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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 포구와 나루터, 내포문화를 낳은 육로와 수로의 스위칭 허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84
한자 唐津-浦口-內浦文化-陸路-水路-
영어공식명칭 Dangjin Inlet & Ferr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어업 활동을 하거나 상업적인 교역 활동을 하는 곳과 배가 대안 지역으로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

[개설]

근대 교통 기관이 도입되기 전에는 육로보다는 수로를 더 많이 이용했다, 이러한 내륙 수로에는 나루가 있어서 강 양쪽 지역을 연결시켜 준다. 나루는 하천가나 좁은 바다 목의 배가 다니는 일정한 곳을 말한다. 나루는 도진(渡津), 진도(津渡), 진두(津頭), 도두(渡頭)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및 해방 이후 근대적인 육상 교통의 발달은 자연 해상 교통의 쇠퇴를 가져왔다. 삽교천 연변의 각 포구들은 점차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어항과 순수하게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의 기항지와 그리고 양쪽을 겸하는 포구로 기능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어떤 포구는 단순한 나루터로 전락하기도 하였지만 인구의 증가와 장시의 발달은 주민의 왕래를 급속하게 촉진시켜 곳곳에서 나루가 신설되었다. 아산만삽교천 변에 위치한 당진은 수로 교통의 요지로서 일찍이 물산이 집산하던 곳이고 또 경창으로 실어 나르는 조세미의 집산지여서 포구가 발달되었다.

[당진의 나루터]

당진의 나루터는 크게 아산만 지역과 삽교천 유역으로 나눌 수 있다. 아산만 지역의 주요 나루는 한진, 성구미, 안섬 나루이다. 송악읍 한진 나루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로 건너다니고, 송산면 성구미 나루는 아산만 건너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고온포 나루로, 송악읍 안섬 나루도 역시 아산만 건너 화성시 우정읍 석천리 남포 나루로 건너는 나룻길이다.

삽교천 유역의 나루는 댓골 나루, 독개 나루, 세거리 나루 등이 있었다. 댓골 나루는 합덕읍 신석리에서 예산군 신암면 신택리로 해서 예산, 천안을 다니던 곳으로 현재도 돌다리가 있다. ‘댓골’은 신택리 택동을 말한다. 독개 나루는 삽교천 연변에 사는 합덕과 우강의 들사람들이 식수가 나빠서 독개 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삽교천을 건너가 선장에서 식수를 구해 오던 나루이다. 옛날에는 당진~서산~면천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독개 나루~선장~공세곶~평택~서울로 가는 길목이기도 한다.

세거리 나루는 합덕읍 신리에서 예산군 신암면 예림리, 용궁리로 건너가 예산장을 보러 다니던 나루이다. 합덕읍 신리 삼호마을삽교천 갯골에서 횃불을 켜고 실뱀장어를 잡는 모습이 굉장했다.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나루들은 1970년대 이후 근대화의 물결이 급속하게 불면서 1980년대 들어와 대부분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나 아산만 주변에 남양 방조제, 아산 방조제, 삽교천 방조제, 대호 방조제, 석문 방조제가 차례로 완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자 각 포구와 도진들은 큰 영향을 받아서 한진, 맷돌포, 장고항 등 몇 곳의 포구를 제외하고는 소멸되었다.

고대에는 육상 교통로보다는 수상 교통로가 발달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하천과 구릉이 많아서 지형이 험준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파발을 중심으로 한 통신로를 개설하고 화물의 운송은 주로 수로를 이용하였다.

