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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의 격전지- 소난지도에서 산화하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38
한자 韓末義兵-激戰地-小蘭芝島-散華-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1905년부터1910년까지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발발하거나 활동한 항일 의병.

[개설]

한말 항일 의병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에 우리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무력 항쟁한 민족 운동을 말한다. 갑오년[1894]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에서 비롯된 항일 의병은 을미년[1895]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의 실시를 계기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의병은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농민과 동학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였다. 이들을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과 단발령의 철회로 대부분 해산되었다. 하지만 의병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1900년대 초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계속하였고,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다시 의병 항쟁 대열에 합류하였다.

일제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켰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시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수많은 의병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또다시 항일 투쟁에 나섰다. 여기에는 을미의병을 주도했던 양반 유생과 농민을 아우르고, 평민 의병장이 가담하여 의병의 투쟁 방법을 더욱 격렬하게 발전시켰다. 을사의병이라 부르는 이들은 병오년[1906]에도 항쟁을 계속했다.

한편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서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 제국의 행정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대한 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함으로써 대한 제국을 무기력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해산 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였고 의병 조직의 전열이 재정비되었다. 의병의 전력은 강화되었으며 의병 항쟁은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 항쟁은 국권이 강탈되었던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충청남도 서북단에 위치한 당진 지역도 한말 항일 의병의 거점이었다. 갑오년 동학 농민 전쟁의 주요 전쟁터였던 당진 지역의 농민 세력은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1900년대 초 활빈당으로 변신하였다. 활빈당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 지역과 경기도 해안을 넘나들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 항쟁 대열에 합류하였다. 최구현(崔九鉉)[1866~1906]과 정주원(鄭周源)[1870~1925], 도중삼(都仲三)[1878~1907] 등으로 대표되는 당진 의병들은 지금의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소난지도(小蘭芝島)를 의병의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일제는 1908년 3월 15일 의병의 주둔지였던 소난지도를 급습하였다. 수백여 의병들은 일본 경찰에 맞서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무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소난지도 동쪽 돌각에서 모두 산화하고 말았다. 지금도 바위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은 당시 의병 항쟁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 당진 지역 항일 의병 발발의 근본적인 배경은 지형의 특색을 통한 자연 지리적 배경, 성씨의 정착으로 인한 집성촌의 형성과 학문의 발전이라는 인문 지리적 배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진 지역은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하며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석문 반도와 대난지도를 경계로 아산만과 남양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화성시가 접해 있다. 또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개펄이 발달되었고,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며 멀리 인천과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은 몇 가지 특성을 가져다주었다.

첫째, 의병들은 바닷물의 흐름을 잘 활용했다. 특히 만조와 간조를 적절히 이용하면 효과적인 군사 작전이 용이하다. 활빈당과 의병들이 당진과 경기도를 넘나들면서 군사 작전을 벌인 것은 조수 간만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둘째, 의병들은 뱃길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의병의 주둔지였던 소난지도에서 조수를 활용하여 뱃길을 통하면 인천까지 쏜살같이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아산시 영인면의 공세곶창에서 수로를 이용하면 인천까지 효과적으로 직진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곳은 조세 운반을 위한 선박길이기도 하였다. 한말에 당진 의병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조세 운송로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때에 따라서는 이 길을 장악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진 지역을 동남쪽과 서북쪽으로 구분할 때, 동남쪽은 질펀한 평야 지대로 형성되었다. 삽교천을 중심으로 당진시는 삽교천의 서쪽에 해당한다. 삽교천의 남쪽은 홍성과 덕산이고, 삽교천의 동쪽은 예산군이며 삽교천의 북쪽은 아산시에 접해 있다. 중요한 것은 삽교천 유역이 매우 광활한 충적 평야 지대로 전라북도 호남평야와 함께 전국 3대 평야 지대에 속할 정도로 비옥하다는 점이다. 또한 경인 지구와 가깝다. 이 때문에 세도가들의 토지 집적지로 많은 관심이 드러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자영농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재경 지주나 그들의 대리인인 마름의 통제를 받았다. 이들은 부당한 고율 소작료와 소작권 박탈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의 정신적 위안처는 자연스럽게 천주교와 동학으로 이어졌다. 특히 동학이 주는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반봉건, 반외세의 배일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갑오년의 동학 농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이곳의 열악한 경제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대로 당진의 서북쪽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완만한 구릉 지형이다. 배산임수의 촌락이 형성되는 데 매우 적절한 구조다. 이 때문에 많은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당진시의 북쪽에 위치한 송악읍에는 현재 19개의 집성촌이 조사되었고, 송산면에는 12개의 집성촌, 당진시의 서북쪽인 석문면에는 21개의 집성촌이 조사되었다. 그 외의 읍면에도 많은 수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성씨들이 각자 ‘종숙(宗塾)’ 개념의 서당을 세워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자 애썼다.

