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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문화의 중심-당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41
한자 內浦文化-中心-唐津
영어공식명칭 Dangjin Centred on Naepo Cultur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의 삽교천 이서 내포 지역에 발달한 문화의 중심 도시.

[개설]

당진 지역은 아산만삽교천을 중심으로 내포 지방의 문화 통로 역할을 하던 중심 지역으로서,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오랫동안 타지와의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융복합하여 독특한 내포 문화를 형성하였다.

[충효 문화의 중심, 당진]

당진은 예부터 충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곳을 가나 생생한 충효의 역사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장으로 그들이 태어나거나 사후 묻힌 묘소가 아직까지 지역 곳곳에 스며 있다. 당진 지역은 수많은 열녀, 충신들의 비석과 묘소가 산재하고 있는 충효 문화(忠孝文化)의 중심지이다. 충효는 군왕을 성심으로 받들고 부모를 지성으로 모시는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둔 덕목이다. 충(忠)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군주나 국가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고 시종 그 절조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봉건적 군신 관계의 근본 윤리로 발전하였다. 『논어(論語)』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며, 신(信)과 서(恕)와 함께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충성은 정치적 개념보다는 도덕적 개념으로 대의를 위한 자발적, 실천적 헌신이라 말할 수 있다.

당진 지역의 충효 인물은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을 비롯하여 정유재란 때 청나라 군사를 막다가 안주에서 전사한 남이흥 장군[대호지면 도이리], 고려 개국 공신 박술희 장군[면천 출신],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양원[대호지면 조금리], 인조 이괄의 난 때 공신 김기종[정미면 신시리], 고려 말 풍운의 공신 인당 장군[면천면 죽동리], 조선 세종 때의 무장 구문신구문노 장군 형제, 임진왜란 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남이흥 장군의 아버지 남유 장군[대호지면 도이리], 조선 초 문신으로 단종 폐위라는 불의를 보고 눈 뜬 장님으로 행세하며 살아간 구인문[정미면 봉생리],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김교[합덕읍 석우리], 고려 말의 공신 지용기[합덕읍 석우리], 의병 대장 정주원[송악읍 가학리]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남유남이흥양세 충신 정려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다.

효(孝)는 어버이를 봉양하고 섬기는 덕목의 하나이며 『효경(孝經)』에서는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다. 이것을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은 공자이며, 당시의 중국에서는 사회라는 개념은 희박하고 가족관계가 중시되었다. 천재(天災)와 난세의 폭정(暴政)으로부터 자신들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족 내의 단결을 굳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계(家系)의 연속이 중요시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 하에서는, 넓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좁게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가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당진은 이런 효행의 표본실이라고 할 정도로 도처에 효행 열녀 비석이 많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구서, 구이원 효자문[송악읍 가교리], 효녀 경주 김씨 정려[합덕읍 성동리], 효부 김해 김씨 효부문[송산면 무수리], 선산 김씨 효부문[당진읍 사기소리], 김재기 효자문[순성면 갈산리], 김정옥 효자문[송악읍 청금리], 교하 노씨 효열문[송악면 가학리], 어머니 병환에 효행한 문충식 효자문[합덕읍 성동리], 밀양 박씨 열녀문[송산면 당산리], 박순명 효자문[송산면 삼월리], 박효건 효자문[면천면 원동리] 등이 있다. 특히 부모에게 효성 지극한 박희란 효자문[면천면 성상리]은 1720년(숙종 46)에 세웠는데 다른 정려와 달리 돌로 건립된 것이 특징이다. 박희란의 아우 박희전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721년에 정자를 세웠다.