아산만삽교천 연변에 위치한 당진, 면천, 아산, 예산, 덕산 등 내포 지방은 수로 교통의 요지로 일찍부터 물산이 집산하던 곳이며,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세미의 집산지로 포구가 발달되었다. 내포 지방은 거대한 농경지를 배후에 가지고 있고, 아산만이 육지 쪽으로 쑥 들어갔을 뿐 아니라 아산만에 연결되는 삽교천내포평야 한가운데를 깊숙이 흐르고 있어 수상 교통이 아주 편리하여 이른 시기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삽교천 주변은 예부터 어염시수(魚鹽柴水)가 풍부하고, 포구가 발달되어 수운 교통이 편리하여 한양과의 교류가 빈번하였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전국의 장시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록하고 있는데, 이 시기 내포에는 약 43개의 장시(場市)가 있었고 주로 당진, 예산, 홍성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내포 지역이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삽교천, 무한천 하천 수로의 포구를 중심으로 곡물, 어염시수의 교류가 활발하여 장시가 집중적으로 발달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당진 지방에도 읍내장(邑內場)[면천-현 면천면 성상리에 있던 장], 옥장(玉場)[면천-순성장], 남창장(南倉場)[면천-현 우강면 창리에 있던 장], 기지장(機池場)[면천-현 송악읍 기지시리에 있던 장], 읍내장(邑內場)[당진-당진읍 읍내리에 있던 장], 삼거리장(三巨里場)[당진-고대면 삼거리에 있던 장], 거산장(巨山場)[홍주-신평면 거산리에 있던 장], 예전장(芮田場)[홍주 현내면-현 신평면 상오리 예전에 있던 장] 등이 있었다. 『임원 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범근천장(泛斤川場)[면천-우강면 범근시리에 있던 버그내장이, 후에 합덕읍 운산리로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어 합덕장으로 개편되었다. 그런 이유로 합덕장을 현재 ‘합덕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버그내장’이라고 부른다.]이 새로 등장한다.

[스위칭 허브로서의 포구의 역할]

삽교천 주변은 당진 최대의 충적 평야지가 넓게 전개되고 있다. 삽교천은 내포 지방의 젖줄로 넓은 농경지를 주변에 배태하고 있어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른 시기인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가 있었던 것으로 최근에 알려지고 있다. 또한 삽교천아산만과 바닷길로 통하여 수운 교통이 편리하고 소금, 해산물, 곡물이 풍부하여 한양의 경창과 교류가 빈번하였다. 따라서 삽교천 연변에는 고려 시대 이래 수많은 포구들이 생성되어 일제 강점기까지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내포의 교통로는 곳곳에 발달한 포구를 이용한 수로가 중심이었는데, ‘당진’이라는 지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일찍부터 대중 교류 창고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고대 문화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지역이다.

포구는 내포 문화권의 육로와 수로를 이어주는 스위칭 허브(switching hub)로서 핵심 공간이다. 당진 지방은 삽교천 방조제, 석문 방조제 공사로 위 3개의 하천들이 모두 차단되어 현재 포구의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포 지역은 삽교천역천이 모두 감조 하천(感潮河川)으로 직접 최하류가 아산만과 통하기에 일찍부터 뱃길이 내륙 깊숙이 뻗어 수운로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전 근대적인 시대는 수계(水係)는 길을 이어주고 산계(山係)는 길을 끊어 놓았다.