대표적인 서당이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었던 ‘도호 의숙(桃湖義塾)’이었다. 도호의숙은 1860년대에 세워졌는데, 1906년 존재(存齋) 유진하(兪鎭河)[1846~1906]를 초빙하여 강학을 담당케 하였다. 유진하는 화서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도호 의숙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이로써 도호 의숙 유생들은 화서학파에 흡수되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사상은 일제 강점기 당진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당진 지역의 자연 지형과 그 자연에 살고 있는 당진 사람들은 학문과 종교성을 바탕으로 견고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치열한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말 당진 의병의 전개 과정]

1. 전기 의병[1894~1896]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인 갑오변란에서 시작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발발했다.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유생들은 갑오변란을 이미 민족 존망의 위기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무력적인 방법으로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고 시도하였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궐기한 공주 출신 서상철(徐相轍), 평안도 상원의 김원교(金元喬), 충청남도 홍주의 안창식(安昌植) 등이 대표적이다.

유생들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국모의 시해 사건에 맞서 일제와 친일 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단호한 결기로 의병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대표적인 의병장이 충청남도 유성의 문석봉(文錫鳳)이었다. 무과 출신인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봉기하여 공주부의 관군과 와야동 전투를 치렀다. 비록 유성 의병은 패배하였고 의병장은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문석봉 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 다른 의병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전기 의병으로 대표적인 의병 항쟁이 충청남도 홍주 의병과 충청북도 제천 의병이다. 홍주 의병은 1895년 1월 김복한(金福漢)[1860~1924] 등이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봉기하였다. 그러나 봉기한지 불과 하루 만에 홍주부 관찰사인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의병장을 체포하게 됨에 따라 허망하게 끝났다. 이때 김복한 등 6명의 의병장은 서울 경무청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편 제천 의병의 의병장은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다. 유인석은 제천 관아의 뒷산에 본영을 설치하고 반일 투쟁을 지휘하였다. 유인석은 단발을 강요한 단양 군수 권숙과 청풍 군수 서상기를 처형하고 1896년 2월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제천 의병은 충주부를 중심으로 중부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고 말았다. 유인석은 재기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을 갔다.

한말 당진 의병 가운데 전기의병에 활약한 인물이나 장소는 없다. 다만 1906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정산에서 거병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던 홍주 의병에 당진 출신 의병장이 다수 참여했던 사실을 견주어 볼 때, 전기 의병에서도 상호간의 교감은 충분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할 뿐이다. 또한 제천 의병의 경우에도 의병장 유인석은 유진하와 함께 유중교(柳重敎)[1832~1893]의 문하생들이었다. 유중교화서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제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핵심 인물이었다.

유진하는 원래 경기도 고양시 벽제 출신이다. 1899년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에 낙향하였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때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정재학(鄭在學)[1888~1949]이 문하생으로 들어와 성리학을 익히게 되었다. 또한 유진하는 1906년 대호지면 도이리의령 남씨 종숙인 도호 의숙의 훈장으로 초빙되어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로써 화서학파의 학맥이 서산을 거쳐 당진 지역에도 뿌리 내리게 된 것이다. 유인석이 제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유진하도 의병 격문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 유진하는 직접 의병에 가담하지 못하고 노정섭(盧正燮)과 정창용(鄭昌鎔)을 유인석에게 추천하여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정창용은 제천 의병의 소모장으로 임명되어 내포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당진 지역에서는 전기 의병인 을미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홍주 의병의 관련자가 당진 지역에도 많았고, 제천 의병 관련자인 유진하가 당진 지역에서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던 것을 보면, 비록 나중이라도 서로 깊은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중기 의병[1906~1907. 7]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가 예상되자 대한 제국에 대한 보호국화를 결정하였다. 일제는 이를 위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수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이완용·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근택 등 을사오적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6년 대한 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고자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일제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은 모든 한국인을 격분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고종의 고문인 특진관 조병세(趙秉世)는 자결로써 을사늑약 파기를 요구하였다. 또한 당진시 송악읍 오곡리에 거주하던 안종화(安鍾和)[1860~1924]도 을사조약 반대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화와 매국적신(賣國賊臣)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면, 을사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안종화의 개인적인 상소문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의병 항쟁이 재연되었다. 의병들은 무력을 통한 일제의 구축만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적시하였다. 이들을 을사의병이라 하고, 중기 의병이라고 한다.

