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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35
한자 忠節-象徵唐津忠壯祠
이칭/별칭 충장사,남씨 양세 충신 정려,남이흥 장군 묘 일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73-52[도이리 400-1]|대호지면 충장1길 73-54[도이리 373-1]|대호지면 도이리 374-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기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6년 10월 - 양세 충신 정려를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67년 - 충장사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년 - 당진 충장사 내부 공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12월 31일 -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국가 민속 문화재 제21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12월 29일 - 남이흥 장군 묘 일원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남이흥 장군 숭모제 시작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남유, 남이흥 양세충신 사적지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73-54[도이리 373-1]에 있는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인 충장사(忠壯祠)남이흥 장군의 위패 신주가 모셔진 사당이다. 충장사는 1667년(현종 8)에 세워진 건물이나 오랜 세월로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1968년 내부 공사를 하였다. 사당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면에는 솟을삼문의 정문이 있고, 안의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한 칸 전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안쪽에는 각 칸마다 네 짝의 분합문(分閤門)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겹처마로 마무리되었고 측면에는 큰 방풍판(防風板)이 설치되어 있다.

[애국충절의 성지 불천위 사당 충장사]

충장사는 불천위 사당으로 애국충절을 누대에 기리기 위하여 왕명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충청남도 당진 시내에서 정미·대호지면 방면으로 12㎞ 가다가 정미면 승산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6.5㎞ 가면 충장사가 나온다. 또는 송악 인터체인지(IC)에서 국도 38호선 도로의 현대 제철을 지나 석문면 삼봉리에서 좌측으로 대호 대교를 건너 대호지면 면사무소 방면으로 가다보면 사성리 좌측 산을 넘어 도이리에 위치한 충장사가 나온다.

충장사 입구에는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충장사를 안내하듯 지키고 있고 남이흥 장군 신도비, 남유 장군 노량 유허비, 남응룡 신도비가 나란히 있다.

그곳에서 산을 향하여 바라보면 600년이 넘은 아름다운 소나무 두 그루가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는 남유 장군과 남이흥 장군의 묘역이 있는 소나무 동산이 있다. 한 계단 아래에 충장사가 있으며 충장사 앞에는 400년이 넘은 멋들어진 백일홍 나무 두 그루가 남씨 양세 충신 정려와 종가까지 지키고 있는 듯하다. 이곳이 '삼십년 칠패군부 삼지곤 불영수간(三十年七佩郡符三指閫不營數間)'[세 번 대장을 했고 7번 목사·부사 생활 30년간 공직 생활을 했어도 집 한 칸 영위한 사실이 없음]의 청렴과 피로써 민족 자존 애국충절을 중국 만방에 떨치고 조선 시대 누대에 걸쳐 여러 국왕들의 총애를 받았고 여러 정승들의 감탄과 공경을 받은 애국충절의 성지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사적지이다.

[피로써 나라를 지킨 남씨 양세 충신 정려]

1. 남씨 양세 충신 정려

남유(南瑜)[1552~1598], 남이흥(南以興)[1576~1627] 부자(父子) 충신 정려인 '남씨 양세 충신 정려(南氏兩世忠臣旌閭)' 역시 왕명에 의하여 1627년(인조 5) 9월에 가옥과 함께 하사받고 서울에서 모셔오다가 1790년 이곳에 건립되어 애국충절의 귀감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 왕조는 외침과 내란으로 국권이 흔들려 왕이 도성을 비운 것이 네 번 있었으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李适亂]이었다. 의천 부원군(宜川府院君) 남유 장군과 아들인 충장공(忠壯公) 남이흥 장군 부자는 이 중 임진왜란, 정묘호란, 이괄의 난 등 세 난에 관련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목숨을 잃었다. 충절에는 한 임금을 목숨 걸고 섬긴 충절이 있고 불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충절도 있으며 국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민족과 국가를 수호한 장렬한 죽음이 있다. 이 모든 충절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본받아야 하겠으나 그중에도 외적과 싸워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고 민족의 혼을 이어 되살린 충절이야말로 으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의천 부원군 남유 장군과 충장공 남이흥 장군은 정미면 천의리, 승산리, 대호지면 전역을 사패지로 급여받았고, 대호지면 도이리의 종가(宗家) 뒤에 충장사가 1667년(현종 8) 건립되었으며, 충장사 하단에 왕명에 의하여 받은 남씨 양세 충신 정려의 정려문이 건립되었다.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 건물로, 처마 밑에는 '南氏兩世忠臣旌閭(남씨 양세 충신 정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북쪽 벽에는 남유, 남이흥 장군의 명정 현판(銘旌顯板)이 걸려 있으며, 왼쪽 벽에 정려기(旌閭記)가 있다. 남이흥 정려는 1627년(인조 5) 9월에 명을 받아 서울에서 모셔오다가 1790년 10월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남유 정려는 ‘신미(辛未)’라는 글자만 확인되고 있어 정확한 연도는 알수 없으나 1631년(인조 9)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려각 전면의 아래쪽은 돌벽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홍살(紅箭)이 설치되어 있다.