충청도 지역에서 생산된 물산은 육로(陸路)와 수로(水路), 해로(海路)라는 3웨이 시스템으로 해서 왕도(王都)까지 운반되었던 것이다. 내포 지방의 곡창에서 생산된 곡물은 삽교천 연안에 설치된 조창이 있는 포구를 통하여 수납되고 서울로 운송되었기에, 각 포구에는 선박의 왕래가 많고 물자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삽교천에는 고려 시대에 이미 60포(浦)에 해당되는 신평의 회해포(懷海浦)와 합덕[우강]의 풍해포(豊海浦) 및 이 밖에 예산의 장포가 있어서 중요한 조운 수로 역할을 했으며, 이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범근내포-공세포로 이어지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삽교천 연변은 예부터 주변에 곡창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고 수상, 해상 교통이 편리하여 세곡의 운송을 위한 조운의 출발지로서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부터 포구가 발달해 있었다. 강변에는 수운창(水運倉)을, 해변에는 해창(海倉)을 두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보면 삽교천 변에 월경지(越境地) 분포가 그려져 있는데 예외 없이 조창 표시가 되어 있다. 즉, 홍주지에 속하는 신평과 합덕, 면천지에 속하는 범천, 덕산지에 속하는 비방곶, 천안지에 속하는 신종, 덕흥, 돈의, 수원지에 속하는 걸매 등 5개 주읍의 비월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 밖에 아산만에는 양성지에 속하는 괴대곶, 직산지에 속하는 외야곶 등 2개 주읍의 비월지가, 안성천 변에는 직산지에 속하는 경양이 분포되어 있다. 천안지가 한 번 더 있는 모산까지 합하면 무려 9개의 비월지가 조창 표시와 함께 집중적으로 아산만삽교천에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당시 조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경지의 발생 당초에는 속 군현의 분리 독립이나 임내의 이속에서 연유했지만, 조선 초기 군현제 정비 후에도 계속 존속한 것은 조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조운 기능이 쇠퇴하면서 자연히 물산의 교역을 위한 포구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운이 활발할 때는 선박들의 활동 범위가 서울 용산·마포의 경창까지로 넓었으나, 조운 기능이 없어지면서 인근 해역이나 주변 포구로 바뀌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인천항까지 뻗어 나갔다. 일제 말부터 해방 이후 인천항을 거점으로 당진 지방의 각 포구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취항하여 주로 미곡을 반출하는 포구로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인천항과 연결되던 당진의 주요 포구는 난지도, 오도, 보덕포, 운정포, 장고항, 한진, 맷돌포, 남원포, 부리포, 구양도 등이 있다.

[고려 시대 당진의 포구와 나루]

조선의 조운 체계는 고려의 조운 체계에 기초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포구와 항로는 조선 시대까지 거의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해 아산만에는 고려의 12조창이 시행되기 이전에 조세 운송 시스템인 60포 중에 풍해포(豊海浦), 회해포(懷海浦), 이섭포(利涉浦), 편섭포 등이 조운과 관련된 포구로서 있었다. 그러나 성종·현종 대를 거치면서 군현제가 정비되고 중앙의 지방 통제가 더욱 강력해지자, 정종 대에 이르러 호족 지배하에 운영되던 기존의 포를 대신해서 국가 주도의 12조창이 설립되어 조운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고, 개경 이북에는 안란창을 두었다.

삽교천 연변에는 상류[지류인 무한천 상류]에 이섭포, 삽교천의 중간에 풍해포, 삽교천 최하류 아산만과 만나는 곳에 회해포가 연속적으로 시스템에 맞추어 입지하여 주변 일대의 군현 조세미를 수납하는 데 중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려 말 공양왕 때에는 장포(獐浦)라는 포구에 당성(溏城)을 쌓고 서울로 조운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장포는 이섭포와 풍해포의 중간인 무한천과 삽교천이 만나는 꼭지 지점에 있었다. 즉, 아산만 일대에는 범근내 천변에 회해포와 풍해포, 진위천과 둔포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편섭포, 당진 북부에 위치한 당진포 등이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전에 거이미포(居伊彌浦)라고 불렸던 회해포(懷海浦) 포구가 신평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해포는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 부근에 있던 것으로 추측한다. 운정리에 있던 공세포(貢稅浦)로 추정된다. 공세포는 현재 삽교천 국민 관광지가 조성되면서 흔적도 없이 교란되었지만, 마을에서는 조선 초기에 공세창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세포는 삽교천의 최하류 아산만 초입에 위치하여 군사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며, 마주보는 대안의 아산 지방으로 건너다니던 포구였다. 회해포는 바로 옆에 백제성인 신평현성(新平縣城)의 유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중심 포구 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에는 ‘공세창(貢稅倉)’, ‘구창(舊倉)’ 등의 화석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런 것들이 조운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며, ‘고역(古驛)’이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의 역원(驛院)이 있기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60포 중의 하나인 해풍의 풍해포(豊海浦)는 홍주의 월경지였던 우강면 송산리 승곶이로 추측된다. ‘승곶이’는 본래 ‘송곶’이었으며, 조선 후기까지도 조운선이 정박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고려사』에는 풍해포가 해풍군(海豊郡)에 있으며 전에 송곶포(松串浦)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992년(성종 11)에 개정된 읍호에 따르면 홍성의 별호가 해풍(海豊)이었으며, 풍해포의 옛 이름도 송곶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승곶이 마을에 사는 촌로들한테 물어보면, 이곳에 옛날에 큰 포구가 있었다고 전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조선 시대 당진의 포구와 나루]