당진 지역 인사들도 을사조약의 늑결에 대항하여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구현이 있다. 최구현(崔九鉉)[1866~1906]은 면천군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최구현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奉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군부(軍部) 참서관(參書官)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분을 억누를 수 없어 관직을 사임하고, 1906년 송악면 기지시리에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였다. 최구현은 의병을 모집하는 창의문(倡義文)을 게시하였고,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서 370명의 주민들이 격문을 보고 의병이 되었다. 최구현은 이곳에서 창의 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 추대되었고, 의병을 지휘하며 15일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최구현이 이끄는 의병들은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최구현은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했다. 이후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소난지도에는 이미 화성 창의소 홍일초 부대가 있었다. 6월 7일에는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 의병 차상길이 15명을 인솔하여 합류했다.

최구현 의병은 1906년 6월 18일, 면천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때는 소난지도의 의병 세력인 홍일초 부대가 합세했다. 이들은 면천군에 돌입하여 군수 이교영(李喬永)을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여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했다. 또한 최구현 의병은 1906년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성을 공격했다. 이때 군수는 홍주 의병이 면천군의 환곡미 200석을 가져간 것을 채우기 위해 지방에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거듭되는 최구현 의병장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관군과 일본 경찰대는 1906년 8월 24일, 의병의 본거지인 소난지도를 급습했고 최구현을 체포했다. 최구현 의병장은 면천에 끌려와 일본 수비대의 심한 고문을 받고 토지 30결을 탈취당하고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1906년 12월 23일[음력] 자택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당진 지역 인사들은 중기 의병기에 홍주 의병에 참전하여 항쟁하기도 하였다. 홍주 의병은 1906년 3월 14일 청양의 정산에서 봉기하여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나, 5월 30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참모장 채광묵(蔡光黙)을 비롯한 수백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이 서울로 끌려갔으며, 유준근(柳濬根)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이곳에 참여하였던 당진 지역의 대표적 인물이 이만식이다.

이만식(李晩植)은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출신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유격장을 맡아 전투를 지휘했던 의병장이다. 이만식은 홍주성 패배 이후 박창로(朴昌魯), 강재천(姜在天) 등과 함께 정산의 칠갑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이만식은 칠갑산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경기도 일대와 충청남도 당진 지역을 중심으로 피신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만식은 1907년 6월 17일 당진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만식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던 도중에 당진의 인근 도서 지역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항쟁하였다고 하는데, 도서 지역은 석문면 난지도리에 있는 대난지도소난지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난지도의 정황은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7일자에서 「도민난지(島民難支)」라는 기사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06년 2월 당진 군수 장봉환이 내부에 보고를 올리기를 대소난지도가 서해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적이 침탈한 후에 관군이 뒤쫓으면 섬에 머물면서 섬의 평민들에게 침탈을 하니 방책이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결국 홍주 의병이 종료된 후에 의병들은 소난지도로 들어왔고, 기존의 수적과 활빈당 세력과 합세하여 항일전을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당진 주재소와 면천읍성을 공격하면서 지속적으로 항쟁을 벌여 나갔다[충남 당진 군수 장봉환(張鳳煥) 씨가 내부에 보고하되 본부(本郡) 대소난지도(大小蘭芝島)는 처임(處任) 서해상(西海上)하여 수적(水賊)이 양탈선종지후(攘奪旋踵之後)에는 각군교졸여병사등(各軍校卒與士兵等)이 칭이근□(稱以跟□)하고 호일진퇴(互一進退)를 과여마의이연두답지(果如磨蟻而聯頭踏至)하야 空然두留에 침학평민(侵虐平民)하니 가위부배수적(可謂腹背受賊)이라. 애차도민(哀此島民)이 하이□우호(何以□牛乎)있가. 차양도(此兩島)가 장지공허(將至空虛)이온즉 황급지민정이시긍측(遑汲之民情已是矜惻)이옵고 우휼지방책(憂恤之方策)은 도비심력(徒費心力)이오니 언념□우지책(言念□憂之責)에 우절송측(尤切悚仄)이라 하였더라.].”

