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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39
한자 沈熏
영어공식명칭 Sim Hun
이칭/별칭 심대섭(沈大燮),해풍(海風),백랑(白浪),금강생(金剛生),삼준,삼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자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9월 12일연표보기 - 심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심훈 경성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심훈 3·1 운동에 참가, 경성 감옥에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심훈 중국 항저우 치장 대학 극문학부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심훈 극문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심훈 『동아 일보』 기자로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심훈 한국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 일보』에 연재하기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심훈 일본 유학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심훈 장편 소설 『동방의 애인』, 『불사조』를 『조선 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중단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필경」 등 집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심훈, 안정옥과 재혼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심훈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심훈 소설 『영원의 미소』 탈고, 『조선 중앙 일보』에 연재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심훈 장편 소설 『직녀성』을 『조선 일보』에 연재, 필경사 건축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심훈의 『상록수』, 『동아 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작품 공모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심훈 단편 「황공의 최후」, 『신동아』에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집필
몰년 시기/일시 1936년 9월 16일연표보기 - 심훈 사망
추모 시기/일시 매년 9월~10월 - 심훈 상록 문화제 개최
출생지 심훈 출생지 -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거주|이주지 당진필경사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부곡리 251-12]지도보기
수학|강학지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수학|강학지 치장 대학 - 중국 항저우
묘소|단소 심훈 묘소 -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신봉리 서붕골
묘소|단소 심훈 묘소 -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마전리 산19-7번지
묘소|단소 심훈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부곡리 251-12]지도보기
성격 문인|독립 유공자
성별
본관 청송(靑松)
대표 관직|경력 영화 감독|『동아 일보』 기자|『조선 중앙 일보』 학예부장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에서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인, 독립유공자.

[개설]

심훈(沈熏)[1901~1936]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교동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고등 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되었다가 11월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동아 일보』와 『조선 중앙 일보』 기자로 생활하며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심훈은 1932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이주하여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소설 『상록수』를 비롯한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심훈은 맏조카 심재영의 농촌 계몽 운동을 적극 지원하며 1930년대 전국적으로 일어난 브나로드 운동을 몸소 실천하였다. 소설 『상록수』 출간을 위해 상경하여 한성 도서 주식 회사에서 일하다가 과로로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부속 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사망하였다.

[가계]

심훈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호는 해풍(海風)·백랑(白浪)·금강생(金剛生)·삼준·삼보이다. 아버지 심상정(沈相珽)과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이다. 1917년 3월 왕족 이해승의 누이 이해영(李海暎)과 결혼하였으나 1924년 이혼하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여 아들 심재건, 심재광, 심재호를 두었다.

[활동 사항]

심훈은 경성 고등 보통학교 재학 시 1917년 일본인 수학 교사의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유급되었으며,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3월 5일 투옥되었고, 같은 해 11월 출옥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교류하였다. 1922년 중국 항저우 치장(芝江) 대학 극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3년에 귀국한 이후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 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1925년 영화 「장한몽」 후반부의 이수일 역을 대역하였다. 1026년 한국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 일보』에 연재하였다. 필명 '훈'을 쓰기 시작하였다.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 일보사에서 추방되었다. 1927년 일본 유학을 하였다. 일본 영화 「춘희」에 출연하며 한국인 최초로 일본 영화에 출연하였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1930년 심훈 장편 소설 『동방의 애인』, 『불사조』를 『조선 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중단하였다. 시 「그날이 오면」, 「필경」 등 집필하였다. 안정옥과 재혼하였다. 1932년에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부모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하여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1933년 소설 『영원의 미소』 탈고, 『조선 중앙 일보』에 연재하였다. 『조선 중앙 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하며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영화 제작과 소설, 시 창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1934년 장편 『직녀성』을 『조선 중앙 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 불렀다. 1935년 『동아 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작품 공모에 장편 소설 『상록수』가 당선되어 당선금 500원 중에서 마을 공동 경작회에서 건축하고 있는 야학당[상록 학원] 건축 지원금 100원을 후원했다. 1936년 단편 「황공의 최후」를 『신동아』에 발표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감격하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남겼다.

[학문과 저술]

심훈은 투옥 생활 중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을 시작으로 시나리오 『탈춤』과 『먼동이 틀 때』, 시집 『그날이 오면』을 비롯해 소설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 『직녀성』, 『상록수』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묘소]

1990년대 중반 경기도 용인 지구 개발 관계로 처음 용인군 수지면 신봉리 서붕골에 있던 심훈의 묘를 종손들이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마전리 산19-7번지로 이장하고, 다시 2007년 12월 5일 3남 심재호가 필경사(筆耕舍) 경내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심훈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충청남도 당진시에서는 1977년부터 매년 9월~10월경 심훈을 추모하고 상록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16년 현재까지 40회째 심훈 상록 문화제(沈熏常綠文化祭)를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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