[포구와 나루 문화의 중심, 당진]

당진은 삽교천, 역천 수로 주변의 포구를 매개로 하여 한양 경창을 드나들던 조운선에 의해 아산만 물길을 타고 들어온 포구 문화(浦口文化)의 중심지이다. 고대에는 육상 교통로보다는 수상 교통로가 발달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하천과 구릉이 많아서 지형이 험준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파발을 중심으로 한 통신로를 개설하고 화물의 운송은 주로 수로(水路)를 이용하였다. 내포 지역은 삽교천역천이 모두 감조 하천(感潮河川)으로 직접 최하류가 아산만과 통하기에 일찍부터 뱃길이 내륙 깊숙이까지 뻗어 수운로(水運路)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전 근대적인 시대는 수계(水係)는 길을 이어 주고 산계(山係)는 길을 끊어 놓았다. 포구는 내포 문화권의 육로와 수로를 이어 주는 스위칭 허브(switching hub)로서의 핵심 공간이다. 내포의 교통로는 곳곳에 발달한 포구를 이용한 수로가 중심이었는데, ‘당진’이라는 지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일찍부터 대중 교류 창고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고대 문화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지역이다. 당진 지방은 삽교천 방조제, 석문 방조제 공사로 현재 포구의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산만삽교천 연변에 위치한 당진, 면천, 아산, 예산, 덕산 등 내포 지방은 수로 교통의 요지로 일찍부터 물산이 집산하던 곳으로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세미의 집산지로 포구가 발달되었다. 내포 지방은 거대한 농경지를 배후에 가지고 있고, 아산만이 육지 쪽으로 쑥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산만에 연결되는 삽교천내포평야 한가운데를 깊숙이 흐르고 있어 수상 교통이 아주 편리하였다.

이중환은 일찍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사람이 살 터를 잡는 데에 지세(地勢), 교역(交易), 인심(人心), 산수(山水)가 좋아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지세에 있어서는 먼저 물길을 본 후에 들판의 형세, 산악의 모양 등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삽교천 주변은 실제로 예부터 어염시수(魚鹽柴水)가 풍부하고, 포구가 발달되어 수운 교통이 편리하여 한양과의 교류가 빈번하였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전국의 장시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록하고 있는데, 이 시기 내포에는 약 43개의 장시가 있는데 주로 당진, 예산, 홍성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내포 지역에서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삽교천, 무한천 하천 수로의 포구를 중심으로 곡물, 어염시수의 교류가 활발하여 장시(場市)가 집중적으로 발달되었다. 이 당시 당진 지방에도 읍내장(邑內場)[면천-현 면천면 성상리에 있던 장], 옥장(玉場)[면천-순성장], 남창장(南倉場)[면천-현 우강면 창리에 있던 장], 기지장(機池場)[면천-현 송악읍 기지시리에 있던 장], 읍내장(邑內場)[당진-당진읍 읍내리에 있던 장], 삼거리장(三巨里場)[당진-고대면 삼거리에 있던 장], 거산장(巨山場)[홍주-신평면 거산리에 있던 장], 예전장(芮田場)[홍주 현내면-현 신평면 상오리 예전에 있던 장] 등이 있었다. 『임원경제지』에는 범근천장(泛斤川場)[면천-우강면 범근시리에 있던 버그내장이, 후에 합덕읍 운산리로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어 합덕장으로 개편됨. 그런 이유로 합덕장을 현재 합덕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버그내장이라고 부름]이 새로 등장한다.

