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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39
한자 唐津3·1運動-
영어공식명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Dangj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일어난 3·1 독립 만세 운동.

[개설]

1919년 3·1 운동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침탈당한 주권 회복과 민족 생존권 확보를 위해 항쟁한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또한 3·1 운동은 신분과 직업, 종교의 구별 없이 도시와 농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내재적 역량이 결집된 거족적인 민족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독립 만세의 함성은 우리 국민이 거주하는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확산되었다. 우리 민족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독립의 의지와 열망을 전 세계에 알렸고, 세계 각지의 언론은 우리의 독립 만세 운동을 보도하면서 일제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충청남도 지역 3·1 운동은 3월 3일 예산에서 윤칠영(尹七榮) 등 수 명이 읍내 동쪽 산 위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날 대전에서도 인동 나무 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부여 지방에서는 3월 6일부터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하면서 공주·홍성·서천·논산 등지로 파급되었다. 충남 지역 3·1 운동은 3월 말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4월 상순을 기점으로 점차 약화되었고 4월 20일경 연기의 전의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당진 지역 3·1 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당진군 당진면 읍내리에서 시작되었다. 대체로 3·1 운동이 철로 연변의 대도시에서 산간의 군·읍으로, 혹은 대도시에서 중소 도시와 읍·면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진면 읍내리에서 전개하기로 계획되었던 만세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당진 지역에 본격적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은 같은 날인 3월 10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서였다.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였던 원용하(元容夏)·원용은(元容殷) 형제가 귀향하면서 전개되었다. 하지만 학교 훈도의 만류와 일제 경찰의 억압으로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당진면에서도 3월 16일 만세 운동이 준비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당진 3·1 운동은 4월 들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선 4월 2일 합덕과 우강면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주재소 헌병과 면장의 제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4월 3일에도 면내 2곳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 4월부터 전개된 당진 3·1 운동의 주요 전개 방법은 봉화 시위였다. 봉화 시위는 산 정상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횃불을 들고 만세를 고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봉화 시위는 4월 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순성면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확한 지역은 알 수 없으나 4월 4일 당진군 8개소에서 봉화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으로 보아 봉화 시위는 당진 3·1 운동의 주요한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은 당진 지역 최대의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일제는 대호지 독립 만세 운동을 통하여 드러난 대호지면 주민의 항쟁을 식민통치에 대한 명백한 거부로 간주하였고 군인에 의한 무력 진압을 불사하였다. 이제 당진군의 주민들은 단순히 봉화나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던 온건적 방법에서 벗어나 점차 폭력적 성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제의 무력 진압도 곳곳에서 발생하여 많은 주동자가 체포되었고 사상자도 발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당진 3·1 운동은 3월 10일 전개된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당진면·면천면·대호지면·정미면·합덕면·범천면·순성면·송산면·송악면 등으로 확대되었다. 시기적으로는 4월 13일까지 전개되었다. 3월에는 3차례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으나 3월 10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만 일어났을 뿐, 당진면 읍내리와 당진면에서 계획된 만세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전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거의 매일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당진 지역 3·1 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13일까지 전개되었다. 특히 만세 운동이 한 달여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진 지역이 갖는 지역적 특수성에 연유한 것이었다. 당진은 천도교의 교세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강했던 지역이었고, 한말 의병 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었다. 당진 지역은 1894년 갑오 농민 전쟁 당시, 합덕 전투와 승전곡 전투가 큰 규모로 발발하였던 곳이다. 동학의 항일 투쟁은 1900년대 초기 활빈당 활동으로 계승되었고, 그 맥은 1905년 을사의병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당진 지역은 타 지역과 다른 강력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기반은 당진 3·1 운동의 근본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당진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다양한 성씨의 입향과 집성촌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당진 지역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주민들은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하천 주변에 폭넓게 형성된 논을 경작하면서 자급자족의 농경을 영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진 지역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원격지로 교통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리한 지형 조건은 오히려 집성촌의 발달을 가져왔다. 조선 중기 이래로 많은 인물들이 가문의 안정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당진 지역에 집성촌을 형성시켰다.

각 성씨의 입향조들은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안정적인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문을 권장하였다. 이들은 ‘종숙(宗塾)’ 개념의 서당을 세워 가문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리고 명망 있는 한학자를 초빙하여 강학을 맡겼다. 가장 대표적인 서당이 ‘도호 의숙(桃湖義塾)’이다. 도호 의숙은 1860년대 대호지면 도이리에 세워진 의령 남씨의 종숙이었다. 이들은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의 상무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20여명의 도호 의숙 출신 유생들이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1906년 유진하(兪鎭河)를 초빙하여 성리학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유진하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계승한 화서학파의 정통 인물이었다. 유진하에 의하여 도호 의숙 학생들은 위정척사에 바탕을 둔 항일 정신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당진 지역 3·1 운동의 마지막 배경으로는 근대 학교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당진 지역은 충청남도의 서북단에 위치하여 육로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고, 근대 문물 수용 과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하지만 당진 지역의 북서쪽이 바다에 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간헐적이나마 신문물이 전래되었다. 근대 교육의 수용은 여러 형태의 학교를 곳곳에 설립케 하였다.