3. 후기 의병[1907. 8~1910]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뒤이어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 군인들은 서울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서울을 벗어난 이들은 무기를 지닌 채 각지에서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의병 조직의 전열이 재정비되었고 전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의 합류는 의병 전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후기 의병기 당진 지역의 의병 활동은 군대 해산 직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당진시 고대면 출신의 정주원(鄭周源)을 비롯하여 면천 출신의 도중삼(都仲三)·박계문(朴桂文)·김성백(金成伯), 당진 석문면 출신의 정선경(鄭善京)·하군배(河君輩), 당진 남면 출신의 심주현(沈周鉉), 고대면손응현(孫應鉉), 그리고 최종성(崔鍾成)과 최동식(崔東植)·신경춘(申景春) 등이 있다. 이들은 당진과 서산 지역을 활동 무대로 하였으나, 동시에 서해안을 넘나들면서 경기 지역에서도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정주원 의진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진다.

정주원[1870~1925]은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창의한 당진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정주원은 양반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경제적으로는 빈곤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직후, 서용범(徐用凡) 의병에 투신하여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주원은 용인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죽산·수원·안성 등 경기도 일대에서 항전하였으며, 충청도 당진, 서산 등지로 배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은 400~500명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활약하였다. 한때 경기, 충남북 지역의 의병 연합체인 13진도총대장(陣都總大將)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정주원의 부대원으로는 최종성·정선경·하군배·심주현·김성백·최기운·손응현·신준중·손성오 등의 당진 출신과 서산 출신의 이상덕·김쌍봉, 덕산 출신의 조성습 등이 있으며, 경기 출신인 안춘경·신현구·최국만·박덕삼·황명운 등이 있다. 일부 대원들은 정주원이 체포된 후에도 의병을 인솔하고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정주원 의병대는 정주원과 심주현 등이 양반으로 알려지나, 그 외 의병들은 농업에 종사하던 평민 출신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는 어물상이나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이들은 1908년 여름까지 활발한 투쟁을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일본 경찰과 한인 경찰을 사살하고, 침략의 하수인인 일본 상인과 친일파 일진회원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 당진 의병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정주원은 체포되기 전, 5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대호지면 적서리의 대부호인 차숙보(車淑輔)[1859~1945] 집에 숨어 3개월간 살았다. 그리고 부근에 있는 적서리 방구 바위 산기슭에 있던 당재 강당과 구지정(九芝亭)에 활터와 과녁을 만들어 놓고 마을 장정들을 훈련시켰다. 증언 기록에 의하면 1908년 7월 19일 암호 약속을 잘못하여 의병 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들이 일본 경찰에 매수당하면서 정주원이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정주원은 1908년 11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 유형과 징역 3년으로 감형 받았다. 정주원은 복역 후 석방되어 송악면 가학리에 거주하다가 1925년 1월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서 57세로 작고하였다. 묘소는 정주원이 사망한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 있다가, 1940년 초 당진시 송악읍 가학리로 이장되었다. 정중원의 공적은 향토사학자 신양웅·홍석표의 노력으로 각종 사료를 통해 알려져, 1982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다시 정부는 정주원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1984년 11월 19일에는 당진군과 충남도의 지원비를 받아 묘소를 정화하였고, ‘의병장 정주원 숭의비(義兵將 鄭周源 崇義碑)’[홍석표 짓고 채규선 씀]를 묘소 앞에 세웠다.

한편 도중삼의 활약도 활발하였다. 도중삼(都仲三)[1878~1907]은 충남 면천군 승선면 가재동[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에 투신하였다. 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에 전국적인 투쟁으로 번져갔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고, 이어서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행정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무기력한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이와 같은 일제의 침략은 한민족의 항일 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

한편 도중삼의 활약도 활발하였다. 도중삼(都仲三)[1878~1907]은 충청남도 면천군 승선면 가재동[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출신이다. 도중삼은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에 투신하였다.