삽교천 주변은 당진 최대의 충적 평야지가 넓게 전개되고 있으며, 삽교천은 내포 지방의 젖줄로 넓은 농경지를 주변에 배태하고 있어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수운 교통이 편리하고 소금, 해산물, 곡물이 풍부하여 한양의 경창과 교류가 빈번하였다. 따라서 삽교천 연변에는 고려 시대 이래 수많은 포구들이 생성되어 일제 강점기까지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조선 후기에 삽교천 주변에 상당히 많은 포구와 나루가 발달되어 있어 수운 교통이 편리했음을 알 수 있다. 여말 선초에 해로를 통한 조운이 왜구의 빈번한 출몰이나 험한 조류에 의해서 선박의 침몰 사고가 잦자 최대한 육로를 통하여 정해진 포구까지 수송하고, 그곳에서 수로(水路)[삽교천]-해로(海路)[서해]-수로(水路)[한강]를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게 되었다. 내포 지방의 곡창에서 생산된 곡물은 삽교천 연안에 설치된 조창이 있는 포구를 통하여 수납되고 서울로 운송되었기에, 각 포구에는 선박의 왕래가 많고 물자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삽교천에는 고려 시대에 이미 60포(浦)에 해당되는 신평의 회해포(懷海浦)와 합덕[우강]의 풍해포(豊海浦) 및 예산의 장포가 있어서 중요한 조운 수로 역할을 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범근내포-공세포로 이어지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조운이란 한마디로 현물을 받아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으로 왕도인 한양까지 운반하는 제도로 조전, 해조 등으로 불린다. 이때 해안가에 있어 해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 하천변에 있는 강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이라 한다. 삽교천 연변은 예부터 주변에 곡창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고 수상, 해상 교통이 편리하여 세곡의 운송을 위한 조운의 출발지로서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부터 포구가 발달해 있었다. 강변에는 수운창(水運倉)을, 해변에는 해창(海倉)을 두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보면 삽교천 변에 월경지(越境地) 분포가 그려져 있는데 예외 없이 조창(漕倉) 표시가 되어 있다. 즉, 홍주지에 속하는 신평과 합덕, 면천지에 속하는 범천, 덕산지에 속하는 비방곶, 천안지에 속하는 신종, 덕흥, 돈의, 수원지에 속하는 걸매 등 5개 주읍의 비월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밖에 아산만에는 양성지에 속하는 괴대곶, 직산지에 속하는 외야곶 등 2개 주읍의 비월지가, 안성천 변에는 직산지에 속하는 경양이 분포되어 있다. 천안지가 한 번 더 있는 모산까지 합하면 무려 9개의 비월지가 조창 표시와 함께 집중적으로 아산만삽교천에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당시 조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경지의 발생 당초에는 속 군현의 분리 독립이나 임내의 이속에서 연유했지만, 조선 초기 군현제 정비 후에도 계속 존속한 것은 조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조운 기능이 쇠퇴하면서 자연히 물산의 교역을 위한 포구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운이 활발할 때는 선박들의 활동 범위가 서울 용산 마포의 경창까지 넓었으나, 조운 기능이 없어지면서 인근 해역이나 주변 포구로 바뀌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인천항까지 뻗어 나갔다. 일제 말부터 해방 이후 인천항을 거점으로 당진 지방의 각 포구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취항하여 주로 미곡을 반출하는 포구로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인천항과 연결되던 당진의 주요 포구는 난지도, 오도, 보덕포, 운정포, 장고항, 한진, 맷돌포, 남원포, 부리포, 구양도 등이 있다. 포구가 삽교천 변에 이와 같이 많다는 것은 수운 교통량의 증가, 물자 유통의 확대, 인걸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당시 내포 지역이 생기 넘치는 땅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행정 중심지인 면천은 육지 속에 있지만 삽교천 지류인 남원천이 깊숙이 면천읍성 주변까지 들어와서 삽교천을 거쳐서 아산만으로 쉽게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이점이 있었다.

바다가 육지로 깊게 내만하고, 삽교천의 입구가 마치 호수[포]처럼 나팔상으로 되어 있는 당진 지역의 자연 지리적 조건은 독특한 역사적 문화를 잉태했던 것이다.

당진의 해안가나 삽교천 연변에는 ‘창(倉)’ 계통의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이런 ‘창’이 설치되어 있던 곳에는 예외 없이 촌락 지명에 ‘창(倉)’ 자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순성면 중방리 북창(北倉), 우강면 창리(倉里), 합덕읍 합덕리 창촌(倉村), 송산면 당산리 송리북창(松里北倉),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海倉), 신평면 초대리 소창(小倉), 석문면 삼화리 외창(外倉), 우강면 내경리 둔창(屯倉) 등이 많다. ‘창(倉)’은 옛날에 세금이나 진상품을 받아들일 때 곡물과 같은 현물세를 일시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를 말한다. 이 창고에 보관된 현물 세곡을 선박을 통하여 한양으로 옮기는 제도를 조운이라 하고, 이런 창고를 특히 조창이라 한다. 옛날에는 육상 교통의 발달이 미약하고 도로가 거의 없어서 강이나 바다를 이용해서 이런 세곡을 실어 날랐다.