조선 왕조에서는 각지의 현물 세곡을 한양의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수운 교통이 편리한 삽교천 변에 집합시켜서 실어 날랐다. 따라서 세곡을 집산시켰던 곳에는 창(倉)이 들어서고 포구로서의 기능이 발달되었다.

포구가 기항지, 선착장, 어항으로서의 고유 기능뿐만 아니라 일부 도진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포구가 주로 아산만 가에 입지하여 어업 활동적 기능이 강한 데 비해서, 나루는 주로 하안에 입지하여 교통 활동적 기능이 강하다. 따라서 포구는 고깃배, 소금 배, 장삿배가 중심이고 후에 세곡을 운송하는 임운선으로 전업하기도 하였다. 삽교천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방의 어선들은 주로 청어와 석어(石漁)를 많이 잡았다.

조선 시대 포구로 당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삽교천변 우강의 부리포에 있었다는 범근내포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도 삽교천 변에는 이미 신평에 회해포, 우강에 풍해포가 있어서 조운을 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 생리 조에서 내포 지방에서는 아산의 공세호, 덕산의 유궁포, 홍주의 광천, 서산의 성연 포구가 유명한 포구라고 말하고 있다. 이 중에서 유궁포는 융진으로 합덕 지방에 월경지로 있던 유명한 포구이다.

아산만은 내륙 깊숙이 만입되어 있으며 삽교천과 안성천이 만나는 하류에 위치하여, 하천에 의한 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로가 모두 편리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삽교천에는 편리한 수운 교통을 이용하여 곳곳에 포구가 많이 발달되었다. 삽교천 연변에 있는 포구들은 원래 조운이 주 기능 이었지만 후에는 장삿배들이 찾아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염시수가 서로 교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9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9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16개, 『증보문헌비고』에 12개 등 삽교천 주변의 포구들을 상당히 많다.

대내산진(大迺山津)이 공세곶포(貢稅串浦)로, 시진(市津)이 시포(市浦)로 처음에 나루[津]였다가 포구[浦]로 그 기능이 확대된 경우도 있고, 당포(堂浦)가 당포(唐浦)로 한자 지명이 상이한 것도, 중방포(中防浦)가 단장포(丹場浦)로 지명 자체가 완전히 바뀐 사례도 있다. 즉, 주로 도하(渡河)의 기능을 담당하는 ‘나루’에서 상업적 기능이 강화된 ‘포구’로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한편 수로는 상품 유통의 한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간 정보와 쇄신의 소통로이기도 하다. 수로를 매개로 상류와 하류 간 지역 문화를 지리적으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수로가 주변 사람들에 폭넓게 사용되면 그 하천 유역은 문화 등질(文化等質)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고대에 상이한 한자 지명을 쓰는 것은 허다했다. 삽교천의 옛 이름인 범근천의 ‘범’ 자도 犯, 泛 등 다양하게 옛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후기에 삽교천 주변에 상당히 많은 포구와 나루가 발달되어 있어 수운 교통이 편리했음을 알 수 있다. 여말 선초에 해로를 통한 조운이 왜구의 빈번한 출몰이나 험한 조류에 의해서 선박의 침몰 사고가 잦자 최대한 육로를 통하여 정해진 포구까지 수송하고, 그곳에서 수로(水路)[삽교천]~해로(海路)[서해]~수로(水路)[한강]를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게 되었다.

