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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229
한자 龍淵洞
영어공식명칭 Yongyeon-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충청남도 당진군 이배면 용연리로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17년 - 충청남도 당진군 이배면 용연리에서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면 용연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면 용연리에서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용연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2012년 1월 1일 -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용연리에서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으로 개편
성격 법정동
면적 5.883㎢
가구수 234세대
인구[남/여] 530명[남자 285명, 여자 245명]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속하는 법정동.

[개설]

당진시 용연동(龍淵洞)은 당진 중심지에서 서산시 운산 방향으로 옛 32번 국도를 타고 약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하천이 마을의 동서를 가로지르고 있는 전형적인 쌀농사 중심의 농촌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는 용연천 상류에 용연 저수지가 있으며, 서해안 고속 도로가 마을의 남단을 통과하고 있다.

[명칭 유래]

용연동은 옛날 마을 앞에 있던 용연(龍淵)[용못]에서 용(龍)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못, 용연 또는 용연리(龍淵里)라 하였다. 가뭄이 들 때 남쪽 이배산(利背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굴러서 용연에 떨어지면 비가 온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용연동은 원래 당진군 남면(南面) 지역에 속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면 신촌리(新村里), 발산리(鉢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그대로 용연리라고 하였으며, 당진군 이배면에 편입되었다. 1917년 당진군 이배면이 당진군 당진면이 되었으며, 1963년 당진군 당진면이 당진군 당진읍이 되었다. 2012년 당진군이 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법정동이 되어 당진시 용연동이 되었다. 조선 시대 시흥도 역승(時興道驛丞)에 딸린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다.

[자연환경]

용연동은 마을 북서쪽 일부 지역에 역천이 흐르고 있다. 용연천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산능선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사이를 흐르는 동류하는 용연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동서로 길게 남북으로 좁게 분포하고 있다. 면천면 죽동리 음고개에서 발원한 용연천이 서쪽으로 흘러 용연 저수지에 일단 유입된 다음에 다시 유출하여 동류하여 마을 한가운데를 흘러서 용천교 앞에서 역천에 유입된다. 용연천 주변의 충적지에 답작 지대가 하천을 따라서 띠 모양으로 전개된다. 남쪽에는 면천 경계에 있는 241m인 야산을 최고봉으로 121m, 111m, 101m 등 100m 내외의 저산성 구릉들이 전개되며, 북쪽에도 110m 내외의 야산들이 전개되고 있다.

[자연 마을]

용연동은 원용연, 신촌, 발산, 역말, 갈밭뜸, 안골, 눈티, 쪽제빗골, 사굴, 동녘골, 절터골, 복골, 응골, 양지판, 서주골, 음산말, 살무리, 군개, 서당골, 용무출, 구석말, 불당골, 점골, 큰골, 절골, 이철리, 청산, 당골의 28개 자연 마을이 있다.

원용연(元龍淵)은 원래 당진군 남면 용연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하기 전의 ‘원 용연리’ 지역을 말한다. 용연[용못]이 있어서 ‘용연’이라고 하는데, 역말 앞에 있던 용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전한다. 신촌(新村)은 옛 당진군 남면 신촌리(新村里) 지역으로, 갈밭뜸 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새마을, 새말이라고도 한다. 발산(鉢山)은 원래 당진군 남면 발산리(鉢山里) 지역으로, 안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에 발산[목닥봉]이 있고, 또 세 봉우리가 있는 삼승봉이 있다. 일설에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바리[鉢] 그릇처럼 생겼다 한다. 역말[驛村]은 옛 용연 초등학교 현 유치원 앞 하천변 갈대가 있는 부근에 역말(驛─)이 있었다. 이곳에 조선 시대 시흥도 역승(時興道驛丞)에 딸린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는데, 흥세역은 금정역(金井驛)에 속한다. 흥세역에는 역리(驛吏) 17명, 노(奴) 2명, 비(婢) 2명, 기마(騎馬) 4필, 복마(卜馬) 4필이 있었다. 마을 앞 큰 내인 역천(驛川)이 변해서 '역내', '영내'라고도 부른다. 또 당진현 남면 시기에는 상역리(上驛里)와 하역리(下驛里)로 나누어져 있었다. 역말, 영말이라고도 한다. 갈밭뜸[蘆花村]은 용연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갈대밭이 많이 있었으며 용연 1구와 2구 사이에 있다. 안골[內洞]은 용연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느티나무[유투나무]가 있어서 유투나뭇골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안말, 내동이라고도 부른다. 응골의 서쪽 방향에 있는 응골 고개 너머에 있었다.

눈티[雪峙]는 눈티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새말에서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하여 눈틔 고개, 눈티 고개, 설티 등으로 불리며 또 옛날 왕자의 태를 서산시 운산면 태봉골에 묻기 위해서 가는 도중에 쉬었다 갔기에 논태 고개라고도 한다. 옛 기록에는 노은치(老隱峙) 고개로 나온다. 쪽제빗골은 갈밭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쪽제비가 많이 있어서 붓장사와 장사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사굴은 발산의 남서쪽에 5호 정도가 살았으나 현재는 폐가되었다. 동녘골은 발산의 동쪽 산골짜기에 3호가 거주했으나 현재는 폐가되었다. 절터골은 사골과 동녘골의 중간에 있다. 옛날에 절터가 있었고 현재 가옥은 없다. 복골은 눈티 고개 남서쪽에 있으며, 옛날에 2호가 살았다. 복이 있는 계곡에서 명칭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응골은 복골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응달이 진다. 양지판은 구석물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쪽 야산 밑에 있다. 용연 1구에 속한다. 서주골은 용연 1구의 서쪽 산모퉁이에 있었다. 음산말은 구석물의 서쪽 산 밑에 있으며 양지판, 서주골, 구석말, 살무리의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살무리는 군개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군개는 용무출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갈밭과 군개 사이에 둑 하나의 경계를 두고 있다. 옛날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이다. 서당골은 양지판의 북쪽에 있으며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용무출은 서당골 들어가는 입구의 산모퉁이에 있다. 우뚝 솟은 산에서 옛날에 용이 춤추며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구석말은 양지편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용연 1구의 끝, 구석진 골에 있다. 불당골은 새마을[신촌] 앞 야산에 있는 마을로 청산(靑山)의 동쪽에 있다. 붓당골이라고도 한다. 점골은 불당골의 동쪽에 위치하고 예전에 그릇 굽는 곳이 있었다. 즘골이라고도 한다. 큰골은 불당골의 동쪽 제일 큰 산골에 있다. 절골은 신촌의 동쪽에 위치하고 예전에 절이 있었다. 이철리는 절골의 동쪽에 있었다. 청산은 불당골의 서쪽 청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당진 관아에서 면천으로 가는 대로는 눈티 고개를 넘어서 가고, 해미로 가는 대로는 청산치(靑山峙)를 지나서 갔다. 당골은 신촌의 서쪽에 있으며, 옛날 당나라 사람들의 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현황]

2016년 현재 면적은 5.883㎢이며, 인구는 234세대에 총 530명에 남자는 285명, 여자는 245명이다. 북쪽에는 행정동대덕동이, 동쪽에는 면천면 죽동리가, 남쪽에는 사기동이, 서쪽에는 정미면 모평리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용연 2리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석조 보살 입상과 석조 보살 좌상은 현재 부여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용연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고 현재는 당진 용연 유치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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