[수리 농경 문화의 중심, 당진]

삽교천, 남원천, 역천 하천 수계를 관개용수로 이용한 우강, 합덕, 신평 등 내륙 곡창 지대의 수리(水利)를 바탕으로 한 농경 문화의 중심지가 당진이다.

삽교천 주변은 인간이 거주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아산만 삽교천 주변은 해로와 수로가 네트워크화되어 기본적으로 수운 교통이 편리하지만, 예부터 평택평야, 예당평야, 채운 평야 등 넓은 들판이 있어서 전라도 지방 못지않은 곡창 지대이다. 또 해안은 드나듦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어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하며,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넓은 간석지가 많아 소금 생산이 많다. 따라서 중앙의 관리들이 수도에 가까운 어염시수가 풍부하고 대곡창 지대인 내포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당진 지역은 홍성의 오서산 남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정자 저수지를 거쳐 북류하는 삽교천 주변에 당진 최대 충적 평야인 예당평야 일부인 소들강문 평야[우강, 합덕 평야]가, 면천의 몽산에서 발원하여 순성면신평면의 경계를 흐르는 남원천변 하류에 상오 평야가, 서산 가야산 산록에서 발원하여 역시 북류하는 당진천 변에 용두, 채운 평야 등 큰 평야들이 분포하여 내포의 대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당진은 일찍부터 인간 거주의 적지가 되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따라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선사 시대는 물론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를 포함하는 다양한 유적이 발굴, 조사되고 있다. 구석기 유적은 가로림만의 석문면 초락도삽교천 주변의 우강면 송산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삽교천 연안의 간척은 사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서 규모 면에서 일반 해안 간척지를 훨씬 능가하였다. 삽교천 연안에 일종의 제방인 언(堰)을 쌓아 점차 간척해 갔는데, 지금도 삽교천 변의 우강면 일대에 입식(入植)한 세력가의 성(姓)과 제언(堤堰)을 따서 만든 홍언(洪堰), 박언(朴堰), 독언, 피언, 남언, 신언, 황언 등의 화석 지명인 언지명(堰地名) 계통의 마을 지명이 많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면천 산수 조에도 강문포를 설명하면서, 제언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삽교천 주변의 넓은 해면 간사지에 농토를 마련하기 위해서 제언 축조가 민간인 사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과 서울의 세도가들은 물론 궁방(宮房)과 정부 기관에서도 나서 자신들의 전장(田莊)을 만들었다. 사실 이전에 이미 감조 하천인 삽교천에 곡교천, 무한천, 금마천 등 많은 지류들이 모여들면서 천변 주위에 저평한 충적지를 형성하여 소위 내포평야, 예당평야를 형성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사를 지었고 아울러 수리를 바탕으로 한 농경문화가 발달되었으며, 삽교천 주변은 서울과 조운 통로가 열려 있어서 이미 곡창 지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넓은 곡창 지대에 논물을 대는 농업용수 확보 문제이다. 따라서 농사짓는 데 가장 중요한 농업용수 확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각종의 수리 농경 문화는 만경강 주변과 더불어 삽교천 변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당진이 내포 지역에서 수리 농경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둑제, 보, 포강 등이 있었다.

둑제는 장마철 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정월 열나흗날 이루어지는 세시 행사였다. 대개 뱀과 같은 뾰족한 잡귀들이 둑을 터트리지 말라는 뜻으로 개인적으로 지냈다. 일반적으로 범벅이나 떡시루를 짊어지고 잘 터지는 둑에 가서 떡과 청수[물]을 떠 놓았다. 공동 제의는 유교 제의를 가졌다. 당진 지역에서 둑제는 당진읍 구룡리, 용연리, 우두리, 고대면 옥현리, 면천면 사기소리, 성하리, 석문면 장고항리, 송악면 복운리, 정미면 도산리, 합덕읍 합덕 방죽, 합덕읍 도곡리 등 11개 지역에서 지냈다. 대부분 개인 제의이기 때문에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들 지역은 대부분 큰 하천을 끼고 있는 농경지 둑이나 방죽 둑이며, 바닷가 간척 사업, 염전 등과 관련해 해일로 인한 둑의 보호를 위해 꼭 필요했던 곳이다.