2. 남유 장군의 생애

남유 장군은 1579년 무과에 급제하여 각 군수, 현감을 거쳐 부평 부사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왕사(王師)를 도왔다. 1597년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있을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고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하지만 전세가 급하니 조정은 상중(喪中)인 남유 장군을 나주 목사(羅州牧使)와 좌영장을 겸직하여 연해 구읍(沿海九邑)의 병사를 관장케 하였다. 1598년(선조 31) 마지막 전장인 남해의 노량(露梁)에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유정(劉綎)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3일 후에 승전(勝戰)으로 마무리하며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날이 1598년 11월 22일이다. 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贈職)하고 의천 부원군(宜天府院君)에 봉하였고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남해 노량 해전 전적지에 좌의정 서명선(徐命善)이 글을 지어 장군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멸실되었다. 하지만 1987년 후손들의 뜻과 노력으로 문헌에 비문(碑文)만 있는 것을 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장군의 묘소 아래로 자리를 옮겨 유허비를 복원 건립하였다.

3. 남이흥 장군의 생애

남이흥 장군의 할아버지 이요당(二樂堂) 남응룡(南應龍)[1514~1555]은 호당(湖堂)에 뽑힌 대석학(大碩學)으로 호당에서 퇴계 이황(李晃)과 함께 왕세자를 가르쳤던 학자였다.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의 유업을 받아 문과의 길을 가고자 학업에 열중했으나 남유 장군이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글 공부를 줄이고 말타기와 활쏘기 무술을 연마하여 무과에 급제한다. 과거급제 후 선전관, 포도대장, 충청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재직 시 진주 촉석루 중건], 구성 부사, 안주 목사 등 요직을 거쳤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난을 제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이괄인조를 왕으로 등용시킨 충신이였으나 변방의 직급인 평안병사 자리를 주었다는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도모한 인물이다. 이괄의 반란군은 1만 2000명이었는데 반해 남이흥이 이끄는 정부군은 4,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인조 임금은 대궐을 반란군에 빼앗기고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공산성 쌍수정으로 파천을 하기에 이르른다. 『동국 전란사』 내란 편에 보면 정부군은 수적으로 약세에도 불구하고 안현[현 무학제]에서 이괄의 반란군을 제압 평정하였다. 남이흥 장군은 그 공으로 '갈성분위출기효력 진무공신(竭誠奮位出氣效力振武功臣)'이 되였다. 또한 그 공훈으로 생시 모습 그대로 그린 초상화[영정(影幀)]를 인조로부터 하사받는 등 여러 포상을 받는다.