학교는 주로 근대화에 개명한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하여 사립의 형태로 세워졌고, 천주교 성당에서도 선교 차원의 학교를 세웠다. 특히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그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교 설립의 주체는 민족주의 운동가들이었다. 대표적인 학교로 면천 공립 보통학교의 근원이 되는 면양 학교(沔陽學校)당진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의 근본이 되는 당성 학교(唐城學校)가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어린이들에게 근대 의식은 물론 민족의식을 교육하는 전당으로 자리 잡았다.

[면천면의 3·1 운동]

1. 배경

당진의 3·1 운동은 3월 10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 시위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운동의 계기는 서울 3·1 운동에 참여한 학생과 유생들이 귀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 시위는 충남 지방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학생 시위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진에는 일찍이 서울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박쾌인강선필이라는 2명의 학생이 있었다. 박쾌인(朴快仁)[1898~1950]은 당시 당진면 읍내리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경성 고보 3년생이었다. 박쾌인은 서울 3·1 운동 당시 학생 활동을 주도했던 장채극(張彩極), 김원벽(金元壁), 김극평(金極平, 栢枰) 등과 교류하면서 3·1 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활동하였고 3·1 운동에도 직접 참가하였다. 아버지가 서울 3·1 운동에서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음을 듣고 3월 4일, 상경하여 자식이 참가하였음을 확인하고 다음 날인 5일에 동행하여 귀향시켰다. 박쾌인의 집이 경찰서와 이웃하였고 경찰서장의 주의와 일경의 감시로 인하여 외부 출입을 금지당하다가 4월 3일에 체포되었다. 그 후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모두 1년 1개월을 복역하였다.

강선필(姜善弼)은 1895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에서 태어났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하여 3학년 재학 시에 3·1 운동을 맞게 되었다. 강선필은 같은 반 박노영(朴老英), 박수찬(朴秀燦)과 함께 한위건(韓偉鍵)이 지은 ‘동포여, 일어나라’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기독 청년회 전도사 유석우(庾錫祐)가 1919년 3월 7일 밤, 김세룡(金世龍)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유인물 800매를 등사하는데 협조하였다. 이때 김세룡, 박수찬은 발행을 맡았다. 그 후 박수찬은 인쇄물 약 250매를 3월 8일 밤 서울 견지동과 인사동 방면에 배포하였다. 강선필은 특히 1919년 3월 7일경 숙소인 서울 간동 122번지 민부훈의 집에서 박수찬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10원을 교부하여 박노영으로 하여금 인쇄물에 필요한 백지를 구입케 하였다. 강선필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전문(電文) 기록에 의하면 3월 10일과 16일 당진면 읍내리에서 만세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미연에 이를 방지하였다고 한다. 이 움직임이 당진에 귀향한 박쾌인으로 인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3월 10일의 면천 공립 보통학교 독립 만세 시위운동은 강선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 전개 과정

면천 공립 보통학교 3·1 운동의 결정적 계기는 면천 공립 보통학교 4학년인 원용은이 형인 원용하와 함께 서울의 고종 황제 인산에 참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귀향한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이종원(李鍾元)과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밀의하였고 이를 전교생에게 공지하였다. 시위 준비에는 강선필도 가담하였다고 전하는데 강선필이 서울 시위 때 사용하였던 「독립의 노래」를 가져다가 등사판에 등사하였다. 독립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대한 독립성

십년(十年)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다.

원용은은 옷감을 구입하여 태극기를 만들었고 현수막과 15척 이상의 장대를 구하여 면천의 동문 밖 솔밭에 은닉해 두었다. 한편 박창신을 통해 인접한 당진 공립 보통학교와 덕산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연결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 동문 밖 저수지를 지나 산골짜기에 전교생 200여 명을 집합시킨 후 원용은은 독립 만세 시위를 선동하였다. 그리고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면천면의 시내로 진입하였다.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반장인 이종원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면천 시내로 행진 중에 덕산 공립 보통학교 훈도인 심상열(沈相烈)이 귀가하는 도중에 광경을 보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시위대가 면천 공립 보통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자 면천 공립 보통학교의 여러 훈도가 뛰어나와 이들을 저지하였다. 결국 경찰 주재소 앞을 지나는 과정에서 일경에 저지당했고 태극기를 압수당하였다. 이어서 뒤쫓아 온 박내윤·이홍로·안인식·이돈하 등의 훈도들의 저지로 해산당하게 되었다.

