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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24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of Dangj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 당진 의병 항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 면천 공립 보통학교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 전개
발생|시작 장소 당진의 독립운동 - 충청남도 당진시
종결 장소 당진의 독립운동 - 충청남도 당진시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개설]

당진의 독립운동은 대한 제국의 국권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상실되어 가던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내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당진 사람들의 항일 투쟁을 지칭한다. 당진 사람들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우리의 외교권이 피탈됨을 국권 상실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의병장들은 서해안에 접한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으며 경기도 의병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며 한 차원 높은 전술을 활용하였다.

당진 지역 사람들은 1910년 8월 29일 부득이한 일제 강점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결기를 보여 주었다. 본격적인 항쟁은 1919년 3·1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적인 문화 민족이라는 자존심과 성리학적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주민들이 독립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 대표적인 항쟁은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 학생들의 3·10 독립 만세 운동대호지면정미면 주민들의 4·4 독립 만세 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은 당진 지역 주민의 항쟁 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당진은 차령산맥의 서쪽에 자리 잡은 내포 문화권에 속해 있고 예산·홍성·서산과 접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북쪽에 위치하며 아산만을 경계로 경기도와 접하고 있다. 하지만 당진 지역은 내포 문화권의 타 군에 비하여 면적과 인구, 산물 등 전체적인 군세가 빈약한 편이다. 그나마 삽교천아산만을 통해 인천으로 연결되는 수로가 형성되어 당진 사람들은 이 해로를 통해 인천과 서울로 인력과 물자를 송출하였다. 당진은 이러한 해상 교통을 이용해 나름대로 근대화를 꾀하였고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경인 지구 세력가의 토지 수탈 대상지로 전락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진 사람들의 항쟁 의식은 기호 성리학의 위정척사 사상을 근저(根底)로 하면서, 이 해로를 통해 얻은 배움과 아픔이 결합된 결과다.

[경과]

당진 지역은 한말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일찍이 대난지도소난지도를 중심으로 수적의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수적은 활빈당의 일종으로 1900년대 들어서 치열하였다. 당시 『황성신문』에 보면 1901년 5월, 활빈당이 당진의 대난지도장고항에 출몰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지역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인접하여, 활빈당이 바다를 이용하여 당진과 경기 지역을 배로 오르내리면서 신출귀몰한 작전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활빈당은 1906년 의병의 항쟁이 시작되자, 상당수는 의병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병들은 대난지도소난지도를 본거지로 활용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으며 일제의 추격을 피하면서 효과적인 작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당진의 의병은 1905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1906년 초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가 해산된 후에는 더욱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어났던 의병으로는 1906년, 당진의 기지시에 병오 창의도소(丙午倡義都所)를 설치하여 면천성을 공격하였고 소난지도에서 항쟁하다가 체포된 최구현과 홍주 의병에 참여하였던 이만식, 맹달섭 등이 두드러진다. 또한 1907년 이후의 후기 의병으로는 고대면 출신의 정주원, 면천면 출신의 도중삼(都仲三)·박계문(朴桂文)·김성백(金成伯), 당진 석문면 출신의 정선경(鄭善京)·하군배(河君輩), 당진읍 출신의 심주현(沈周鉉), 고대면손응현(孫應鉉), 그리고 최종성(崔鍾成)·최동식(崔東植)·신경춘(申景春) 등이 있다. 이들 중 당진 지역 대표적인 의병장은 최구현정주원이었다.