이괄의 잔당들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 후금(後金)으로 도주하여 투항한다. 이후 후금과 조선의 국제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상황에 이괄의 잔당은 조선을 침공해야 한다며 후금 국왕을 자극하고, 이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난다. 당시 중국 전황을 살펴보면 1598년 임진왜란 시 명나라에서 조선에 22만 대군을 지원하여 조선은 7년 간의 전란이 종결되지만 중국에서는 군사력이 조선에 지원된 틈을 이용한 여진족 후금에게 침공당하는 등 정세가 불안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당시 임금인 광해군강홍립을 대장으로 10,000명의 군사를 명나라에 지원하였으나 후금 군사에 전멸당하고 강홍립 등 몇몇 장수만 후금에 강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마음먹은 후금의 누르하치는 투항한 이괄의 잔당을 선두로 조선 지형을 안내하게 하여 후금군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을 대장으로 36,000명의 무장 군사로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의 최후 격전지 평안도 안주성에서 평안 병사 남이흥 장군은 3,000명의 군사로 혼신을 다하여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守城)이 불가하자 적을 화약고가 있는 곳으로 유인하여 화약고에 점화한 채 많은 적과 함께 자분(自焚) 순국하였다. 『병자호란사』 정묘호란 편을 보면 당시 전황을 목격한 후금군 아민 대장은 "조선국은 충의(忠義)의 나라라고 하더니 과연 대단한 민족이다. 내 그의 충의에 감탄 하였도다."라며 차후 후금 국왕에게 보고 하였다 한다. 또한 『동국 전란사』 외란 편에서는 조선과 우호국인 명나라 황제는 남이흥 장군의 충절을 "우리 신민(臣民)들도 귀감하도록 하라."라며 황제궁 앞[현 천안문 광장]에 남이흥 장군의 이름을 써 놓고 수개월간 특전을 했다. 조선의 인조남이흥 장군을 국장(國葬)으로 장례하도록 하고 장례 시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장군의 관(棺) 위에 덮어 주도록 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다 전한다. 현재 이 곤룡포[답호]는 충장사 옆 모충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묘호란 발발 이후 조정에서는 관군으로 후금에 대항하기 어렵자 기호학파의 영수인 사계 김장생에게 충청도전라도호소사라는 직함을 주어 유림의 의병을 동원해 나라를 지키도록 했다.

[국가 보물로 남은 유품의 전시관 모충관]

충장사 아래에는 남이흥 장군의 유물 유품이 전시된 모충관이 있다. '충성을 사모한다'는 뜻의 모충관에는 남이흥 장군의 행적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 유품 중 38점이 국가 민속 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500여 점의 유물이 있다. 무엇보다 당시 전황을 실감나게 하는 것은 피 묻은 녹피방령포[갑옷 속받침]와 상의(上衣)이다. 길이 143㎝, 화장 120㎝ 크기의 녹피방령포는 당시 장군의 장엄한 체격을 짐작케 하고, 민족자존 애국충절의 정신으로 흘린 피로써 나라를 지킨 애국심을 무언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특히 장군의 관을 덮은 인조 임금의 곤룡포는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곤룡포[답호]이다. 또한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생시의 모습 그대로 그리게 하여 하사받은 영정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그 색채는 미술사적으로도 가치 있다 한다.

임진왜란 순절 공신 의천 부원군 남유와 정묘호란 순절 공신 충장공 남이흥에게 왕명으로 하사한 13동[정미면 일부와 대호지면 전역]이 분급된 사패절목[토지 등기]은 양세 충신의 업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사패절목은 사장되어 있다가 30년 전에 발견된 문서로써 재산권 행사를 할 수는 없으나 남씨 양세 충신의 업적을 확증해 주는 자료로 손색이 없다.

남이흥 장군의 희귀한 여러 가지 유물을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하여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남이흥 장군의 유물 유품이 전시된 모충관 유물관은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으며 관람을 원할 시에 단체 예약으로만 가능하다. 단 남이흥 장군 문화제가 개최되는 때는 일반인의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하다.

[영광된 죽음을 기리는 만시]

말발굽소리가 자주 들렸다는 남유 장군과 남이흥 장군 묘역에서 남이흥 장군 어머니의 말을 상기해 본다. 남이흥의 어머니 유씨(柳氏) 부인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해 죽었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 만은 전몰병사와 그 미망인과 자식들이 잿더미 속에 울게 됨이 한스럽다.”라고 충신의 아내로서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남이흥의 어머니가 죽자 영의정 지천 최명길은 다음과 같은 만시(挽詩)를 바쳐 이를 기렸다.

은혜롭게 대군의 귀함에 봉해지고[은봉대군귀(恩封大郡貴)]

수명은 팔순의 어른이셨네[수형팔순존(壽亨八旬尊)]

살고 죽음에 남은 한이 없으며[존몰무유한(存沒無遺恨)]

충훈을 일문과 함께 하였네[충훈병일문(忠勳倂一門)]

남이흥 장군의 묘역 하단에는 ‘남충장공 부실 연안 김씨지비(南忠壯公副室延安金氏之碑)’라는 묘비명의 남이흥 장군의 부실인 연안(延安) 김씨(金氏)의 애환 서린 무덤이 있다.