포구가 삽교천 변에 이와 같이 많다는 것은 수운 교통량의 증가, 물자유통의 확대, 인걸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당시 내포지역이 생기 넘치는 땅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행정 중심지인 면천은 육지 속에 있지만 삽교천 지류인 남원천이 깊숙이 면천읍성 주변까지 들어와서 삽교천을 거쳐서 아산만으로 쉽게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이점이 있었다.

당진의 해안가나 삽교천 연변에는 창(倉) 계통의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순성면 중방리 북창(北倉), 우강면 창리(倉里), 합덕읍 합덕리 창촌(倉村), 송산면 당산리 송리 북창(松里北倉), 고대면 당진포리 해창(海倉), 신평면 초대리 소창(小倉), 석문면 삼화리 외창(外倉), 우강면 내경리 둔창(屯倉) 등 무수히 많다. 창(倉)은 옛날에 세금이나 진상품을 받아들일 때 곡물과 같은 현물세를 일시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를 말한다. 이 창고에 보관된 현물 세곡을 선박을 통하여 한양으로 옮기는 제도를 조운이라 하고, 이런 창고를 특히 조창이라 한다. 옛날에는 육상 교통의 발달이 미약하고 도로가 거의 없어서 강이나 바다를 이용해서 이런 세곡을 실어 날랐다.

이런 창(倉)이 설치되어 있던 곳에는 예외 없이 촌락 지명에 창(倉) 자가 들어 있다. 조운이란 한마디로 현물을 받아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으로 왕도인 한양까지 운반하는 제도로 조전, 해조 등으로 불린다. 이때 해안가에 있어 해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 하천변에 있는 강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이라 한다.

조운 제도는 고려 시대부터 제도화되어 13창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약탈로 말미암아 전폐되다시피 되고 육로로 운송을 하게 되어 조창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조운 제도가 다시 정비되어 주로 황해도 예성강에서 전라도 섬진강 사이의 서해안에 조창이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에 와서 조창 자체가 혁파되었다. 각 지방의 조창에서 수납된 조세는 모두 한양의 경창으로 집결되었다. 경창은 용산 한강 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군자창 등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충청도의 수조처로 8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남한강 줄기에 연천, 앙암, 울음안포, 추호포, 이포 등 5개가 위치하고, 아산만 쪽에는 직산의 경양포(慶陽浦)[2개 고을], 아산의 공세곶(貢稅串)[7개 고을], 면천의 범근천(犯斤川)[20개 고을] 등 3개가 위치하고 있다. 범근천은 면천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대진(大津)과 서해를 거쳐서 서강(西江)으로 통하는 수로이다. ‘범근천(犯斤川)’은 현재의 삽교천을 말하는데, 버그내, 범근내(犯斤-), 범천 (泛川) 등 다양하게 불렸다. ‘범근천’은 수조처라는 좁은 장소의 의미로 범근내포(泛斤內浦)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범근내포이다.

범근천(犯斤川)에 수조하는 고을은 면천, 당진, 홍주, 해미, 서산, 태안, 남포, 비인, 덕산, 예산, 청양, 보령, 결성, 대흥, 석성, 부여, 임천, 한산, 서천, 홍산 등 20개로 제일 많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범근내포는 면천군 치소의 동쪽 27리에 있으며, 이곳에 창고가 있었으며, 공주, 홍주에 관할하는 군현의 조세미를 수납하여 서울로 조운하였는데 성화(成化) 14년(1478)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땅바닥에 교착하므로 아산의 공세곶으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1478년(성종 9) 이전에는 삽교천의 범근내포가 굉장히 큰 포구로 조운하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인 고려 시대부터 삽교천 일대가 조운처로 중요한 곳이었다. 아마도 옮긴 이유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삽교천에 유입되는 대안의 지천인 곡교천(曲橋川)에서 흘러 온 토사(土沙)가 쌓여서 더 이상 배를 접안할 수 없기에 삽교천 밖인 아산의 공세곶으로 이전한 것 같다. 현재도 이곳에 토사가 쌓여서 새롭게 하중도인 솟벌섬이 생겨나고 있다.