3. 결과

만세 운동을 전개한 다음 날, 주동자인 원용은과 박창신은 면천 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였다. 그리고 당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공주 형무소로 이감되어 약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원용은은 아버지 원형상(元亨常)이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정3품으로 재직하였기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국권 강탈된 후 아버지의 고향인 순성면 성북리 현재 유동 초등학교 터의 옛집으로 낙향하였다.

원용은의 아버지는 원용은이 11세 되던 해에 사망하였고, 서당에 다니다가 면천 공립 보통학교 훈도들이 학생을 강제 모집하러 성북리에 왔을 때 따라가서 입학하였다. 성북리의 대다수 아이들은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학교라고 입학시키지 않을 때였다. 원용은은 3·1 운동을 주동한 이유로 면천 공립 보통학교의 졸업장과 학적이 말소되었고 후일 공주 사범 학교 합격도 사상 불온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 후 원용은은 보성 전문학교 법과에 합격하였으나 백형의 와병으로 다시 성북리로 낙향하였다. 1925년 사법 서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합덕에서 개업하였다. 6·25 동란기에 성북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48세로 사망하였다.

만세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박창신도 원용은과 함께 면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다. 박창신합덕면 신석리에 거주하였고 1919년 3월 31일, 원용은과 함께 대전 지검 공주 지청에서 검사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박창신은 이후 합덕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당진 청년 동맹 창립 시에는 집행 위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당진기자 동맹 창립 시에 집행 위원, 1929년 신간회 당진 지회 정기 대회 시에 대표 회원에 선임되었다. 박창신은 이후 사회주의 사상가로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반장이었던 이종원(李鍾元)[1901~1987]은 순성면 본리 출생으로 면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 고등학교와 서울 사범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당진 초등학교, 당진 중학교 초대 교장[1946~1951], 서산 여중, 홍성 여중고, 예산 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충남 교육 위원을 거쳐 당진 여고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신평면 운정리 출신으로 특별한 행적은 나타나지 않으나 운정리에서는 제일 큰 부자였다고 전한다.

이상과 같이 면천면 3·1 운동은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4월 2일에 이르러 많은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4월 4일에는 10개 마을 이상의 면민들이 마을 단위로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하는데 일제에 의하여 곧 해산되었고 일경과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순성면, 송악면의 3·1 운동]

1919년 4월에 접어들면서 당진군의 여러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발생한 지역은 합덕면이었다. 4월 2일, 수백 명의 합덕 면민이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였고 주재소 순사와 당시 김철호 면장이 나와서 엄중히 경계하고 제지하여 진압하였다. 범천면[우강면]에서도 4월 2일, 다수의 면민이 모여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6일에도 만세 시위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경에 의해 미연에 제지당하였다. 순성면에서도 만세 운동이 있었다. 4월 3일과 4일에 면내 10개 마을 주민들이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4월 4일 밤에는 당진군내 8개소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송악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4월 5일이었다. 면소재지인 기지시리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주동 인물 4명이 체포되었는데 여자도 1명 포함되었다. 4월 6일과 8일에도 송악면 기지시리에서는 만세 시위 움직임이 있었으나 발각되어 미연에 제지당하였다. 4월 13일에는 송악면 기지시리에서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려던 계획이 탄로 나서 혐의자 8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당진군의 만세 시위운동은 3월 10일에 발생한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 이외에도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발생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면사무소 인근의 만세 시위와 밤에 산봉우리에서 전개된 횃불 시위를 들 수 있다. 발생 지역은 당진면·면천면·합덕면·범천면·순성면·송악면 등이고 정미면대호지면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만세 시위운동이었다.

[대호지면, 정미면의 3·1 운동]

1. 전개 과정

1) 시위운동의 준비

(1) 인산 참례와 항일 의식의 고취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하여 정미면 천의리 장터에서 전개된 대호지·천의 장터 3·1 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의 면장과 면직원, 대호지면의 유림층, 동리 구장 및 전주민이 참여한 조직적이고도 공세적인 만세 시위운동이었다. 일제 경찰에 맞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며 총과 기물을 빼앗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폭력을 수반한 적극적인 시위로서 서산과 당진 지역의 만세 운동 중에서는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특히 만세 운동의 결과 199명이 체포되었고 정부로부터 훈·포장된 인원이 120명에 이르렀음은 이 운동이 얼마나 격렬하였는지를 확인해 주고 있다.