남이흥 장군이 충청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 연안 김씨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으로 참수를 당한다. 그 내용을 파악한 남 병사는 연안 김씨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 참수를 한 관리에게 엄한 죄를 준다. 그로 인하여 연안 김씨는 남이흥을 찾아가 몸종이라도 되게 하여 주십사 간청을 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하며 수차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지만 연안 김씨는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준 대가로 이 한 목숨 봉양하겠노라 하며 수년을 부임지마다 찾아가 애원하여 결국 부실로 맞이하게 된다. 그 후 정묘호란이 발발하여 안주성에서 충장공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연안 김씨는 만삭의 몸으로 자결한다. 금남군 정충신이 이 사연을 알고 찬한 애절한 만시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아비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부실은 지아비를 위하여 죽었도다[부사어군첩사부일가전절세진무(夫死於君妾死夫一家全節世眞無)]

광주 남반 있는 쌍무덤은 천고 행인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광능남반유쌍총천고행인기장호(廣凌南畔留雙塚千古行人起帳呼)]

[애국충절이 깃든 남이흥 장군 묘 일원]

충장사 입구 600년 느티나무 옆에 도리섬 남씨의 최고 어른 남이흥 장군의 할아버지 증 이조 판서 이요당(二樂堂) 남응룡(南應龍) 신도비, 의천 부원군 남유 유허비, 충장공 남이흥 신도비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퇴계 이황과 함께 호당에 차출되어 왕세자를 가르쳤던 이요당 남응룡은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 아버지 남세건이 점지했던 이곳을 자주 내왕하였다 전한다.

남응룡이 대석학으로 퇴계 이황과 함께 왕세자를 가르쳤던 내용은 『명종실록』 3권에 1549년(명종 3) 2월 3일 시강관으로 임금의 도에 대하여 강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퇴계 이황 보다 나이가 작은데도 남응룡은 39세로 요절한다. 퇴계 이황은 조선의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가 단명하여 죽는다는 것에 우애 깊은 마음으로 묘갈을 지었고 제문을 지었다. 퇴계 문집에도 남응룡과 주고받은 몇 편의 시문이 기록되어 있다. 남응룡 가계에 문관의 뿌리가 내포되어 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량전첩 남유 유허비’[좌의정 서명선의 찬]는 원래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멸실되었던 것을 다시 후손들이 뜻을 모아 충장사 경내에 건립했다. 유허비를 건립하는 행사에 국사 편찬 위원장 박영석, 국사 편찬 위원회 사료실장 김후경, 국문학 박사 남광우, 남덕우 전 국무총리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충절의 표상 남이흥 장군 신도비는 좌의정 미수 허목(許穆)이 찬한 것으로 남이흥 장군의 업적을 작은 글씨로 신도비 전면과 후면에 기록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현 성남시청 자리]에 있던 것이나 성남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묘와 함께 1971년 이곳으로 옮겨 건립된 것이다. 신도비 탁본이 모충관에 있고 『충장공 남이흥 장군 유사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번역되어 있다.

묘역 하단에는 송령비(頌靈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남이흥 장군과 함께 자분한 관노와 직속 부하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이다.

남이흥 장군이 정묘호란 안주성에서 임금에게 전황을 혈서로 장계를 써서 큰아들 두극에게 보낸 다음 혼신을 다해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이 불가하자 화약고에 점화하여 자분할 무렵 장군은 관노와 이사관 부하에게 너희들은 이곳 화약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여 살길을 영위하라 하니 관노와 이사관은 “장군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우리는 장군을 위하여 죽겠습니다.” 하고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화약고에 뛰어들어 장군과 함께 자분했다. 1667년 부터 충장사에서 남이흥 장군의 불천위 제향을 정월 21일 모실 때 함께 수백 년 봉향 제향하여 오다가 최근에 ‘이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송구합니다만 송령비(頌靈碑)로 대신한다’ 하며 세워진 의미 있는 송령비이다.

