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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과 일몰을 한 자리에서 맞이하는 곳, 왜목마을의 해돋이축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42
한자 日出-日沒-祝祭
영어공식명칭 Waemok Sunrise Festival with Sundown
이칭/별칭 왜목마을의 해넘이 해돋이축제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융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12월 31~2000년 1월 1일 - 제1회 왜목마을 해돋이축제 개최·폐회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까지 - 일출과 일몰을 한 자리에서 맞이하는 곳, 교로리 해돋이축제 추진 위원회 주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2016년 - 왜목마을 해돋이축제, 석문면 개발 위원회가 주최 시작·종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 왜목마을 해돋이축제, 교로리 해돋이축제 추진 위원회에서 주최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에서 매년 12월 31일에서 다음해 1월 1일까지 진행되는 일련의 해돋이 맞이 관련 행사.

[개설]

왜목마을 해돋이축제는 해돋이를 주제로 성공한 축제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왜목마을 해돋이는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왜목 마을’이라는 한가한 어촌을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또 왜목마을 해돋이는 당진 9경 중에 제1경으로 꼽힐 만큼 당진을 대표하는 경관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으며, 왜목마을은 당진 지역 경제 활성화의 큰 축을 맡고 있을 정도다. 당진시도 그만큼 왜목마을에 투자를 늘려 더욱 많은 관광객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축제 주최를 당초 마을 주민에서 석문면 개발위원회로 넘겼다가 2017년부터 교로리 주민들[교로리 해돋이축제 추진 위원회]이 다시 행사하게 됐다. 이는 ‘왜목마을’이라는 장소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만큼 주민들이 축제 주최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당진에서 새해 맞이하세요."]

당진시 홍보 담당자는 매년 연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도 자료를 작성해 당진시청 출입기자단에 배포한다. 보도 자료의 제목은 "당진에서 새해 맞이하세요."이다.

서해에서 일출과 일몰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 당진시 석문면 왜목마을은 새해를 앞두고 항상 관심을 받고 있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장고항노적봉 남근 바위 사이로 해가 떠오르며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아름다운 자태를 연출하는 왜목마을의 일출은 동해의 일출과 달리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해돋이 명소이자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도 유명하다.

왜목마을에서는 정유년 새해를 앞두고 해넘이와 해맞이 행사가 열렸으며 12월 31일 오후 5시부터 일몰 감상[일몰 예정 시간 오후 5시 26분]을 시작으로 관광객 노래자랑과 라이브 콘서트,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가 진행되어 2017년 1월 1일 아침에 해돋이 행사[일출 예정시간 오전 7시 47분]가 무료 떡국 나눔 행사와 함께 열렸다. 당진에는 왜목마을송악읍 한진 포구에서도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 있어 이곳 역시 관광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한진 포구서해안 고속 도로 송악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서해 대교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일출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다. 당진시 관계자는 “왜목한진 포구서해안 고속 도로와 당진~대전 고속 도로를 이용하면 수도권과 대전에서 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장점이 있다.”면서 “가족과 함께 당진에 오셔서 새해 소망을 빌어 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새해맞이 해돋이를 구경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멀리 정동진으로도 가지 말고, 여행하기에도 적당한 시간[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당진의 왜목마을로 오라는 유혹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이런 당진시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 관광객들이 많다. 왜목마을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히 서해안 고속 도로와 당진~대전 고속 도로의 영향으로 수도권과 대전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특히 많다고 한다. 동해 쪽의 정동진 해돋이도 물론 유명하지만 왜목마을의 해돋이도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해돋이 마을' 이전의 '왜목마을']