만세 운동의 준비는 세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우선 1919년 3월 고종의 장례일이 발표되면서 지방의 유생들이 인산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들 때, 2월 28일경 대호지 지역 유생들도 상경하게 되었다. 이 때 상경한 인물은 남주원(南柱元)을 중심으로 남상락(南相洛)·남상직(南相直)·남계창(南啓昌) 등이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3·1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목격하고 같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대호지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남상락은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 1통을 얻어 귀향하였다. 남상락은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숨기기 위하여 왜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에서 최신 램프[목이 긴 램프-죽통(竹桶) 램프]를 샀고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의 준비는 천도교 측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천도교가 강한 지역은 대호지면 송전리였다. 이곳에는 당진 천도교 중심 인물인 백남덕(白南德)[1871~1933]이 살고 있었다. 그는 천도교도인인 홍순국·김장안 등과 상의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특히 만세 운동의 장소를 정미면 천의리를 지나 당진읍내로 정하였다. 그러나 남주원을 중심으로 대호지 유림들은 이미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 사실이 송전리에 거주하던 면사무소 직원 민재봉에 의하여 백남덕에게 전해졌다. 결국 백남덕은 천도교 주체의 만세 운동을 포기하고, 송전리 주민들을 동원하여 대호지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만세 운동 당일인 4월 4일, 백남덕은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고 친형인 백남주와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어쨌든 대호지면 송전리에 근거지를 둔 천도교는 대호지 만세 운동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세 번째는 대호지면 도이리에 거주하였던 남상혁(南相赫)에 관한 것이다. 남상혁은 일찍이 홍성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김복한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906년 을사늑약이후 민종식 등과 두 번이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사였고, 3·1 운동 때에는 유림들의 독립 의사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파리 장서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1919년 초 어느 날 김복한이 남상혁을 불러 “너는 고향에 가서 어른들께 의거를 일으키라는 연락을 하고, 그곳에서 일하라.”라고 지시하였다. 남상혁은 그날 밤으로 대호지로 와서 조부 남진희(南軫熙)에게 지산의 뜻을 전하고 곧 사성리의 남병사[남주원] 댁으로 가서 지산의 뜻을 전하였다. 이로써 대호지 지역 유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 독립운동 추진 위원회의 구성과 만세 운동 준비

대호지 유생들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두 차례에 걸친 모의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차로 이춘응(李春應)·남상집(南相集)·이대하(李大夏)·남상돈(南相敦)·민재봉(閔在鳳)·한운석(韓雲錫)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고종의 인산에 참례하였던 유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차 모임에는 김홍균(金烘均)·이인정(李寅正)·홍월성(洪月星)·남창우(南昌祐)·송재만(宋在萬)·김홍진(金烘辰) 등을 추가하였고 거사 단계로 들어가 만세 시위의 일시와 장소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1919년 4월 4일[음력 3월 4일]에 정미면의 천의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과 장소는 5일장이 열리는 천의장을 이용하였다. 당시 대호지면에는 5일장이 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대호지면 소재지인 조금리에서 약 7㎞ 떨어진 정미면 천의리 장에 나가 물품을 팔거나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4일과 9일에 열리는 천의장은 인근의 정미면, 대호지면, 고대면의 주민이 참여한 곳으로 매우 번성한 장이었다. 천의리정미면의 면소재지이면서 대호지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천의리에는 대호만이 깊이 들어와 있고, ‘똑데기 터’라고 불리는 작은 항구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미곡과 화목, 여객을 인천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은 만세 운동 추진 위원회를 거치면서 연락을 담당할 인물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조금리: 송재만(宋在萬) 두산리: 김홍수(金洪壽)

장정리: 최연식(崔連植) 사성리: 백성일(白聖日)

적서리: 김부복(金夫卜) 도이리: 남신희(南信熙)

송전리: 최정천(崔正天) 마중리: 윤남(尹南)

또한 인접한 각 마을에 관한 연락은 거사 전야에 봉화를 올려 알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청년들로 하여금 선봉 행동대를 구성하여 시위 대열의 앞장에 서게 하였다. 선봉 행동대는 송봉운·최연식·심능필·김팔윤·차재덕·송재만·김홍진·김찬용·남태우·고수식·송무용·안상춘·김순철·김형배·김금옥·김길성·남상은·남성우·남윤우·전성진·김장안 등이 맡았고 행동 총책임자는 송재만으로 정했다.

그 후 송재만은 4월 2일부터 3일까지 면사무소 직원인 김동운·강태원 등과 모의하여 도로와 나무를 정리 작업을 한다는 구실로 「도로 수선 병목 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 8통을 제작하여 각 구장에게 교부하였다. 이때의 각 리별 구장으로는 출포리 구장 임용규·송전리 구장 민두훈·도이리 구장 남상현·사성리 구장 박희택·적서리 구장 차영열·두산리 구장대리 김홍록·장정리 구장 정원우·마중리 구장 남상익 등이다. 이들은 공문의 내용을 주민들에게 알렸고 4월 4일 이른 아침에 약정 구역의 도로를 보수하도록 하였다.