이병연이 1933년에 저술한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당진군 편에 의하면, 현재의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에 위치한 부리포(富里浦)가 범근내포라고 전해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리포는 일제 강점기 헌병 주재소가 있고 인천과 정기 증기선이 다니던 곳으로 내포의 농산물을 수집하여 인천으로 가서 팔아 생필품으로 바꾸어 오던 중심 포구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던 ‘범근내포’의 지명이 사라지고 『조선 환여 승람』에 와서는 ‘부리포’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 위치는 큰 변함이 없고 토사 때문에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갔을 뿐이다.

우강면 강문리에 위치한 부리포는 『한국 수산지』(1910)에 의하면 돈곶포 북쪽에 있는 이서면[범근내포를 넘어온 아산군 월경지]에 속하는 포구이다. 곡교천과 삽교천이 만나는 아산의 만입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며 삽교천의 만입 폭은 400~500간(間), 만조 시의 수심은 5~6심(尋), 간조 시의 수심은 1심을 유지하여 배의 계선(繫船)에 이용하였다. 부근 평야지에서 산출되는 미곡의 반출구로 유명하며 인천으로 정기 증기선이 왕래하였다. 인가는 43호이고, 어업도 성행해서 궁선을 이용하여 숭어, 작은 새우 등을 어획하며 연안에는 염전도 있었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팔도 총론(八道總論)에서 내포(內浦)에 대해서 기술하면서 유궁진(由宮津) 나루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으로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호수[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에는 또 큰 포구[大浦] 하나가 있으니, 이름이 유궁진으로,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 남쪽으로 오서산에 막혀 있는데 가야산으로부터 온 지맥으로 단지 동남쪽으로 공주와 통한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내포라 한다. [생략] 또 생선과 소금이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대부집이 많다.”