최구현(崔九鉉)[1866~1906]은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출신으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늑결되자 1906년 4월, 기지장에 병오 창의도소를 설치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하였다. 결국 최구현 의병장은 체포되었고 면천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옥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정주원(鄭周源)[1870~1925]은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경기도 죽산에서 창의한 의병장이다. 정주원은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직후에 처음에는 서용범(徐用凡) 의병에 투신하여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주원은 많을 때에는 400~500명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경기·충청 지역에서 많은 전과를 수립하였으며, 1908년 초에는 경기·충남북 지역의 의병 연합체인 13진 창의소를 조직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1908년 8월, 일본 수비대에 의해 해미군 적서촌[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체포되었다. 출옥 후에는 송악면 가학리에서 거주하다가 1925년 사망하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전도 당진의 대표적인 항쟁이었다. 수원 출신의 홍원식[洪元植, 洪一初] 대장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1908년 소난지도에 주둔하고 있었고, 3월 15일 아침 6시, 일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경찰대가 배를 타고 소난지도를 급습하여 의병과 총격전을 벌였다. 의병은 상륙하려는 경찰대에 맞서서, 섬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이동하면서 치열하게 항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난지도 동쪽 갯벌 둠바벌에서 36명이 희생되는 등 모두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일제 강점을 저지하기 위한 당진 사람들의 항일 투쟁은 3·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당진 3·1운동의 계기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한 학생과 유생들이 귀향하여 이루어졌다.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은 면천 공립 보통학교 만세 운동이었고, 유생들이 주도하여 전개한 것은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이다. 3월 10일에 발생한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 시위는 충남 지방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학생 시위운동으로 역사적 의미가 컸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 3·10 독립 만세 운동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주동자인 원용은(元容殷)·박창신(朴昌信)은 공주 형무소에 약 4개월간 수감되었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 후 당진 3·1 운동은 4월 2일 면천 주민과 합덕면민·우강면민의 만세 운동, 4월 3일과 4일 순성면 주민들의 횃불 시위운동, 4월 4일 면천 주민 횃불 시위운동과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 4월 4일 밤 당진군 내의 횃불 시위운동, 4월 8일 대호지면 송전리, 정미면 수당리의 횃불 시위로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당진 지역 3·1 운동은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당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호지면은 궁벽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동족 마을이 수없이 형성되었고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도호 의숙을 비롯한 많은 서당을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하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던 대호지 유생들은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하여 대호지로 귀향했고, 이후 도호 의숙 출신 유생들과 운동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모임에는 한운석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 이인정 면장을 중심으로 하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합세하였고 4월 4일, 5일장이 열리고 있던 정미면 천의리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1,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항쟁이었다. 일제의 본격적인 진압은 다음 날 새벽부터 이루어졌고 송봉운이 최초의 순국을 당하였다.

[결과]

대호지·천의 장터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홍성 수비대가 출동하면서 본격화되었고, 대호지 만세 항쟁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형벌을 받은 수형인은 모두 199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현장 순국자는 송봉운 1명이지만, 서산 경찰서로 연행되어 태형 90도 즉결 처분을 받은 인원이 72명, 대전 지방 검찰청 공주 지청에 이송되거나 명단이 드러난 이가 126명이다. 공주 지청에서 태형 90도 16명, 불기소 처분 및 면소 방면 68명, 옥중 순국 3명, 징역 8월 이상 5년까지 선고가 39명이다. 현재 대호지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20명이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한말의 당진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치열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켜 면천성을 공격하기도 하였고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의병 전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당진 소난지도 의병은 당진을 중심으로 내포 지방은 물론 수원과 화성 등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선박을 이용해 일본 수비대와 경찰대의 공격을 무력화(無力化)시켰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전개된 당진 지역 의병 전쟁의 저변에는 당진 사람들의 투철한 항일 의식이 있었고, 이러한 정신이 일제 강점기로 이어져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은 전형적인 궁벽한 농촌에서 발생하였지만, 전 주민이 조직적이고도 공격적으로 봉기하여 독립 의지를 천명한 대규모 항쟁이었다. 이들은 치밀한 준비와 조직을 갖춘 뒤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제2의 만세 운동과 봉화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3명이나 순국하였지만, 항고와 상고를 거듭하는 등 지속적인 옥중 항쟁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대호지 주민들의 치열한 항쟁은 오랜 기간 형성된 동족 마을의 공동체적 정신과 도호 의숙과 같은 전통 서당에서 익힌 충군애국의 유학 사상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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