삽교천 연변의 평야지에서는 1962년 예당저수지가 완공되어 1963년 예당 수리 조합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보(洑) 막는 공사가 매년 있었다. 그 이후 보 막는 공사는 종결되었다. 구만리보와 술원리보로 가을철 논에 벼를 베고 나면 사람들은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로 달려가 구만리보, 순성으로 달려가 술원리보를 막았다.

물보질은 우강면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농사법이었다. 물이 귀한 우강들에서 가뭄을 극복하며 농사를 짓고자 노력했던 이 지역만의 진풍경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겨우내 삽교천 물과 순원리보 물을 농경지에 끌어들여 물을 가두고 긴긴 봄철 가뭄을 이겨가며 농사를 짓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시에 예당저수지도 없었고 삽교천 물도 없었다. 봄철이 되면 상류 지역에서 모두 물을 잡기에 삽교천 물도 순성, 면천 지역 하천에서 내려오는 물도 고갈되기에 미리 하천을 막아 그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우강들 사람들이 다 나와 보 막는 작업을 했다. 매년 11월경에 모여 보를 막고 하천 물을 끌어 들였다. 대부분 천수답이었기에 겨우내 구만리보와 주언보[술원리보]로부터 받아들인 물이 들어 찬 봇장과 포강의 물을 이용했다. 날이 몹시 가물 경우 밤낮없이 물을 품는 것이 일이었다.

봇장은 수심이 낮고 작은 웅덩이 같은 곳이다. 왜정 말엽 가뭄으로 농사를 짓기 어렵게 되니까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봇장을 굴착해 포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순전히 가래를 이용해 공사를 했다. 부장리는 일역원에 1곳, 하리와 신진 경계 지점에 ‘S’ 자로 길게 있었다. 하리에 1곳, 성원리에서 소반리, 강문리까지 감철원 봇장의 규모가 2㎞였으며, 대포리 둠벙 등 곳곳에 둠벙이 있었다. 신촌리는 한해 대책용으로 깊은 논에 포강을 2개 팠다.

내포평야에서 유명한 보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구만리보이고 다른 하나는 술원이보이다.

술원이보는 면천면에서 내려오는 남원천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하는 소들 평야 지역의 우강면 부장리, 신평면 신송리, 우강 신촌리, 공포리원치리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막은 보이다. 수원이보의 위치는 신평면 신송리 2구 지나들기 동네로 그 갯고랑을 가로질러 막았다. 보의 길이는 약 70~100m 정도이고, 보의 높이는 높은 곳이 10m 내외 정도였다. 구만리보는 옛 포구인 구만포(九滿浦)에 있던 보로 고덕면 한내에서 내려오는 물과 삽교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는 합수 지점에 설치되었다. 더 정확히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와 예산군 고덕면 구양도리의 협곡지로 보의 길이는 200여m 정도 되었는데, 홍수로 물난리가 심하지 않으면 전년도 공사 부분이 남아 있어 보 공사 규모는 적어진다. 구만리 수리계는 예당 조합이 생기기 전인 1960년대 초까지 삽교천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던 고덕·우강·합덕 지역 사람들의 보 공사 및 수세를 관리했던 조직이었다. 대개 보 공사는 100여m를 가로막는 작업이었다.

[매향 문화의 중심, 당진]

안국사지 배바위 매향, 신평 운정리 돌미륵 매향에서 보여 주듯이 향을 묻으면서 생기는 침향을 매개로 미륵 부처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민중 불교의 신앙 의례인 매향 문화(埋香文化)의 중심지가 당진이다. 매향비(埋香碑)란 향을 묻으면서 그 연유와 시기, 장소, 관련된 사람이나 집단을 기록한 비문을 말한다. 비문은 자연석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도 있고, 인공적으로 만든 비석에 비문을 파서 입비(立碑)하는 경우도 있다.

매향은 향(香)을 묻으면서 생기는 침향(沈香)을 매개로 하여 미륵 부처와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민중의 불교 신앙 의례이다.

