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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섬포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098
한자 鰲島浦口
영어공식명칭 Osum Inlet
이칭/별칭 오도 나루터,오도항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시설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930년대 - 오섬포구 개항 추정
최초 설립지 오섬포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현 소재지 오섬포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지도보기
성격 나루터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의 오섬 나루와 인천을 오가던 송산면 당산리의 포구.

[개설]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역천 변에 있던 포구로서 고대면 슬항리 오섬 나루와 인천을 오가던 나루이다. 오섬포구는 일제 강점기부터 당진의 외항 역할을 하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 간척에 의해서 연륙되면서 인천항을 오가는 큰 포구로 발전되었다.

[건립 경위]

역천 하류에 위치한 오섬은 원래 송산면 당산 3리에 있는 옛 포구이다. 역천을 사이에 두고 고대면 슬항리의 오섬 나루를 건너다니던 곳이다. 원래는 큰 오섬, 작은 오섬이라는 두 개의 섬이었다. 포구의 개항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30년대 일제 강점기로 추정된다. 1927년 이곳의 대지주인 일본인 하나다[花田]가 더 넓은 토지 확보를 위해서 개인 자금으로 거먹산에서 오도까지 500m 정도 바다를 막기 위한 간척 공사를 시작하여 지게로 돌과 흙을 날라서 5년 정도 걸려서 막았다. 오도 공사가 충청남도 최초의 간척 공사이다. 이후 간척지에서 생산된 막대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서 화물선이 정박하였다. 간척 공사가 끝난 후에 서산, 당진 등지에서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착민들이 생필품, 공산품, 농기구, 기름 등을 사기 위해서 인천에 왕래하기 위해서 오도항이 개설되었고, 최초로 여객선이 등장했다.

[변천]

고대면 슬항리 오섬 나루는 고대, 석문, 정미 사람들이 거룻배를 타고 역천을 건너서 오섬포구에서 인천 가는 배를 타던 곳이다. 오섬포구는 섬 모양이 게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던 역천 하류의 무인도였다. 1960년대까지 증기선이 인천으로부터 왕래하였다. 수심 약 6~8m인 큰 오섬에 포구가 있었다. 그 당시 인천항을 왕래하던 배는 조운호, 신흥호, 한성호, 칠복호, 풍천호 등이었는데, 풍천호는 해난 사고 후 몇 개월 운항하다가 중지하였다. 꾸준히 왕복하던 여객선은 조운호와 마르보시 등 2개 회사였다. 2척의 정기 여객선이 매일 교대로 운행했다. 큰 여객선은 100여 명의 승객과 화물을 싣고 다녔다. 보통 70~80명, 적게는 15~30명 정도의 승객을 싣고 다녔다. 여객선은 매일 인천으로 운항했고 민물이 거의 만조일 때 들어와 당진, 고대, 순성, 면천, 송악 사람들과 쌀, 벼, 잡곡 등 농산물을 싣고 떠났다. 인천항에서는 청어, 동태, 건태, 양잿물, 소주, 광목, 잡화, 공산품, 화물을 싣고 오도항에 조수가 거의 만조일 때에 도착하였다. 즉, 배가 물때에 따라 들어왔다 나갔다 하였다.

한국 전쟁 시 옹진군 피난민들이 선박을 타고 와 정착한 1950~1954년 경이 전성기였다. 당시 큰 오섬에 약 100세대, 작은 오섬에 약 20세대가 피난 왔고 인구는 약 480명 정도였다. 행정 구역은 송산면이지만 당진의 외항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오섬포구에는 일본인 하나다가 간척한 농경지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쌀 보관 창고가 지어졌다. 쌀 보관 창고는 이 당시 약 7000여 가마를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각지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이 처음에는 농사에 종사했으나, 한국 전쟁 후 옹진군 피난민 어부들이 내려와서 농민들이 어업을 배우게 되었다. 주민들은 준치, 숭어, 삼치, 바지락, 조개 등이 서해 갯벌에 무진장 많아서 어업으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

[구성]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된 「1:50,000 당진 지형도」에 의하면, 오도는 사행(蛇行)하는 역천의 최하류에 있던 큰 섬과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육지 쪽에 작은 오섬이, 역천변 바깥쪽에 큰 오섬이 위치했다. 당진천이 유입되면서 많은 토사를 섬 주변의 간사지에 퇴적시키면서 얕아지자 일본인 하나다가 간척 공사를 하여 넓은 간척 평야를 만들었다. 오도항은 아산만에서 지근거리에 있어서 큰 증기선이 다니기에 유리했고, 또 당진 시내와 가까워서 당진의 외항 역할을 하였다. 섬 시절에는 나룻배가 육지와 연락을 해 주었지만 연륙되고 나서는 1932년에 계선장을 만들고 1945년 축항 공사를 하여 당진, 송악, 송산, 신평, 순성, 고대 사람들이 인천을 통하여 서울로 가는 데 주로 이용하였다.

[현황]

오섬은 1970년대까지도 고대면 오섬 나루를 건너는 나룻터가 있었지만 현재는 완전히 연륙되어서 답작지로 변해 있다. 1932년에 계선장을 기공하여 1934년에 완성하고 1945년 5월에 세운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가 논둑에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 발견되어 복원되었다. 당진 축항 준공 기념비는 모두 종서로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는데 한자와 일본어가 혼용되어 있다. 비문 내용은 계선장이 1930년 당진 번영회와 지방 일반민의 뜨거운 요망에 의하여 당국에 진정되었는데, 당시 충청남도 지사인 유진순이 그 진정을 받아들여 보조금을 교부하고 지방민과 인천 거주 유지들의 원조를 받아서 공사비 5,000원을 가지고 1932년에 기공했고 1934년에 완성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당진 군수 이승구는 오도 포구로 이르는 길을 크게 개수하여 3등 도로로 승격시켰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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