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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99
한자 姜善弼
영어공식명칭 Gang Seonpi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연표보기 - 강선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1일 - 강선필 신간회 당진 지회 임원 피선
몰년 시기/일시 1976년연표보기 - 강선필 사망
출생지 강선필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강선필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학교|수학지 경성 고등 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묘소 강선필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성격 사회 운동가
성별
본관 진주(晉州)
대표 경력 신간회 당진 지회 의장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사회 운동가.

[개설]

강선필(姜善弼)[1898~1976]은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당진의 청년 운동과 신간회 당진 지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강선필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한국 전쟁 때 당진군 인민 위원장을 지낸 강선국(姜善國)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강선필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경성 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을 맞이하였다. 강선필은 같은 반의 박노영과 박수찬이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동포여 일어나라’라는 문서의 발행을 계획하였으나 자금이 부족함을 알고는 박수찬에게 10원을 내놓아 인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게 하였다. 이 일로 강선필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옥고를 치렀다.

강선필은 1925년 8월 9일, 당진 회관에서 당진 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할 당시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6년 5월 7일, 당진군 합덕면 운산 시장에 있는 동아일보 당진 지국 내에서 개최된 우리 상회[소비조합] 창립 위원회에서는 상무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27년 11월 4일, 신간회 당진 지회 설치 준비회를 당진읍내 천도교 당진 종리원에서 개최할 당시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주재하였다. 신간회 당진 지회는 1927년 12월 6일에 당진 청년 회관에서 창립되었다. 강선필은 임원을 맡아 신간회 당진 지회의 핵심 인물로 줄곧 활동하였고, 1931년 1월 20일 신간회 당진 지회의 해소 과정에도 집행 위원 및 대표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강선필신간회 활동 이후 별 움직임이 없다가, 1937년 5월 10일에 충청남도 평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해방 후에는 우익 쪽에서 활동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강선필은 산림 개발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묘소]

강선필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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