우리나라에서 매향 의식이 일반화된 시기는 14~15세기로, 여말 선초 변혁의 시기였다. 전환기에 처한 민중들이 현실적 위기감을 극복하는 한편, 더욱 더 더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매향 의식을 주도했던 것이다. 특히 내포 지방처럼 왜구의 침탈이 심했던 해안 지방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큰 불안거리였다. 고려 말 이래 조선 초까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해안 지역에는 조운선을 약탈하려는 왜구의 출몰이 많았다.

이런 해안 지역의 민중들은 피부로 느끼는 현실적 불안감을 구원받고자 미륵 신앙과 결합하여 매향을 했던 것이다. 매향비가 발견되는 곳이 거의 전부 해안가 지방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륵 신앙은 석가모니의 시대가 가고 미래불인 미륵을 축으로 하는 메시아니즘이다. 미륵 신앙은 석존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3회에 걸쳐서 설법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용화 회상에 태어나길 기원한다면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것이 사찰 건축, 불상 조성, 향의 공양 등이다. 우리나라는 향이 귀하고 향기가 뛰어나지 않아서 향을 묻어서 침향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런 매향은 주로 미래불인 미륵과 관련이 깊다.

전국에는 20개의 매향비가 있는데, 이 가운데 실제 확인된 15개, 기록상 전하는 것이 2개,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매향비일 가능성이 높은 3개가 있다. 이 가운데 내포 지방에는 홍성 1개, 예산 1개, 당진에 2개 총 4개가 있고, 대부분이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 많다.

보물 제100호인 정미면 수당리당진 안국사지 석조 여래 삼존 입상(唐津安國寺址石造如來三尊立像) 바로 뒤편에 속칭 ‘배 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매향비는 바로 이 바위의 앞면에 새겨져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비라고 할 수는 없고, 바위에 새겨져 있으므로 암각이라고 해야 하겠으나 그 형식이 비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암각비(岩刻碑)라고 부를 수 있다. 매향비는 매향 의식을 행하고 이 사실을 기록한 비를 말하며, 돌을 다듬어서 세운 것도 있고, 자연석에 그대로 암각한 것도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인 당진 안국사지 매향 암각(唐津安國寺地埋香岩刻)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경오 이월 일 여미북천구 포동제매향 일구 화주각선 결원향도(庚午二月日余美北天口浦東際埋香一丘化主覺先結願香徒).” 즉, 경오년에 각선(覺先)이라는 화주가 중심이 되어 향도(香徒)를 결성하고 여미현의 북쪽에 있는 천구포 동쪽에 매향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신평면 운정리 삽교천변 운정 양수장 근처에 가면 옛 백제의 신평현(新平縣) 읍치로 추정되는 신평현성(新平縣城)이 있고, 그 인접지 탑재 마을 수로변에 미륵댕이 마을이 있다. 그 마을 수로변에 가면 정말 멋진 돌미륵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 작은 매향 돌비석이 하나 나란히 서 있다. 돌미륵은 남근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크기는 높이 217㎝, 두께 70㎝ 내외로 얼굴의 크기는 92㎝이다. 돌미륵은 자연석을 투박하게 다듬어 삼도(三道)와 옷 주름살 등을 표현하였다. 이외 불적에 관련된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돌미륵 옆에 윗부분이 뾰족하고 밑 부분이 넓은 돌이 있다. “선덕 삼년 무신 이월일일(宣德三年戊申二月一日)”이라고 쓴 작은 입석(立石)으로, 돌미륵과 함께 옆에 나란히 서있다. 이 입석에는 위의 글자 이외에도 여러 글자의 명문이 음서되어 있다. 이 명문석과 돌미륵과의 관련성은 확실하지 않으나 바로 옆에 위치한 것으로 미루어 돌미륵과 명문석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이 돌미륵이 남근석의 형태를 한 것과 함께 전언에 의하면 석장승 내지는 망부석이라 불리고 있어 대체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돌미륵이 아닌가 여겨진다. 옆에 서 있는 작은 입석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선덕 삼년 무신 이월 일석 (입)(□□)연?호장 호길저(□) 진(□)시주 현내 향도 십(□) 삼(□)화주 전백(석)(이□) 금을포(조□)(宣德三年戊申二月一夕 (笠)(□□) 筵? 戶長 扈吉底(□) 溱(□) 施主 縣內 香徒 十(□) 三(□) 化主 全百(石) (二□) 金乙浦(漕□).”