송재만은 4월 3일 밤, 한운석(韓雲錫)을 대호지면사무소에 초청한 뒤 주민들이 부를 애국가를 지어 달라고 하였다. 당시 한운석은 도호 의숙의 한문 훈장이며 남주원의 반곡 서당 훈장을 겸하고 있었고 특히 송재만과 함께 조금리 364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운석은 다음과 같은 애국가를 지었다.

〈애국가〉

간교한 일본은 강제로 합방을 주장해 드디어 내 나라를 약탈했다.

우리들은 이렇게 통탄할 지경에 이르니 살아서는 설 곳이 없고

죽어서는 묻힐 땅도 없다.

이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하랴!

각인은 동심일체 힘을 다하여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아

무궁 전세의 내 국가를 독립하자

송재만은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하여 약 400매를 인쇄하였다. 또한 송재만은 자신의 상의를 장만할 예정으로 사 두었던 흰 광목 3척[90㎝×135㎝]을 가지고 면사무소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주민들의 각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따로 제작하였다. 현재 ‘남상락(南相洛) 태극기’로 알려진 태극기가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다.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인데 주민의 가정에서 제작한 태극기이다. 결국 만세 시위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태극기가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만세 시위운동의 전개과정

(1) 대호지면사무소 집결

1919년 4월 4일 아침, 운동을 계획하였던 유생들과 행동 대원, 그리고 도로 수선을 위해 참여한 주민들이 대호지 면사무소 앞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운집한 인원은 약 400여 명에 달하였다. 송재만은 30척 죽간(竹竿)에 자신의 옷감으로 만든 태극기를 달고 김순천에게 주어 높이 매달게 하였다. 그리고 대호지면장 이인정은 민중을 향하여 “여러분을 모이게 하였음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정미면 천의 시장으로 향하라.”라는 취지의 연설을 마친 뒤 이어 남주원에 의하여 독립 선언문이 낭독되었고, 한운석에 의하여 제작된 애국가가 이대하의 선창으로 제창되었다. 이어서 이인정의 선창에 따라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 송재만의 선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문이 제창되었다.

〈선서문〉

①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몸 바쳐 싸우자.

② 우리는 끝까지 행동을 통일하고 생사를 같이한다.

③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천의 시장으로 향함에 있어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편대, 2편대, 3편대로 편대를 나누어 편대장을 임명하였다. 태극기를 세우고 이인정 면장은 말을 타고 선두에 선 가운데 천의 시장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도로 연변에는 대호지면 주민들이 도로 정비를 위해 나와 있었다. 송재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쇄한 애국가 약 400여장을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출발한 행렬은 대호지면 장정리정미면 승산리를 거쳐 천의리에 이르게 되었다. 약 7㎞에 달하는 정미면 천의 시장까지 가는 사이에 주민의 수는 900여 명이 넘었다. 이 행렬이 천의 시장에 이르러 태극기를 시장 광장에 세우자 시장에 모여 있던 장꾼, 인근 주민들, 여타 군중이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군중은 곧 1,000명을 넘게 되었다.

(2) 천의 시장 만세 시위

천의에 도착한 군중은 일시 흥분을 진정시킨 후 남주원을 중심으로 몇 명의 연설을 들은 후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천의 주재소에는 우에하라[上原]라는 순사, 순사보 이재영(李在榮)·유익우(柳翼祐) 등이 있었으며 거주 일본인으로는 다지리[田尻]가 있었다. 시가행진 도중 우에하라 순사·이 순사보 등이 나타나 시위를 제지하고자 할 때 군중은 이들을 잡아 대열에 참여시켜 만세를 부르도록 종용하였다. 결국 이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도망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당진 경찰서에 보고를 하여 구원을 청하였는데 당진 경찰서에서는 무장 경관 2명을 천의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만세 시위는 오후 4시경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군중들은 사성리의 남주원과 송전리의 홍순국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었다. 군중들의 일부는 식사를 하고 또 일부는 염건피장[화렴 만드는 곳]에 모여 앉아 의논을 하는데 당진에서 출동한 순사들이 나타났다. 즉, 니노미야[二宮]·다카시마[高島] 등 두 순사가 와서 대형 태극기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과 일제 순사와의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고 남태우·김팔윤 등 군중들은 당진 순사들을 논 가운데로 밀어 넣어 버렸다. 이때 두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였고 시위대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총소리의 울림과 부상자의 발생은 군중을 크게 분노케 만들었다. 주민들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투석전은 전쟁을 방불하였으며, 일제 순사들을 잡아 구타하고 환도를 빼앗기도 하였다. 결국 주재소가 파괴되고 천의 순사 및 당진에서 온 순사도 구 시장 쪽으로 도망하고 그 뒤를 수십 명의 군중이 쫓아가는 등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다음의 전문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산군 천의에 래습한 폭민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 1이 중상, 순사보 2가 행방불명, 일본인 1이 경상을 받다.”