대부분의 책들이 이중환의 『택리지』를 번역하면서, ‘大澤’은 ‘큰 못’으로 ‘大浦’는 ‘큰 개’로 번역하는데, ‘大澤’은 큰 호수를 말하며, 옛사람들은 서해에서 육지 쪽으로 쑥 들어온 아산만을 큰 호수로 표현했다. ‘大浦’도 큰 포구를 의미하며 유궁진[포]을 지칭하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天池) 호수를 옛 기록에서는 흔하게 ‘대택(大澤)’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은 또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생리(生利) 조에서, “내포 지방에서는 아산의 공세호(貢稅湖)와 덕산의 유궁포(由宮浦)가 수량이 많고 근원이 길다. 홍주의 광천과 서산의 성연은 비롯 시냇물 항구이나, 조수가 통하는 까닭에 장삿배가 머물고, 화물을 싣고 부리는 곳으로 되어 있다.”라고 기술하여 덕산의 유궁포를 유통이 활발한 포구로 들고 있다. 계속해서 『택리지』를 보면 유궁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궁포는 북쪽에 이르러 소사하와 합류하여 이 두 개의 물이 교합하는 사이가 아산이다. 칠장산의 큰 줄기가 직산 성거산에 이르러 다시 내려와서 들판 가운데 이른다. 성환역을 지나서 아산에 그쳤는데 이것이 영인산이다. 진산은 동남쪽으로부터 서북쪽으로 향하였고 소사하의 하류가 여기에 이르러 바로 앞에 와서 감돌아 괴어 있다. 후면에 곡교대천이 동남쪽에 흘러와서 서북쪽에서 서로 만나 합류하여 큰 호수가 되었다. 호수의 남쪽 한산은 신창에서 뻗어왔고 호수 북쪽의 한산은 수원에서 뻗어왔는데 수구에서 서로 합쳐져서 마치 대문 같다. 물이 문을 지나 나오면 곧 유궁포의 하류와 합친다. [중략] 유궁포의 동서 여러 읍은 모두 장삿배가 통하나 그중 예산만이 배가 떠나고 머무는 곳이다.” 이 당시 유궁포 북쪽에서는 유일하게 무한천의 호두포만이 예산, 대흥, 청양 3군의 조창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궁포를 덕산 땅이라고 기록했기에 면천군 범천면에 있는 범근내포는 아니다. 그 당시 삽교천 변에 위치한 비방곶면(非方串面)은 덕산의 월경지로 있었다. 『대동지지』 덕산군 산천 조를 보면 돈곶포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온다. 즉, 돈곶포가 덕산의 비방곶면에 있는데, 덕산읍의 선화천[삽교천]과 예산의 호두포[무한천]가 만나서 북류하면 경치 좋은 정포도가 나오는데 후에 유궁포로 변했다. 계속 북류하면 한진이 나오고, 만조 때에 가서야 배를 띄울 수 있는데, 경외 상선(京外商船)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증보문헌비고』 면천 조에 나와 있는 아래의 기록을 보면, 융진(戎津)이 돈곶포이고 아주 중요한 포구 겸 나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융궁진 포구를 통해서 내포 지방을 왕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진포(大津浦) 포구의 상류를 융진이라 하는데, 세속에서는 돈곶(頓串)이라 한다. 이 포구의 상하에 있는데 연안의 서쪽으로 간 것을 내포(內浦)라 부른다. 내포를 왕래하는 자들은 흔히 이 나루를 경유한다. 북쪽으로 흘러서는 암두포(巖頭浦)가 되고, 범근내포가 되며, 강문포(江門浦)가 되고, 이어서 아산의 단장포(丹腸浦)와 합하여 우평포(牛坪浦)가 되며 조금 북으로 흘러가서는 아산의 공세곶포와 합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진(大津)이 된다.”

돈곶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가는데 장애가 되고 있는 삽교천을 건너는 중요한 나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내포 지역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삽교천 상류로부터 하류로 가면서 무수히 많은 돈곶포~암두포~범근내포~강문포~단장포~우평포~공세포~대진 순으로 포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삽교천 변은 포구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대진’은 현재의 한진(漢津) 포구를 말한다.

돈곶포는 옛 덕산군 비방면 돈곶리 지역으로 삽교천을 마주보고 아산군 선장면 돈포리와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 있었다. 이것은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쌍자 나루가 발달된 것을 의미한다. 하평리는 원래 천안군 신종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옛 비방곶면 돈곶리 일부를 편입하여 형성된 곳이다. 하평리는 현재 행정 구역상으로는 예산군에 속하는데, 실제 위치는 삽교천 건너편 당진시 합덕읍 쪽에 붙어 있는 묘한 땅이다. 마치 현대판 비월지(飛越地)로 남아 있는 곳이다.

『한국 수산지』에는 인천항을 기점으로 기선이 둔포(屯浦)[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돈곶(頓串)[아산시 선장면 돈포리], 부리포(富里浦)[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사발포, 고파도(古波島)-서산시 팔봉면 고파도리], 안흥진(安興津)[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수영(水營)[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어청도(於靑島)[전라북도 옥구군 옥도면] 등지를 왕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문포는 옛 아산군 이서면 강문리 지역이며, 범근천[삽교천] 건너에 위치한 월경지였다. 이서면은 1906년에 면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1866) 면천 산수 조에 의하면, 강문포가 범천면[현 우강면] 돈곶포 하류에 있는데, 거주민들이 진흙을 쌓아 올려 살 곳을 만들었으며, 이를 제언(堤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 거주민들이 삽교천 연변을 간척하기 시작했으며, 입식(入植)한 성씨에서 유래된 ‘박언(朴堰)’, ‘홍언(洪堰)’ 등의 마을 지명이 많이 있다. 이런 마을명은 화석 지명(化石地名)으로 아주 특이한 것인데, 이곳 우강면 삽교천 연변에 다수 분포하고 있다. 또, 돈곶포가 강문포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문포는 현재도 그 지명을 유지하여 우강면강문리가 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내포의 아산만 일대는 많은 장시가 분포하는데, 이는 강문포 포구 등을 배경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당시 내포에서 임운(賃運)의 출발지로는 해창(海倉), 웅포(熊浦)[보령], 석관포(石串浦)[결성], 명천포(鳴川浦)[서산], 외창포(外倉浦)[해미], 강문포(江門浦)[당진], 북창포(北倉浦)[당진], 호두포(狐頭浦)[예산], 신궁포(新宮浦)[신창] 등이다.