명문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1428년(세종 10)에 세워진 매향비(埋香碑)임이 틀림없으며, 신평의 토성(土姓)으로 호장(戶長)인 호길저(扈吉底)가 주도하여, 신평현 내에 사는 불교 향도(香徒)들을 모아서 시주한 후에 1428년에 매향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부락 이름도 이 미륵불(彌勒佛)이 있는 당이 있었기에, 거기에서 유래하여 ‘미륵당’이 변하여 ‘미륵댕이’가 되었다. 옛날에는 당(堂)으로서 보호각을 세워서 매년 용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근기(近畿) 문화의 중심, 당진]

당진 지방의 또 다른 문화 특성은 충청남도 행정 구역에 속하면서도 대전 문화권[금강 문화권]이 아닌 경인 문화(京仁文化)와 유사한 근기 문화권을 나타내는 곳의 중심지가 당진이다. 삽교천과 차령산맥이 남서 방향으로 자연적 경계를 이루어서 금강 유역권과 차단되어 같은 충남 지역이면서도 등질 지역(等質地域)이 아닌 이질 지역(異質地域)을 만들었고, 오히려 편리한 삽교천 수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열린 창(窓)인 아산만을 통하여 일찍부터 경인 지방으로 통하였다.

굳이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빌리지 않아도 육로로 충청도 내륙과 소통하는 길은 예산의 차동 고개를 넘어서 유구 쪽으로 넘어가는 길밖에 없었다. 반면에 수로와 해로를 통하면 쉽게 경인 지방과 통하였다.

내포 문화의 큰 특징은 남북 방향의 해안을 통한 교류와 한양, 경기도와의 연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내포의 방언과 민요에 경기도와 전라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내포 지역이 많은 분야에서 폭넓게 기저적으로 경인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근기권(近畿圈)으로서의 문화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

사실 1979년 삽교천 방조제가 완공되기 전까지도 육로로 서울로 왕래하려면 멀리 신례원을 돌아서 천안~평택~서울로 왕래하였다. 따라서 당진 사람들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가로 질러서 평택으로 건너가서 발안~수원~서울로 가거나, 인천으로 배를 타고 직접 가서 인천~서울로 왕래하였다.

삽교천 연변은 고려 및 조선 시대부터 세곡의 운송을 위한 조운의 출발지로서 포구가 발달했다. 그러나 조운 기능이 쇠퇴하면서 자연히 지역 간 물산의 교역을 위한 포구의 기능을 갖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다시 인천까지 뻗어 나갔다.

일제 말부터 해방 이후 인천항을 거점으로 서산과 당진 지방의 각 포구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취항하여 주변 곡창 지대에서 생산된 미곡을 주로 반출하는 포구로서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 당시 인천항과 연결되는 당진의 주요 포구는 난지도 포구, 당진포, 오도, 보덕포, 운정포, 한진, 맷돌포, 남원포, 공포, 부리포, 구양도 등이 있었다.

1979년 삽교천 방조제의 완공으로 삽교천 변의 포구들이 사라졌지만, 해방 후 여객선이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군도~남양만~아산만을 지나 한진[송악읍 한진리]~맷돌포[신평면 매산리]~공포[신평면 운정리]~남원포[우강면 부장리]~수문통[우강면 신촌리]~부리포[우강면 강문리]~선장포[아산시 선장면]~구양도[합덕읍 옥금리]~구만포[고덕면 구만리] 등을 거치면서 운항되었다. 공포가 삽교천의 최하류 포구였고, 나머지 포구들은 상류로 올라가면서 위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인천으로 가는 데에는 포구의 위치에 따라 다른데, 보통 4~7시간 정도 걸렸다. 이용하는 사람들은 삽교천 주변의 면천, 덕산, 신평, 합덕, 고덕, 예산, 당진, 송악, 순성, 석문, 고대, 정미 사람들이었다.