[근대까지 이어진 나라 사랑 충장공의 가계]

지금의 대호지면 일원과 천의리, 승산리 일대인 해미현 서면을 남유남이흥의 사패지로 하사받게 된 이후 도이리를 비롯한 대호지 일대에는 충장공 남이흥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남이흥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큰아들인 두극(斗極)[자는 우고(于高)]이 도이리로 옮겨 살게 되면서 대호지 일대는 의령 남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남두극은 1601년(선조 34) 11월 출생하여 1625년(인조 3) 25살 나이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남두극은 충장공이 순절한 이후 칠원(柒原) 현감에 특별 제수되었으며 이후 인조·효종·현종 3대에 걸쳐 면천 군수, 단양 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남두극은 어머님을 모시고 도이리에 낙향하였다. 이후 1701년 8월 6일 에 도이리에 종가 고택을 개축하고 상량식을 올렸고, 충장사는 1667년 건립되었다. 충장공 남이흥의 묘까지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남두극의 묘부터 도이리 관창산(觀滄山)에 있었음으로 보아 충장사 건립 이전 남두극부터 충장공 후손들이 도이리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이흥의 손자인 남영(南泳)은 1632년(인조 10) 4월에 출생하여 통훈대부 장흥고 직장을 지냈다. 남영의 묘 역시 관창산에 있다. 남이흥의 증손인 대(岱)는 1648년(인조 26)에 태어났다. 남대는 무과 급제하여 어모장군을 지냈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부총관 의림군에 봉해졌다. 남이흥의 고손인 익화(益華)[자는 평숙(平叔)]는 1667년(현종 8)에 태어났다. 남익화는 1707년(숙종 33)에 무과에 급제하여 칠곡 부사, 철원 부사,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1729년(영조 5)에 가선대부 영종첨사 의안군에 봉해졌다. 남익화는 칠곡 부사로 있을 때 『충장공 유사록』을 간행하였으며, 위토를 설치하고 대종계를 설립하여 종중의 체계를 갖추었다.

또한 남이흥 장군의 후손들 중에는 종2품 이상 오른 많은 고위직 무관이 배출되어 대표적인 무반 가문을 이루었는데, 둘째 아들인 어장공 남두병(南斗柄)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통제사를 거처 공조 참판을 역임하고, 어영대장을 지냈으며 남두병의 손자인 남헌(南巘)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여진과의 전투 중 순국하였다. 장군의 세째 아들인 남두기(南斗基)의 후손 중에 남윤(南崙)은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남익령(南益齡)은 함경도 병마절도사, 남익령의 아들인 남헌철(南憲喆)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다섯째 아들인 남두표(南斗杓)의 아들인 남택(南澤)은 병진 무과에 급제하고 뒤에 개성 유수를 지냈으며 그 밖에도 각급 고위 관료를 지낸 후손이 115인이고 무과 출신만 해도 70인에 이른다.

근대에 이르러, 남이흥 장군 후예 중 독립운동가 12인이 건국 훈장을, 5인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남주원(南柱元), 남계창(南啓昌), 남상직(南相直), 남상락(南相洛)은 고종 황제 인산에 참여한 후 파고다 공원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곧바로 귀향하여 대호지·천의 장터 4·4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 4인과 함께 창의사에 위패가 봉안된 남이흥 장군 후손은 60인이 있다. 이렇듯 충장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충절(忠節)의 성지(聖地)라 할 만하다.

[근대 민족 교육의 산실 도호 의숙]

도이리 안에 있는 각 지명도 뜻이 깊다. 강당골은 양세 충신 문중 후손들의 배움터로 종숙(宗塾)이 시작된 명문 사학 도호 의숙이 있었던 지역이고 준마를 기르던 마명동(馬鳴洞)은 지금도 ‘말울리’라 한다. 궁시(弓矢)를 만든 전동(箭洞)은 ‘살꽂이’라 부르고, 무예를 닦던 궁평(弓坪)을 지금도 ‘활울이 들’이라 부른다. 또한 궁평 동쪽에 동각골이 있고, 서쪽에는 서각골이 있는데, 이는 동서 궁각(弓閣)이 있어 연유된 지명이다. 이러한 지명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곳에 세거하던 충장공의 후세들은 무예를 닦고 애국충절의 정신을 기르는 요람으로써 도이리에 정착하고 있다.

