)[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들을 바로잡음]을 받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큰조카인 안만수(安晩洙)가 맨 마지막에 간기(刊記)를 썼다. 『동사절요』는 단군부터 고려 말까지의 인물 800여 명의 간략한 전기를 모아 모두 6권으로 정리한 사서이다. 또한 인물 중심의 통사로, 19세기 초기의 유교적 역사 서술에서 근대적 역사 서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 책이다. 사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격적으로 학생 교육에 나선 안종화는 1907년 『초등 위생학 교과서』, 『초등 대한 지지』를 저술하고 발간하였으며, 1907년부터 『대한 자강회 월보』, 『기호 흥학회 월보』에 각종 논문을 씀으로써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9년 교과서로 『초등 만국 지리 대요』를 저술해 간행하였고, 역사 인물지인 『국조 인물지(國朝人物志)』를 간행하였다. 『국조 인물지』는 모두 3책으로 일종의 인물 사전과 같은 형식인데, 조선 왕조의 인물들을 연대순에 따라 서술하였다. 안종화는 『국조 인물지』를 서술하기 위해 148종의 서적을 인용하였다고 밝혔는데, 책은 단순한 인물의 나열식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기전체 역사서의 열전 편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1909년에도 『초등 본국 역사』를 저술하여 간행하였고, 1910년에는 『초등 대한 지리』를 간행하였다.

[묘소]

안종화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수평리 아버지 안기원의 묘소 아래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종화의 묘비는 안기원의 묘비와 함께 묘소 부근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안종화의 묘비는 김영한이 짓고 아들 안덕수의 글씨로 새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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