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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술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53
한자 朴述熙
영어공식명칭 Bak Sulhu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945년연표보기 - 박술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6월 1일 - 박술희 추모 제단 건립
출생지 박술희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거주|이주지 박술희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유배|이배지 박술희 유배지 - 강화도 갑곶
묘소|단소 박술희 묘소 -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51
사당|배향지 박술희 추모 제단 -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51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면천(沔川)
대표 관직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출신의 고려 개국 공신.

[개설]

박술희(朴述熙)[?~945]는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惠宗)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받고 유명(遺命)을 지켰다.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다.

[가계]

박술희박혁거세(朴赫居世)의 25세손이고, 아버지는 대승(大丞) 박득의(朴得宜)다.

[활동 사항]

박술희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당시 혜성군(槥城郡)] 출신으로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었으나, 뒤에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겼다. 박술희는 여러 번 공을 세워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 왕건이 921년(태조 4)에 훗날 장화 왕후(莊和王后)가 된 나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왕무(王武)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나주 오씨 일가의 세력이 미약하여 태자 책봉이 염려되었다. 이때 태조 왕건은 상자에 자황포(柘黃袍)[태자가 입는 옷]를 넣어서 나주 오씨에게 주니 나주 오씨가 다시 그것을 박술희에게 보였다. 박술희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왕에게 태자 책봉을 건의하여 왕무가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박술희는 936년(태조 19) 왕명에 따라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943년(태조 26)에는 태조가 죽음을 앞두고 나라의 지침이 되는 훈요십조를 건네며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박술희는 한결같이 유명(遺命)을 지켰다. 혜종이 병들자 왕규(王規)가 역모를 꾀하였고,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나서서 왕규를 내쫓았다. 그러나 정종(定宗)박술희가 다른 뜻이 있어 군사를 거느렸다고 의심하여, 강화도 갑곶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에 왕규는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박술희를 시해하였다. 후일 박술희의 죽음이 왕규의 모략임이 밝혀졌고, 왕규도 갑곶으로 귀양을 가 죽임을 당하였다.

[묘소]

박술희의 묘는 실전(失傳)되었다.

[상훈과 추모]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이 추증되었고 면천군(沔川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엄의(嚴毅)라 하고, 혜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면천 박씨 후손들은 1980년 6월 1일 기금을 모아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51번지에 박술희를 기리는 추모 제단을 만들었다. 추모 제단에서 매년 4월 대제향(大祭享)을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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