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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50
한자 安東權氏
영어공식명칭 Andong Kwonsi|Andong Kwo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65년 - 안동권씨 당진 입향조 권여경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39년 - 안동권씨 당진 입향조 권여경 사망
본관 안동(安東) - 경상북도 안동시
입향지 안동권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안동권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
묘소|세장지 안동권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
성씨 시조 권행(權幸)
입향 시조 권여경(權餘慶)

[정의]

권행이 시조이고 권여경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에는 고려 시대 ‘염솔부곡’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이 있다. 그곳은 6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성리(下城里)우산리(愚山里)안동권씨(安東權氏)가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입향조는 권여경(權餘慶)[1565~1639]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을 찾다가 정착하였다. 정미면안동권씨는 현재 400년 가까운 연륜을 간직하였고 농업과 학문에 종사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연원]

안동권씨는 고려 시대에 등장한 성씨로, 시조는 권행(權幸)이다. 권행은 원래 신라의 경주 김씨김행(金幸)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큰 공을 세워 ‘삼한 벽상 삼중 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에 오르고 태사(太師)에 제수되었으며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안동에는 ‘태사묘(太師廟)’라 하여 3명의 태사를 배향하고 있다. 안동권씨의 시조인 권행, 안동 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張貞弼)인데 모두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안동권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모두 벌열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중기의 청렴한 관리인 권수평(權守平)[?~125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개국 공신인 권근(權近)[1352~1409], 세조 때의 정난공신인 권람(權覽)[1416~1465],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權慄)[1537~1599]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재상급 41인, 경신(卿臣)[현재의 장관급]이 108인, 대제학 7인, 봉군된 인물이 70인에 이르며 시호를 받은 인물은 60인에 달한다. 또한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62인이며 각종 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87인에 이른다. 그 외에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이 74인, 효행으로 이름 높은 사람은 63인이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에 입향한 인물은 시조의 25세손 권여경이다. 권여경은 삼도 병사(三道兵使)와 황연 병사(黃延兵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인물이다. 권여경은 말년에 한적한 시골로 낙향하기로 마음먹고 동서 두 명과 함께 전국 유람을 하게 되었다. 맏동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작은 동서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라고 전한다.

일행은 우연히 정미면 하성리를 지나면서 최고의 명당을 발견하였다. 북서 방향으로 자모산을 등으로 하며 남동 방향으로 멀리 간대산과 봉화산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중앙에는 냇가가 흐르고 있으며 양쪽으로 구릉지가 안온하게 펼쳐져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권여경하성리에 집터를 잡았다. 맏동서인 청주 한씨는 인근 마을인 서산시 성연면에 자리를 잡았고, 작은 동서인 전의 이씨는 정미면 봉성리에 자리를 잡았다.

[현황]

권여경은 서울로 올라가 생을 마쳤고 권여경의 아들 대부터 본격적으로 정미면에 정착하여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권여경의 아들은 셋인데 맏아들은 권욱(權昱), 둘째 아들은 권담(權曇), 셋째 아들은 권성(權晟)이다. 권욱은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자손들이 정미면 대조리·매방리·하성리·도산리 등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둘째 아들인 권담은 과거에 급제하고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이르렀는데, 자손들이 정미면 우산리에 세거지를 이루면서 정착하였다.

이들은 시조의 9세손인 문하시중 권융(權融)을 거쳐 10세손 시중 권인가(權仁可)의 후손으로, 시중공파라고 한다. 그 후 18세손인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권삼(權參)에서 갈라져 나오기에 사간공파(司諫公派)라고도 하며, 20세손이며 이조 정랑을 지낸 권기(權琦)에서 갈라지기에 이정공파(吏正公派)[이조 정랑공파(吏曹正郞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후 낙향조인 25세손 권여경이 병사(兵使)를 지낸 까닭으로 병사공파(兵使公派)라고 한다. 결국 직접적이고 가장 가까운 권여경을 따라 이들은 병사공파라고 부른다.

권여경의 후손은 400년 가까이 내려오면서 당진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산리를 중심으로 유유자적하면서 유학(儒學)과 문한(文翰)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조선 시대 정미면 하성리우산리는 서산군 해미현 소속이었는데, 해미 향교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면 안동권씨 인물이 유난히 많다. 이들은 모두 14명인데, 15회에 걸쳐 도유사, 혹은 전교를 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선생안』에 기록되어 있는 전체 성씨 중에서 의령 남씨와 함께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는 안동권씨가 뛰어난 유학자를 상당수 배출하였음을 의미한다.

[관련 유적]

당진시 정미면안동 권씨 문중에는 권씨와 관련하여 세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반월정(半月亭)’ 전설이다. 현재 당진시 정미면 하성리 반정재[半亭峙]에는 반월정의 터가 있다. 반월정은 99간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권씨가 이곳에 와서 반월정을 짓고 살았는데 하루는 노비 한 사람이 도망했다. 권씨는 수소문하다가 끝내 제주도에 숨어 있던 노비를 잡아오게 되었다. 그 후 노비는 다시 도망갔는데, 도망가기 직전에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반월정에 불이 붙자 그 불길은 수십 리 밖에서도 보였고, 기왓장이 불에 튀어 멀리 날아갔다. 그중에 『남화경(南華經)』이란 책이 덕삼리간대산(艮大山)에까지 날아와 떨어졌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권여경 전설'이다. 권여경은 풍수지리에 매우 밝았다. 권여경이 지금의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쪽에서 낚시를 하는데 항상 밥을 싸 가지고 갔다. 그런데 주변에 아들과 함께 사는 어느 아낙이 권여경의 밥을 자주 데워 주었다. 이에 권여경은 보답의 마음으로 그 아낙의 집터를 잡아 주었다. 후일 그 집의 가세가 번창하였고 1759년(영조 35)에 영조의 왕비가 된 김한구(金漢耈)[1723~1769]의 딸 정순 왕후의 생가가 되었다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반정재에서 우무산을 넘어 마중리로 가는 고갯길의 이름에 얽힌 전설이다. 이곳을 ‘중고개’라고 부르는데, 권여경이 반월정을 짓고 살 때에 이 고개를 넘어오던 어느 승려가 근방의 아이들에게 “권 병사 댁이 어디냐, 저 커다란 집이 권 병사 댁인가?” 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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