올라갈 때는 30~40명의 여객 손님과 쌀, 잡곡, 계란, 옹기 등을 인천으로 실어가고, 내려 올 때는 그릇, 광목, 새우젓, 제과류, 옷감, 생필품 등이 실었다. 그 당시 인천을 오가던 배는 영창호, 이근호, 공동환, 해평호, 인충호 등이다. 삽교천의 부리포는 일제 강점기에 내포 평야의 곡물을 수송하는 당진의 최대 포구로 1913년에는 일본인 헌병 주재소까지 있었다. 역천의 오도항은 일제 강점기 당진의 외항(外港)으로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천주교 성지 문화의 중심, 당진]

현재 당진 지역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천주교 관련 유적인 우강면 송산리 솔뫼 성지[사적 제529호] 김대건 신부 탄생지,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구 합덕 성당,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에서 보듯이 내포 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는 천주교 문화(天主敎文化)의 중심지이다. 이 밖에도 1868년에 순교한 박선진, 박태진의 순교자 묘소가 있는 신평면 원머리, 메스트르 신부, 랑드르 신부가 전교 활동 중 선종하여 묻혔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 합덕 신앙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합덕읍 석우리 황무실 교우촌 등은 아주 중요한 천주교 유적지이다. 황무실 교우촌은 1970년 합덕 성당으로 신부의 묘가 이전하면서 관심이 옅어졌다. 당진 지역은 이제는 세계적인 성지로 발돋움했으며 매년 수십만 명이 성지 순례지로 이곳을 찾고 있다. ‘솔뫼[松山]’는 소나무가 많이 있는 야산이라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원래 김대건 신부의 주소가 홍주목 밋내[沔川] 솔뫼이다. 교황 프란체스코가 2014년에 방문한 곳으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이다.

솔뫼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가 50세에 영세한 뒤로 교인 마을이 되었다. 김진후는 면천 군수로 있을 때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에게서 복음을 전해 듣고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신앙 생활에 전념하다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 감옥에서 10여 년의 옥고 끝에 옥사하였다.

김진후의 순교 2년 뒤에는 셋째 아들 한현(漢鉉)이, 다시 23년 뒤에는 둘째 아들 택현(澤鉉)의 아들 제준(濟俊)이, 7년 뒤에는 제준의 아들 대건이 순교함으로써 32년 사이에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어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후손들이 김대건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김대건이 살던 집터와 소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을 포함한 4,600평[약 1만 5207㎡]을 매입하여 비석을 세웠다. 대전 교구는 1976년 성역화 추진 위원회를 결성, 1977년 김대건의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하여 천주교인들의 순례의 발길이 현재 끊이지 않고 있다.

합덕 신리 성지는 퀴를리에(Curlier, J. J. L.) 신부가 처음 정착한 양촌과 이웃한 곳이다. 손자선 도마 성인이 태어나 28세의 나이로 순교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손자선 도마 성인은 한글 교리서 저술 등 천주교 사료 정리에 힘썼다. 또한 조선 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주교관이며 조선 교구청이었다.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4년에 복원하였는데 복원된 주교관의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은 실물 그대로를 사용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상하이에서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하고 김 신부와 함께 1845년에 상륙하여 포교 활동을 하다 조선 교구 제5대 교구가 되었으며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구 합덕 성당 전신은 1890년(고종 27)에 설립된 양촌 성당[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초대 본당 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1899년 현 위치에 한옥 성당을 건축하고 이전하여 합덕 성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 7대 주임 페랭(Perrin, P.) 신부가 1929년 현재 건물인 벽돌조의 고딕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1960년 신 합덕 성당이 분할되어 독립함으로써 명칭이 합덕 성당에서 구 합덕 성당으로 변경되었다. 합덕 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의 사적지로 알려졌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Daveluy, M. A. N.)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체포되기 전 피신하였던 곳이 현 구 합덕 성당의 신리 공소(新里公所)인데,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