“4월 4일 충남 서산군 천의 주재소에 800의 폭민이 내습하다. 순사 1, 순사보 1이 중상하고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인 1이 경상하다. 서산서와 당진서에서 경관 8, 홍성 수비대에서 병 5가 부원(赴援)하여 21명을 체포하고 해산시키다.”

“……서산군 천의, 천의 경찰관 주재소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순사보 2명 중 1명은 무사한 것으로 판명되나 다른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응원대의 활동에 의해 주모자 이하 21명을 체포하였으나 오히려 불온한 징조가 있기 때문에 재류하는 일본인 14명이 서산으로 철수하고 또 동주재소는 인원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시 폐쇄되었다.”

이때 일본인 다지리는 순사가 매를 맞고 주재소가 파괴되는 것을 말리려다가 군중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군중들에게 쫓겨 집에까지 왔으나 송재만과 이대하가 다지리의 집을 부수고 들어가 집을 파괴하고 엽총 1정과 권총 1정, 그리고 탄약 약간을 탈취하였다. 그 후 엽총은 이대하가 휴대하고 우에하라 순사의 환도는 김동운이 갖고 권총은 송재만이 휴대하고 일단 철수하였다.

4월 4일이 저물고 있었다. 왜경들은 도망치고 주재소는 완전 파괴되었으며 다지리의 무기도 탈취되었다. 시위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다음의 거사 연락이 있을 때까지 일단 귀가하기로 하였다. 탈취한 무기는 다음을 위해 사성리 이대하의 집에 모았고 송재만은 이를 대호지의 가장 오지라고 하는 적서리의 한적한 숲속에 숨겨 두었다. 송재만은 이어서 사성리에 돌아와 남주원과 만나고 이어서 다시 남세원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송전리로 갔다.

4월 4일 밤, 거사의 주동자들은 송전리의 민재봉의 집에 모여 재차 거사를 논의하였다. 이후 몇 번의 모의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당진 천도교의 중심 인물이며 이 지역의 책임자인 백남덕, 그리고 백남주 형제가 친상 때문에 4·4 독립 만세 운동에 가담하지 못한 점을 의식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홍성수비대의 출동과 이들의 검거 작업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3) 일제의 검거와 만행

일제는 3·1 운동을 한국인의 민족 운동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부터 강력한 무력적 진압을 하는 동시에 총독의 유고와 각종 회의를 통하여 훈시, 경고 및 경령(警令) 등을 통하여 회유를 시도하였다. 3·1 운동이 지방으로 점차 퍼져 나가면서 일제의 무력 진압도 더욱 확산되었다. 홍성에 주둔하였던 홍성 수비대 보병 5명, 서산과 당진 경찰서 경관 8명으로 구성된 일제 군경이 천의로 출동한 것은 4월 4일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산군 정미면 여미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운산교가 무너져 있어서 차량 통행이 어렵게 되자 당시 구장[이장]인 이연종에게 주민을 이끌고 보수를 명하게 되었다. 이때 정미면 대운산리 이연종 구장은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서두는 수비대를 보고 작업 지연술을 폈다고 한다. 결국 교량 복구가 늦어져 이들이 천의를 거쳐 대호지에 도착한 것은 4월 5일 새벽이었다.

수비대가 대호지면사무소가 있던 조금리에 도착하였을 때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대호지면사무소 앞 광장을 거닐던 송봉운(宋逢云)과 처음 마주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송봉운은 일제 헌병들에게 폭행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송봉운을 서산으로 연행한다며 앞세워 가더니 면사무소 앞 200여m 거리의 논두렁을 가던 송봉운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였고 처음으로 순국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수비대는 사성리의 남주원 집에서 근거지를 확보하고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수비대와 경찰의 무력적 탄압은 실로 무자비한 것이었는데 당시 천의 시장에서의 실상을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의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는 10살이었다. 내 집은 천의에 있었고 나는 현재 천의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훈장님께서 난리가 났다고 평소보다 늦게 집에 가라고 하셨다. 그날은 어둑어둑해지면서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서당에 가는 길에 언덕 위에서 천의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일본 경찰과 많은 주민들, 그리고 경찰을 싣고 온 차였다. 차는 요즘의 봉고차와 같이 생겼는데 아주 작은 편이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묶어서 시장 바닥에 늘여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엎어놓고 마구 팼다. 얼마나 팼는지 걷는 사람이 없었다. 매를 맞은 사람들은 기어서 화장실로 갔다. 천의 시장 외곽에는 요즘의 간이 화장실과 같이 짚으로 대충 엮어 지붕을 한 화장실이 몇 개 있었다. 매를 맞은 주민들은 화장실로 기어가서 변소 오물을 퍼먹었다. 장독에 걸리지 않으려고 그랬다.”

수비대들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만세 운동 주동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에 대호지면민 중 상당수는 고향을 떠나기도 하고 머슴이 되거나 변신하여 숨어살기도 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피하였다.