해돋이로 유명세를 타기 전의 ‘왜목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질문은 받은 당진시 석문면 교로 2리 이진섭[68세] 이장은 진한 아쉬움을 자아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사진을 찍어놨어야 했는데……. 참 안타깝네요.” 그러면서 잠시 눈을 감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진섭 이장의 회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을 이름부터 다르다. 현재 ‘왜목마을’이라고 알려진 동네가 ‘진골’, 그 ‘진골’에서 남동쪽으로 마주 보이는 동네가 바로 원래의 ‘왜목마을’이라는 것이다. 설명대로 지형을 살펴보니 정말 왜가리 목을 닮았다. 해돋이축제가 시작되기 전 진골에는 6가구, 원래 왜목마을에는 11가구가 있었다. 생활은 반농반어라고 했다. 수산업에 종사했지만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지는 않았고 주로 김을 양식했다. 당진에서는 이 왜목마을과 진골에서 처음으로 김을 양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나면 굴도 따고, 낚시도 하고, 바지락도 캐고, 김 양식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만했다고 한다.

특별히 달라질 기미도 없이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약간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 양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어느 해부터인가 김 수확량이 줄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을 분석해 보았지만 딱히 집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왜목마을 해돋이’가 장관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해돋이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야 일터로 나가면서 늘 보던 아침 해에 불과했지만 외지인들에게는 그것도 볼거리였던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혹시 이것 때문에 마을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밀레니엄 열풍과 해돋이축제]

2000년을 앞둔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른바 ‘밀레니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현대인들 중에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1900년’을 살고 다시 100년을 지나 ‘2000년’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은 대부분은 ‘2000년’을 살게 될 것이지만 굳이 그 의미를 부여하자면 ‘2000년’을 지켜봤다는 것은 비길 데 없는 영광임이 분명할 것이다. 지난 ‘1000년’을 살고 간 옛날 사람의 영광을 만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2000년이 시작되는 첫날 무슨 행동이라도 해서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남기려고 했다. 지방 자치 단체들도 이 ‘밀레니엄 열풍’을 빌어 해당 지자체에 강력한 인상을 남길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렇다고 당장 무슨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밀레니엄 첫해인 2000년 1월 1일을 보낼 수는 없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해돋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멋진 해돋이 행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당진에는 왜목마을 해돋이가 있었다.

[역발상이 당진을 바꿨다]

1998년 9월 이철환 당진 부군수가 부임하여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몇 년 전 『경향 신문』 사진 기자가 왜목마을에서 1주일간 머물면서 해돋이 모습을 촬영했다. 촬영을 마친 그 사진 기자는 군청에 들러 왜목마을의 해돋이 장면이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이철환 부군수는 『경향 신문』 사진 기자가 그렇게 감탄할 정도면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후 10여 차례 왜목마을을 방문했다. 이철환 부군수의 고향이 당진이지만 왜목마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니 전형적인 어촌 마을에 불과했고 마을 입구는 잡초만 무성했다. 바다에는 어부들의 배 몇 척만 떠다니던 장면만 기억이 났다고 했다. 그러나 지형을 살펴보니 과연 마을의 형세가 ‘왜목’을 닮았으며 왜가리 머리쯤에 있는 노적봉 위로 해가 솟고 그 장면을 많은 이들이 바라보면서 감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마침내 확신을 얻은 이철환 부군수는 공무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여러분! 역발상이 당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흔히 서해는 해가 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왜목마을은 서해에 있습니다. 왜목마을도 해가 지는 곳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왜목마을에 가서 지켜보십시오. 왜목에서는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고 있습니다. 서해도 해가 뜰 수 있고, 왜목마을에서는 분명히 해가 뜨고 있습니다. 여기에 왜목마을에서는 해가 지는 광경도 볼 수 있습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당진의 왜목마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이 점을 널리 홍보합시다.”

이후 당진군은 한국 관광 진흥 공사와 전국의 사진 기자단 등을 초청해 왜목마을의 해돋이를 선보였다. 지역의 방송사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1999년 12월 31일과 2000년 1월 1일 해돋이축제를 앞두고 계속 홍보를 이어갔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해 언론에서는 15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보도했다.

