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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곡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96
한자 勝戰谷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Seungjeongok
이칭/별칭 승전곡 전투,승전우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장수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0월 24일연표보기 - 승전곡 전투
발생|시작 장소 승전곡 전투 - 충남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지도보기
성격 내포 동학 농민군의 전투
관련 인물/단체 덕포 박인호, 예포 박희인, 산천포 이창구, 내포의 동학 농민군

[정의]

1894년 10월 24일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에서 내포의 동학 농민군과 이들의 진압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1894년 7월 일본군들의 경복궁 불법 점령 이후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이른바 동학 농민 전쟁의 2차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내포의 동학 농민군들도 여미벌에서 총기포(總起包)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경군이 내포로 파견되었고, 현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894년 10월 24일 정오 무렵에 농민군들은 당진 면천에서 서산 운산으로 이어지는 협곡인 승전곡의 능선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해 오는 진압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서 당당히 승리하였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안으로는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이어지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 생존 위기에 봉착한 민초들은 새로운 세상을 기대한 마음으로 동학에 의지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훗날 보국안민,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동학 농민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1894년 10월 24일, 총 기포(起包)한 내포 동학 농민군들이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인 진압군을 맞이하여, 현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勝戰谷)[僧田隅 혹은 勝戰項]에서 승리한 전투가 바로 ‘승전곡 전투’이다.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한양에서 파견한 진압군의 이동 경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면천에 당도한 후 곧바로 여미벌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사들을 나누어 이배산 능선과 검암산 능선에 미리 매복하였다. 승전곡 안으로 진압군을 유인한 농민군들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당당히 승리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승전곡 전투이다.

당시 치열했던 승전곡 전투 상황을 자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압군이 면천면 삼웅리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농민군의 첨병과 1차 교전을 하였고, 승전목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400여 명의 농민군과 2차 교전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농민군들이 퇴각하였다. 이는 농민군들이 후퇴를 가장해서 진압군을 승전곡 안으로 끌어들여서 섬멸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진압군들도 막상 승전곡에 다다라서는 잠시 주춤거렸으나, 자신들의 우수한 화력을 앞세워서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던 농민군은, 열세한 무기와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안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고 한 시간이 지났지만 어느 쪽에도 유리하지 않은 치열한 공방전만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전투가 한창일 무렵, 농민군들은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개시하였다.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검은 연기가 앞을 가리자 검암산 쪽으로 진격하던 관군들이 먼저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겁을 먹은 일본군들도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도한 농민군들이 용기백배하여 죽기 살기로 한꺼번에 산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며 압박을 가하자, 진압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급거 퇴각하였다. 이때에 진압군들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개인의 군장을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이렇게 승전곡 전투에서 첫승을 기록한 농민군들은 배낭 78개, 상하 겨울 내의 78벌, 휴대 식량 312인분, 일대 78개, 수첩 78개, 깡통과 소금 각각 78개, 쌀자루 78매, 반합 78개, 구두 78켤레 등 다량의 노획물도 획득하였다.

[결과]

승전곡 전투는 내포 농민군들에게는 고무적인 첫 승리였으며,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도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단 두 곳 중에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군과 정면으로 교전하여 승리한 유일무이한 전투로도 기록되었다. 승전곡 전투는 그만큼 동학 농민 전쟁기를 통틀어서 가장 의미 있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전곡 전투가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쌍방 간 인명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전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승전곡 전투에서 농민군들의 승리의 요인 중에는 첫째, 연합군을 지휘한 일본군들이 농민군들을 너무 쉽게 본 탓도 있겠지만 둘째, 이미 엄청난 수와 조직적인 움직임 그리고 전투력 측면에서 이미 이전의 농민군들과는 월등히 달라졌음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농민군들은 아직도 죽창을 주무기로 들고 있었고, 징과 괭가리와 함성으로 무장하였으며, 제식 훈련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말 그대로 농민군들이었다. 하지만 1만 5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임에 분명하였다. 당시 승전곡에서 진압군을 지휘했던 아카마츠 소위의 보고서에는 “오후 3시 30분 머리 위 산정에서 수천 명의 적군이 맹렬하게 사격해 왔으며, 게다가 서풍을 기화로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습격을 해와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그리하여 오후 4시 산개해 있던 대원들을 순차적으로 퇴각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카마츠 소위가 자신의 첫 전투에서 실패한 과오를 감추기 위해 당시 전투 상황을 불가항력적으로 보고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내포 동학 농민군들이 치밀한 매복 및 유인 작전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얻은 승리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결국 진압군들은 첫 전투에서부터 패전하고 보급 장비와 식량까지 잃어버리고는 허겁지겁 면천으로 퇴각하였고, 곧이어 대천을 지나 덕산을 거쳐 홍주성에 들어가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군들의 사기와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반대로 농민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승전곡 전투의 승리를 통해 내포 동학 농민군들은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을 일시에 극복함은 물론 정신없이 퇴각하는 진압군들을 추격하면서 당당하게 면천에 무혈입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승전곡 전투는 호남의 동학 농민군의 서울 진격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먼저 내포의 농민군부터 토벌하여 추후 있을지도 모를 “연합 작전을 사전에 봉쇄한다.”는 진압군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또한 승전곡 전투는 내포 동학 농민군이 총봉기하여 치렀던 첫 전투였으며, 첫 승이자 대승이었다. 더욱이 승전곡 전투가 신례원 관작리에서 3만에 달하는 대인원이 참가하는, 내포 지역 2차 총봉기의 바탕이 되었고 역사적인 10월 28일 홍주성 전투의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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