2) 일제의 탄압과 옥중 투쟁

(1) 서산 경찰서의 태형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이 끝나자 일제는 탄압을 위한 체포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호지의 주민들은 시위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즉 4월 8일 오후 6시,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20여명이 경계 중인 경찰관을 폭행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같은 날 오후 7시 조금리에서도 약 70여 명의 주민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송전리의 재봉기는 일제 경관 6명, 보병 2명의 출동으로 사망자 1명, 부상자 1명이 발생하였다. 또한 4월 8일 같은 날 밤에는 정미면 수당리에서 정원환(鄭元煥)의 지휘 하에 300여 명이 봉화산에 올라가 봉화 시위를 하였다. 이곳에도 일제는 경찰 4명, 보병 2명이 출동하여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주모자 색출은 더욱 혈안이 되어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었고 서산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서산 경찰서에서는 경미한 참여자에 대하여 즉결 처분으로 태형 90도를 집행하였고 72명을 석방하였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① 1919년 4월 22일 집행자(10명): 강정신·공일손·김봉국·김부식·성기한·신태빈·유일현·이기안·이현춘·임억규

② 1919년 4월 23일 집행자(16명): 김범준·김봉욱·김성연·김순식·김예원·김유봉·김인식·김천겸·김형태·김홍우·백성일·이상영·조정식·조회식·최생용·최연식

③ 1919년 4월 24일 집행자(28명): 고병하·김금산·김길동·김달용·김동운·김봉쇠·김정식·남성희·남영렬·남윤희·문만동·박성운·송일현·송준기·송춘성·심능필·유인기·이대성·이보국·이보동·이성하·이영학·정환철·조종학·최학수·한봉교·한춘산·호억준

④ 1919년 4월 25일 집행자(14명): 김동근·김일용·김장성·김장식·김재곤·김홍수·김홍태·김황용·박봉화·박성옥·박창옥·박희천·손병윤·한만봉

⑤ 1919년 4월 26일 집행자(4명): 송광운·장경환·장인환·전중환 등이다.

위 명단을 살펴보면 우선 태형 90도로 즉결처분한 시일이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에 걸쳐 분산되어 있다. 이들의 체포된 시기는 대부분 만세 운동 직후였다. 따라서 왜경에 체포된 후 상당기간 서산 경찰서에 구금되어 갖은 고문을 받다가 4월 말에 이르러서 집중적으로 태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모자급 인물들은 검거 직후 대부분 공주 지청으로 이송되었다.

(2) 공주 지방 법원 회부

공주 지청에 이송된 주모자급 인물은 56명에 달한다. 이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한 1919년 6월 17일경 검사에 기소되어 1919년 9월 8일 예심이 종결,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경 공판에 송치되었으며 10월 24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형량을 받게 되었다. 공주 지방 법원에서의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① 징역 5년(3명): 송재만·고수식·한운석

② 징역 4년·벌금 30원(1명): 이대하

③ 징역 4년(2명): 남태우·송무용

④ 징역 1년 6월(1명): 이인정

⑤ 징역 1년(29명): 고울봉·권재경·권주상·김금옥·김길성·김부복·김양칠·김장안·김찬용·김형배·김팔윤·남기원·남상돈·남상락·남상은·남상직·남상집·남용우·남윤희·남주원·송봉숙·신태희·안상춘·원순봉·이완하·이춘응·전성진·최정천·홍월성

⑥ 태형 90도(10명): 강춘삼·고한규·김홍진·남계창·남신희·남인우·문영산·윤남·이규순·이상익·차세순·천학선·최봉준

⑦ 태형 60도와 30도(6명): 강춘삼·남계창·문영산·민재학·박희용·유동렬

⑧ 징역 1년(1명): 남주원

⑨ 징역 8월(1명): 남성우

⑩ 징역 1년 6월(1명): 민재봉

⑪ 징역 1년·집행 유예 3년(1명): 김순천 등이다.

위 명단에 의하면 10월 24일의 공판에서 태형 90도를 맞은 인원이 16명이고 다른 수형인들은 모두 징역 8월 이상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3) 경성 복심 법원에 항소

이들은 공주 지방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였다. 그리고 남주원[징역 1년]과 남기원[징역 1년]을 제외한 34명에 달하는 수형인은 즉각 경성의 복심 법원에 항소를 냈다. 항소심 공판은 1919년 12월 24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열렸는데 이곳에서 선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징역 5년(1명): 송재만

② 징역 1년(10명): 고위봉·권주상·고수식·김장안·김팔윤·남태우·송무용·이인정·전성진·한운석

③ 징역 8월(7명): 남상돈·남상락·남상은·남상집·남윤희·이대하·홍월성

④ 항소 기각(16명): 권재경·김금옥·김길성·김부복·김양칠·김찬용·김형배·남용우·남상직·송봉숙·신태희·안상춘·원순봉·이완하·이춘응·최정천 등이다.