도중삼은 1907년 10월, 이경칠(李敬七)의 권유로 경기도 수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정현(鄭定鉉) 의병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1907년 10월 의병 55명과 함께 수원에서 배를 타고 송악읍 한진(漢津) 포구에 상륙하여 당진 분파소를 습격하고 당진군 군내면 북창(北倉)에서 수원 안중리로 돌아갔다. 11월에도 다시 송악읍 한진에 상륙하였고 예산군 신례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도중삼당진군 우강면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원포에서 당진과 면천 분파소의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 직후 면천 분파소로 압송할 때, 도중삼은 포승을 끊고 대항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도중삼 의병장에 관한 내용은 『황성신문』 1907년 11월 28일자에 「잡보-도씨 포살(雜報-都氏砲殺)」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홍주경무서경부(洪州警務署警部) 암전(岩田) 씨가 내부(內部)에 보고되 면천 당진 분파소 순사(沔川唐津分派所巡査) 4명이 면천군 가재동거(沔川郡佳才洞居) 의도(義徒) 도중삼(都仲三)을 착득사문(捉得査問) 즉 10월 6일에 중군장(中軍將) 정정현(鄭定鉉) 부하(部下)로 각지방(各地方)에 폭행(暴行)다가 면천사령(沔川使令)에게 피착(被捉)야 사환(四圜)을 납뢰득방(納賂得放)고 정정현(鄭定鉉)의 통문(通文)을 지(持)고 면천 당진(沔川唐津)에셔 해도(該徒)를 모집 중이라  고로 분파소(分派所)로 압교(押交) 제(際)에 해인(該人)이 포승(捕繩)을 교단(咬斷)고 목봉(木棒)으로 항거(抗拒)으로 즉시 포살(砲殺)얏다더라.”

결국 도중삼은 11월 11일에 한진에 상륙하여 활동하였고 11월 16일 면천 분파소 순사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의병은 100여 명의 본진을 이끌고 11월 22일 면천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주재소와 우편 취급소를 불태웠다. 이때 면천 군수 박지양(朴芝陽)이 도주할 정도였다고 하니 의병 활동이 얼마나 극성하였는지 보여 준다. 또한 김한근과 김순근의 집도 불살랐는데, 이것은 도중삼을 밀고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1907년 연말에서 1908년까지 당진 지역에서는 치열한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당진 지역 의병 항쟁은 소난지도 전투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당진 지역 의병은 1908년에 들어서 더욱 힘차게 전개되었다. 3월 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까지 들어와서 박사원(朴士元)을 붙잡아 당진시 우두동에 있는 북창(北倉)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킨 일도 있었다. 이때 의병들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박사원을 일제의 밀정임을 폭로한 것이다. 일제는 마을 곳곳에 밀정을 숨겨 놓고 있었다. 밀정들은 의병의 움직임은 물론 주민의 성향까지 낱낱이 파악하여 일제에 전달하였다. 의병들은 일제와도 투쟁을 계속해야 함은 물론 보이지 않는 밀정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을 겪고 있었다.

홍성 경찰 분서에서는 박사원이 총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경찰대를 편성하여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 하에 당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소난지도가 의병의 본거지임을 확인하고 배를 타고 소난지도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들은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海倉)에서 강구월금(姜九月金)이 소유한 목선을 징발하였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당시 일본 순사의 움직임을 상세히 정리하여 보고한 문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순사대는 3월 15일 오전 6시 당진포리 해창을 출발하여 소난지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들은 소난지도 포구에서 의병 측의 배 2척을 확인하고 사복을 입은 순사로 하여금 정찰을 시켰다. 의병들은 이를 미리 탐지하고 섬의 민가에 숨어서 배를 향해 발포하였고, 일본 측 한인 순사 나춘삼(羅春三)에게 중상을 입혔다. 일본 경찰대는 7시경에 상륙을 강행하여 마을 뒤편의 고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민가에 있는 의병을 향해 총격을 가하자 의병들은 근거지를 옮겨 항쟁하기에 이르렀다.

의병과 일본 경찰과의 교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전투는 일본 경찰에 거의 일방적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소유 총기는 최신 무기로 의병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의 탄환은 일찍 고갈되었고, 피신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결국 의병들은 수십 차례의 접전에도 불구하여 일본 경찰에 밀려 소난지도의 동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돌각(突角) 지점에 이르러 의병 2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오후 1시경 다시 소난지도의 전체를 수색하였다. 그때 소난지도의 북쪽 동굴 속에서 의병의 맹렬한 사격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도 의병 5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의병은 또 다시 맹추격을 당했고, 오전에 크게 피해를 입은 돌각 지점까지 밀려 14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오후 3시경에 이르러 전투를 종료되었다. 그 결과 의병 대장 홍일초(洪一初)[홍원식(洪元植)]와 선봉장 박원석(朴元石)을 비롯하여 총 41명이 전사하였고, 9명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또한 50명 내외의 의병들은 바다에 투신하여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100명 이상의 의병들이 소난지도에 주둔하면서 항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의병 대장이었던 홍일초는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한다. 홍일초는 의병들이 무수히 죽음을 당하자, 총에 맞아 죽느니 여기서 죽는다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절벽 중간 부분에 돌출된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 홍일초는 허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일본군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 후 우무도 해운암에 숨어 있다가 소난지도에 초상이 나자 상주로 가장해 상복을 입고 육지로 탈출하였다. 홍일초교로리 이장인 조도원 집에 나타나 옷을 바꿔 입고 당진 방면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홍일초는 경기도 안성 사람인 홍원식(洪元植)으로 보인다. 그 후 홍원식은 1910년대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고,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일초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안성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4월 15일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부인 김씨와 함께 순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난지도 전투가 발발했을 때, 섬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섬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온종일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화약 연기가 섬을 뒤덮었다고 한다. 어떤 부인은 아기를 업고 피난 간다는 것이 급해서 베개를 업고 갔다가 젖을 주려고 보니 아기가 없었다고 했다. 또한 배를 갖고 다니던 장고항 사람 김영삼은 소난지도에 왔다가 전투가 벌어지니까 배를 버리고 대난지도까지 수영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3월 15일은 아직 날씨가 춥고 바닷물이 차가웠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헤엄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대난지도에서도 소난지도에서 쏜 총격의 유탄으로 장독이 깨지기도 했다.

