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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72
한자 具人文
영어공식명칭 Gu Inmun
이칭/별칭 장숙(章叔),수옹(睡翁),충장(忠莊)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09년연표보기 - 구인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26년 - 구인문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41년 - 구인문 집현전 교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462년연표보기 - 구인문 사망
출생지 구인문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봉생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능성(綾城)
대표 관직 집현전 교리|증 이조 판서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구인문(具人文)[1409~1462]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으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당진 정미면 봉생리에 귀향하여 은둔하였다. 성삼문의 거사가 실패하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전하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였다.

[가계]

구인문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장숙(章叔), 호는 수옹(睡翁)이다. 아버지는 고려 말 중훈 사재감 판사(中訓司宰監判事)를 지냈고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하며 충절을 지킨 구현좌(具賢佐)이다.

[활동 사항]

구인문은 1426년(세종 8)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41년(세종 23)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단종 2)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1455년에 왕위에 오르자, 구인문은 벼슬을 내려놓고 정미면 봉생리 선영 아래로 낙향해 ‘눈 뜬 봉사’를 자처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봉생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렀다.

한번은 성삼문구인문을 찾아와 거사를 암시하였다. 이에 구인문은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관찰하니 일은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나 우리 임금께 화가 미칠까 염려 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성삼문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구인문은 이를 한탄하여 “인(仁)을 구하다 인(仁)을 얻었으니 어찌 근심하랴.” 하고 두문불출하며 세상을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구인문은 죽은 충신의 시신을 모아 매장해 주었다고도 하고,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단종을 보러 다녔다는 말도 전한다.

구인문단종이 사망하자 깊은 산에 들어가 통곡하며 슬퍼하다가 1462년(세조 7)에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구인문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봉생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구인문은 1791년(정조 15)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충장(忠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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