남중우의 「도호 의숙」에 의하면, ‘도이(桃李)’란 지명은 남이흥의 큰아들 의풍군(宜豊君) 남두극이 어머니와 함께 낙향한 후 작은 섬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를 심고 도리섬[桃李島]이라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남이흥 장군의 후손들을 도리섬 남씨라 한다.

남이흥 장군의 10대 후손인 독립투사 남정은 청림교 교주로서 충청남도와 전라도에서 항일 운동을 활발히 한 인물이다. 13개도 도총령군사 소모장으로 활약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동추, 편강렬, 양기탁 등과 규합하고 의성단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그 후 정의부 고문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남정은 또한 고려 혁명군 단장으로서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고자 폭탄 6개를 갖고 국내로 잠입하였으나 거사 직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 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형한 기록이 있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청림교는 전국에 42개 지구를 구축하고 한때는 15만~30만 명의 신도를 가졌던 민족 종교로 국내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강렬한 독립운동을 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도호 의숙’이 자리하고 있다. 종숙으로 시작하여 의숙으로 발전된 도호 의숙화서 이항로의 학맥으로 기존 유림에서와 같이 사서삼경을 수학한 다음 수준 높은 『송자대전』을 구입하여 강의했으며, 『화서집(華西集)』, 『성제집(誠齊集)』, 『지산집(志山集)』, 『직암집(直菴集)』 등 애국정신이 들어 있는 책을 직접 만들어 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도호 의숙 출신들은 중국에서 백범 김구, 조만식, 김좌진 장군 등의 독립지사들과 교류가 깊었으며 대호지 사성리 남주원 댁 도이리 강당을 자주 찾았던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지산 김복한도호 의숙 인사들과 각별한 사이였음을 '도호 의숙'과 『직암집』 사록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도호 의숙 출신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활약상을 보여 주는 유물로는 남상락이 3·1 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를 대호지까지 숨겨와 그것을 보고 자수를 놓아 태극기를 만들어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에 썼던 태극기[남상락 자수 태극기], 청림교 기도서, 청림교 지부에서 남정에게 보낸 간찰, 도호 의숙의 교재 등 민족자존,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부 자료와 도호 의숙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이 충장사 모충관에 일가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한 집안의 사적인 유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남유, 남이흥 양세 충신의 충절에 이어 근대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의 나라 사랑과 애국충절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북한 국가 지정 문화재 충민사]

평안남도 안주 정묘호란 전적지에는 남이흥 장군과 16인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3,000군사를 제향하는 충민사(忠愍祠)가 있다. 숙종 왕명에 의해 1681년 건립된 충민사는 당시 조선 최대의 충신 사당으로 10동의 건물 중 상단의 제일 큰 건물에 평안 병사 남이흥 장군 위패가 있는 등 당시 직급별로 상, 하, 동무, 서무로 되어 있고,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 근찬,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전서, 이조 판서 조상우(趙相遇) 근서로 된 충민사비가 있다. 제향 시 초헌관은 임금이 보낸 유신, 아헌관은 평안 감사, 평안 병사, 종헌관은 평안 우후가 매년 1월 21일 제향했다고 한다. 평안 감사 유상운(柳尙運), 평안 병사 이세화(李世華) 장계 상소에 의해 건립된 충민사(忠愍祠)는 북한 국가 지정 문화재 제7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황]

“현실적인 것은 이상적이여야 하고 이상적인 것은 이성적이여야 한다.”는 헤겔의 좋은 정치사상 철학이 요구되는 이 시대이다.

1950년대 재무부 장관을 했던 당진 출신 인태식 장관은 충장공 13대 종손 남기종, 남기찬 형제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여서 충장사 옆 도이리 저수지에 낚시를 자주 왔다. 인태식 장관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충장공은 우리나라의 명분 있는 인물이므로 국가 문화제로 행사를 하라.”고 수차례 권고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도 현충사와 같이 충장사 주변을 성역화하라고 충장공파 문중에 수차례 권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천위 제향은 남이흥 장군 종손과 후손들이 지키고 봉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문중 어른들은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그 후 1989년 당진의 뜻있는 유지들이 모여 ‘남이흥 장군 숭모제’를 시작했다. 지금은 ‘남이흥 장군 문화제’로 당진 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탄신일을 기준하여 애국충절을 기리며 군, 관, 민 학생들이 모여 미흡한 행사 지원금으로 28회째 행사하고 있다.