전투가 끝난 뒤의 소난지도는 처절하였다. 피비린내는 물론이고 소난지도의 바닷물은 의병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또한 의병들의 시신은 바닷물에 떠내려가 물고기 밥이 되었다. 또 일부는 발[살]이나 그물에 걸리고 석문면 교로리 조방골, 대산면 삼길포 등에까지 떠밀려 곳곳에 매장되었다. 소난지도 주민들도 남아 있던 시신들을 모아 격전지였던 돌각에 웅덩이를 파고 매장하였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전개된 소난지도 의병 항쟁은 처참한 결과를 맺으며 종료되었다. 하지만 당진 지역 의병 항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소식은 곧바로 각지의 의병들에게 전해졌다. 전투가 끝난 뒤 4일 후인 3월 19일 저녁 9시경, 수원 지방에서 의병들이 10척이나 되는 배를 타고 당진군 내맹면 고항포(古項浦)[현 석문면 장고항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밀고자를 색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주민 임원보(林元甫)에게 칼을 내리쳐 부상을 입히며, 또 다시 밀고를 할 경우에는 주민 전부를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며 배에 올라 소난지도를 순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들은 홍일초 의병과 연합 작전을 벌이던 경기도 의병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민을 모아놓고 의병이 한 말과 행동들이 고스란히 홍성 경찰 분서장이 경무국장에서 보고한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당진 지역 의병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한 무력적 항쟁을 치열하고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리고 값진 생명을 나라를 위해 흔쾌히 내놓았다. 이렇게 산화한 곳이 바로 소난지도였다.

[역사적 의의]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에 있는 소난지도는 1900년 이후 활빈당의 활동 근거지였다. 또한 1905년 이후 의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소난지도는 의병 항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의병들은 당진 지역과 홍주 의병이 종료된 이후, 소난지도에 머물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특히 소난지도가 전라도의 조세 곡식이 서울로 운송되는 중간 기착지라는 특성도 적절히 활용되었다.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장악함으로써 식량 부족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피신의 거점으로 활용한 인물로는 1906년 당진 지역인 면천읍성을 공격한 후에 소난지도에 잠시 피신했던 최구현 의병장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또한 당진 지역 의병들은 소난지도의 바닷길을 활용해서 경기도 의병과 연합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바닷길은 소난지도에서는 경기도 풍도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인데 많은 조세 곡식을 적재한 조세 운반선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당진 지역 의병들로 하여금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두면서도 인근 지역인 서산과 태안은 물론, 수원과 화성의 경기도 지역 의병들과 연합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의병들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기도를 넘나들면서 신출귀몰한 해상 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러한 의병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정주원과 수원 출신의 홍일초 의병장이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소난지도 의병들은 섬의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다. 이들의 무기류는 보잘 것이 없었다. 불을 지펴 총격을 가하는 화승총에 머물고 있었다. 의병들은 신신 무기로 무장한 10여명에 불과한 일본 경찰에 참패를 당해야만 하였다. 신식 총기류의 조준 사격에 의병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당진 지역 의병들은 소난지도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목숨을 내던지며 항전을 계속했다. 이들은 자신의 단 석자밖에 안 되는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단지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가족과 나라를 빼앗고자 침략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당진 지역 의병들은 그렇게 항쟁하였고, 당진시 석문면 소난지도에서 또 그렇게 산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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