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왜구의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87
한자 倭寇-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학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08년 5월15일 - 왜구의 침입 당진현에 왜선 14척이 쳐들어왔으나 도절제사 이도분이 물리침
성격 전란(戰亂)
관련 인물/단체 이도분

[정의]

고려 말, 조선 초기 왜구들의 빈번한 침입으로 충청남도 당진 지방이 입은 전란(戰亂)과 그 피해.

[개설]

왜구는 고려 말인 1223년(고종 10)에 금주[현 경상남도 김해]를 처음 침입한 이후 1350년(충정왕 2)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169년 동안 총 519회나 침략하였다. 이런 왜구들의 침략에 고려 조정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왜구들의 침입은 남부 연안 지대를 넘어 서해를 타고 점차 북상하게 되었다. 왜구들의 약탈은 주로 미곡(米穀)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피해 지역은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漕運船)과 양곡을 저장한 조창(漕倉)이 있는 해안 지역이었다. 충청남도 당진은 곡창 지대로 해안에 위치하여 많은 침략을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 말의 정치 상황은 내적으로 무신 정권에 의한 무단 정치(武斷政治)와 대몽 항쟁(對蒙 抗爭)으로 정치권력이 불안하였고, 거란족과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일본에서는 남북조의 혼란으로 중앙 통치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시기여서 북규슈와 대마도 지역의 민초들은 쉽게 해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왜구의 잦은 침략은 남서부 연안 지방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지만 고려는 왜구의 침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였다.

[경과]

왜구의 침입은 남부 연안에서 서해안을 타고 점차 북상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위협하기에 이른다.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당진 지방을 침략한 사료를 정리해 보면, 고려 1358년(공민왕 7) 5월 11일 면천에 왜구가 침입하였고, 1360년(공민왕 9) 5월 왜구가 신평현에 침입하였으며, 1367년(공민왕 16) 11월에는 면천에 침입하여 운수선을 노략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378년(우왕 4) 4월에는 덕풍 및 합덕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우강면에서 배를 타고 도주하기도 하였으며, 1379년(우왕 5) 8월에는 정미면에 침입하기도 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었다. 1408년(태종 8년) 5월 15일 당진현에 왜선 14척이 쳐들어와 육지에 올라 도둑질하고 약탈하였으나 도절제사(都節制使) 이도분(李都芬)이 쳐서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충청도에 침입한 왜구들은 대규모여서 군과 현의 치소(治所)를 점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신평현은 현성까지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당진 전역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해안에 연해 있던 군현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피해가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과]

1223년(고종 10) 고려 말에 시작된 왜구의 침입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조선의 강력한 대응과 정벌로 일단락되었다. 조선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군현에 평지성인 읍성을 쌓게 하였다.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이때 쌓은 것이고, 면천에 고성(古城)을 대신할 새 읍성을 건설하기로 하여 1439년(세종 21)에 완공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충청남도 당진의 면천읍성(沔川邑城)이다.

[의의와 평가]

왜구의 침입은 고려 역사에서 국력의 쇠퇴로 인해 민중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이다. 나가서 외적의 침략에 방어할 힘을 잃은 고려는 점차 국력이 쇠퇴하여 망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