['당진 9경' 중 제1경이 된 왜목마을 해돋이]

당진에는 ‘당진 9경’이 있다. 그중 '왜목마을 해돋이'가 제1경이다. ‘해돋이’라는 자연 현상에 힘입어 한때 한가한 반농반어 마을었던 왜목 마을이 이제는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당진군의 밀레니엄 행사로 기획된 왜목마을 해돋이축제가 성공을 거두자 당진군도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왜목마을 앞바다는 원래 뻘밭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해수욕장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끊이지 않고 모래를 퍼 날랐다. 뻘밭이었던 왜목 마을 앞바다는 이제 해수욕장이 되었다. 당진에는 해안선의 변화로 해수욕장이 하나만 남았다. 대난지도 해수욕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왜목마을 해수욕장처럼 사람이 만든 곳도 있다. 편의 시설도 확충했다. ‘진골’에서 원래 ‘왜목마을’과 테크로 연결해 산책로를 늘렸다. 한 여름에도 ‘해와 달의 만남 축제’를 마련해 젊은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에 열린 첫 행사에서 2008년 해맞이 행사까지는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마을 주민들이 축제를 꾸려나왔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는 석문면 개발 위원회가 주관했다. 2016년 12월 31일에서 2017년 1월 1일 왜목마을 해돋이축제는 마을 주민들이 주최가 된 ‘교로리 해돋이축제 추진 위원회’에서 다시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추진 위원장은 교로2리 이진섭 이장이 맡았다. 돌고 돌아 결국 주민들이 다시 축제를 주관하게 된 것이다. 이진섭 이장이 다시 회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돋이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이 마을에는 17가구가 살았었다. 당시의 어촌의 형태는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다. 흔히 이러한 모습을 상전벽해라고 하는 것 같다. 당진 자체가 상전벽해의 고장이지만 왜목마을도 그와 못지않다. 그러한 관광지답게 왜목마을에는 상가와 횟집, 펜션, 마트 등이 꽉 차게 들어섰다. 여기서 장사로 돌아선 원주민은 7가구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들어와 왜목마을 주민이 됐다. 이들이 왜목마을 상가 번영회의 주축이 됐다. 왜목마을은 전국구다. 교로리는 주민이 447명이다. 이중 남성은 247명, 여성은 200명이다. 이들이 해돋이축제를 이끌어갈 것이다.”

["어두운 세상! 횃불로 희망을 밝혀라!"]

“어두운 세상! 횃불로 희망을 밝혀라!” 2016년 12월 31일에서 2017년 1월 1일 왜목마을 해돋이축제의 주제이다. 이 축제는 전체적으로는 해넘이[아쉬움]-특집 음악회[기다림]-횃불 점화[기원]-자정[열정과 불]-해맞이[희망의 빛]-부대 행사로 구성되었다. 섣달 그믐날에는 당진 생활 음악 협회의 ‘7080 동아리 공연’, 경품 추첨, 개막식, 깜짝 경매, 특집 콘서트, 관광객 장기 자랑, 당진 시립 합창단 공연, 희망 2017 횃불 점화로 진행했다. 1,000개의 횃불을 관광객에게 배포해 내빈이 횃불을 달집에 점화하여 본격적인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부대 행사로는 사주관상과 타로 점보기, 가족사진 만들기[캠페인 버튼], 느린 우체통, 해돋이 축제 홍보관 운영을 마련했다. 새해 첫날 행사는 가래떡 나눠먹기와 당진시립 합창단 공연, 신년사, 해돋이 감상, 대붓 희망 퍼포먼스, 경품 추첨, 떡국 나눠먹기로 계획했다.

주최 측은 전국적인 조류 독감 발생이란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대대적인 홍보는 삼가고 조용히 축제를 치렀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해돋이를 보며 시름을 달래고 활기찬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바람과 왜목마을 해돋이축제가 워낙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행사를 알고 찾아오는 관광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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