또한 이인정·한운석·김양칠·송재만 등 4명은 다시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는데 1920년 2월 7일 기각됨으로써 징역 5년과 1년의 형량이 확정되었다.

1919년 4월 4일에 발생한 대호지 만세 항쟁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형벌을 받은 수형인은 모두 199명에 이르고 있다. 현장 순국자는 1명이고 서산 경찰서로 연행되어 태형 90도를 즉결 처분당한 인원이 72명, 대전 지방 검찰청 공주 지청에 이송되거나 명단이 드러난 분이 126명이다. 공주 지청에서 다시 태형 90도를 받은 분이 16명, 불기소 처분 및 면소 방면된 분이 68명, 옥중 순국한 분이 3명, 징역 8월 이상 5년형을 받은 분이 모두 39명이다.

[역사적 의의]

당진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0일에 발생한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 시위에서 비롯되어 4월 2일에는 면천면 주민들의 만세 시위행진, 합덕면민의 만세 시위행진이 있었다. 4월 3일과 4일에는 순성면의 10개 마을 주민들이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고, 4일에는 당진 군내 8개소에서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4일에는 대호지면에서 봉기하여 정미면 천의리 시장에서 시위를 전개한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하였다. 이와 같이 당진의 3·1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당한 사건을 합하여 모두 3월 10일부터 4월 13일까지 발생하였던 것이다. 시기상으로는 다른 지방 3·1 운동의 전개 시기와 비교할 때 중심 시기에 해당한다. 당진 지역 3·1 운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3·10 면천 공립 보통학교 독립 만세 운동은 매우 치밀한 준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독립의 노래’를 제작하였고, 이를 등사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였고 학생들을 비밀리에 집결시킨 후에 면천 시내로 들어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비록 학교 훈도의 간곡한 만류로 독립 만세 운동은 종료되었지만, 훈도의 만류가 없이 곧바로 일본 경찰과 맞섰다면 엄청난 인적 피해가 날 가능성이 컸다. 또한 3·10 면천 공립 보통학교 독립 만세 운동은 충남 지방 학생 만세 운동 중에서 처음으로 전개된 것으로 매우 뜻 깊다. 아울러 인근 공립 보통학교인 당진 공립 보통학교와 덕산 공립 보통학교와 연대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조직적이고 탈지역적인 학생 만세 시위운동이었다.

둘째, 주민들의 주요 항쟁 방법은 봉화 시위였다는 점이다. 당시 당진 지역은 10개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봉화 시위를 전개하였다. 야간에 마을의 대표적인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 당진군 8개소에서 봉화 시위를 동시에 전개하였음은, 주민들끼리 사전 연락이 이루어졌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국가의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봉화를 올리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 만세 운동에도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봉화 시위는 충청도 독립 만세 시위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셋째, 대호지·천의 장터 4·4독립 만세 운동은 유림과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이 통합하여 전개한 운동이었다. 물론 주민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형사 사건부』에 보면 참여인들의 직업을 대부분 농민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호지 4·4 독립 만세 운동은 농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은 대호지 유림과 대호지면 사무소 직원들이 주도한 것이다. 특히 면장과 4명의 면직원이 만세 운동을 조직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면장이 앞장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는 점은 4·4독립 만세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충남 지역의 3·1 운동을 살펴봐도 면장이 시위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대호지 4·4 독립 만세 운동은 매우 조직적으로 준비하였고 만세 운동을 치밀하게 진행시켰다는 점이다. 충남의 3·1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인 형태는 단순히 독립 만세만을 부르는 경우이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거나 연설과 같은 의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호지 4·4 독립 만세 운동과 같이 독자적으로 애국가를 제작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대호지 4·4 독립 만세 운동의 지도자들은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애국가를 지었으며, 선서문을 만들어 제창하였다. 또한 공문서를 제작해 주민을 동원하였다. 이와 같이 치밀하게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당진의 3·1 운동은 전형적인 궁벽한 농촌에서 발생하였지만 전 주민이 조직적이고도 공격적으로 궐기하여 일제 식민 통치의 무모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고, 독립의 의지를 천명한 대규모 항쟁이었다. 이들은 치밀한 준비와 조직을 갖춘 뒤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 경우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제2의 만세 운동과 봉화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3명이나 순국하였지만, 항고와 상고를 거듭하는 등 지속적인 옥중 항쟁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당진 주민들의 치열한 항쟁은 오랜 기간 형성된 동족 마을의 공동체적 정신과 도호 의숙과 같은 전통 서당에서 익힌 충군애국의 유학 사상, 그리고 천도교의 척왜론에 바탕을 둔 항일 구국 이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라 하겠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