충절의 표상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며 누대 끊임없이 제향하라는 왕명에 의해 1667년 건립된 충장사에는 장군의 초상화와 신주가 모셔져 있다.

장군의 순국일 음력 정월21일, 정경부인 하동 정씨 음력 7월20일에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제향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장군의 후손이 결혼을 하면 또한 신혼부부가 충장사를 찾아 애국충절을 기리며 참배 인사를 한다.

또한 지역의 당진 현감, 군수, 당진 경찰서장, 교육장 등이 부임하면 양세 충신 문에 경의를 표하고 충장사를 참배하여 인사드림은 당연한 일이였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킨 애국충절을 후손만대 기리라는 왕명으로 내려진 불천위 사당으로서 충절의 표상 충장공 남이흥 장군 위패가 모셔진 충장사는 1667년(현종 8) 건립되어 남이흥 장군 후손들이 모여 매년 음력 1월 21일 장군의 순국일에 제향을 모시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또한 남이흥 장군 탄신일인 9월 10일에는 당진 시민, 군(軍), 관(官),민(民) 학생들이 모여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개최하며 장군의 충의, 청렴,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2008년 충장사를 방문했던 한국 역사 문화원 원장이며 전 국사 편찬 위원장 이성무 박사는 남이흥 장군에 대한 저술과 학술 세미나를 하였으며 전 국사 편찬 위원장 유영익 박사는 장군의 충절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2014년 2월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남이흥 장군을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그 선양 행사에는 많은 하객들이 모여 찬사를 보냈다.

굴뚝 없는 관광 인프라 구축 사업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준다, 그 관광 인프라의 일원에 지역 문화 축제가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역사가 짧은 미국도 전쟁 시 국가에 공헌한 인물의 축제를 15일 이상 개최하며 그 뜻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조국애를 부각시킨다. 가까운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한 남이흥·남유 양세 충신에 대한 역사적 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충장사남이흥 장군 문화제는 당진이라는 작은 지역의 축제이기에 아직 미흡함이 많다. 하지만 애국충절의 성지 ‘충장사’와 충절의 표상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문화 관광부와 충청남도와 당진시가 좀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한중 문화 교류 소재를 만들고, 남북한 문화 교류 소재로 만들어 활용하며, 충장사를 역사 문화 관광지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지역을 연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명나라 황제가 신민들에게 귀감하도록 특전을 했던 자금성[천안문] 앞, 정묘 독전 살신 위국 애국충절을 목숨을 던져 보여 줬던 평안남도 안주성,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충남 공주 공산성 쌍수정에서 대궐까지 모셨던 충남 공주의 공산성, 임진왜란 시 불타 없어졌던 진주성 촉석루를 지금의 모습대로 중수한 진주성, 즉 자금성-안주성-공산성-진주성 4곳의 성을 연계한 오페라, 뮤지컬, 드라마 등을 제작하여 한중 문화 교류의 소재로 사용하여 한류 문화권역의 일원으로 부각 발전시키기를 소망한다. 평안남도 안주에 남이흥 장군을 비롯하여 16인 외 3,000군사를 제향했던 조선 최대 충신 사당 충민사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애국충절의 성지 충장사를 연계해 남북한 문화 교류 활성화 소재로 사용하기를 바란다. 충장사를 국가 관광 사적지로 성역화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국제 관광객을 유치하고 민족 교육의 산실 도호 의숙과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역사적·교훈적인 자료와 애국충절 정신 교육의 장으로 최대한 활용되기를 염원한다.

피로써 민족자존 애국충절을 중국 만방에 떨치고, 조선 시대 누대의 여러 국왕에게 총애를 받았고 누대 정승들의 감탄과 공경을 받았던, 애국충절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사적지를 무한한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고 성역화하여 당진 시민을 비롯한 국민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의 교육장으로 개발되기를 기원하고 남북 문화교류의 장으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4.09 집필자 수정 요청 충민사 건립연도 및 남두극 가계 관련 서술 수정.
2018.04.02 원고 수정 및 교열 집필자 요청에 의한 원고 수정 및 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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