『아주지(牙州誌)』에 의하면, “이서면(二西面)은 관문 아산에서 서쪽으로 20리, 동쪽으로는 일서면 아현리에서 10리에 있다. 서쪽으로 포(浦)를 건너 면천의 강문리까지 30리이고, 남쪽으로 포를 건너 천안 제방안(堰內)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이북면 백석포가 2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포(浦)는 범근내포, 즉 삽교천을 말한다. 이서면 땅이 삽교천 건너 월경하여 면천 땅인 강문리 옆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아주지』에는, “우평포는 아산현으로부터 서쪽으로 포를 건너서 20리에 있는데, 땅이 비옥하여 백성들이 거주하며 근래에 와서 소금을 생산하여 간간히 생활을 이어가다가 현재는 정부 시책으로 완성 복구하여 의도한 바대로 뜻이 이루어져 완성된 옥토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아주지』에는, “이서 염막은 홍주 면천 백성들이 단결하여 염벌로 자염을 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중 중간에 폐기되고 지금 와서 우평에 새로 개간한 농토와 염전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우평포가 행정 구역상 아산의 이서면에 속해 있지만 실제는 범근내포를 건너 20리 떨어져있는 곳에 있는데, 홍주 면천 백성들이 벌막으로 소금을 생산하여 간간히 생활하다가 현재는 간척하여 염밭과 옥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서면은 1906년 이전에는 아산군에 속하는 면으로 삽교천을 건너와서 현재의 우강면 지역에 있던 월경지인 비입지(飛入地)였다.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 「지방 구역 정리 건」에 의하면 아산군에서 면천군으로 행정 구역이 이속되었다. 이서면은 남원리, 신대리, 인력리, 감찰원리, 우산리, 강문리, 우상리 등 7개리를 관할했는데, 이후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 시 범천면 신촌리, 부장리, 강문리로 흡수 개편되었다. 또한 제49호 같은 칙령에 천안의 월경지였던 우평(牛坪) 부락이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산의 이서면에 속하던 우평이 천안 땅으로 먼저 1차 편입되고, 후에 면천군 이서면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강 평야소들강문[牛坪江門]이라고 하는데, ‘소들’이 우평(牛坪)에서, ‘강문’[광문]은 강문(江門)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우평’은 우평포[리], ‘강문’은 강문포[리]에서 유래했다.

『조선 지지』(조선 총독부, 1910) 면천군 범천면 포구명 편에는 “독포가 범천면 후경리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범천면[우강면]의 삽교천변 최남단에 있던 독개 포구이다. 범천면 후경리(後鯨里)는 현재 합덕읍 신흥리 후경 마을로 편입되어 있다. 우강면내경리(內鯨里)와 마주보고 있는 인접 마을이다. 독포는 합덕읍 신흥리 독개 포구에서 아산시 선장면 궁평리 나루터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조선 지지』 면천군 합남면 포구명 편에는, “옥금포가 합남면 옥금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합덕읍 옥금리 구양도 다리 밑이다. 신암면 신택리로 건너다니던 나루로 예산 지방으로 가는 길목이다. 1960년대까지도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

남원포에 관한 옛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남원포는 월경지로 원래 아산군 이서면 남원리(南院里) 지역인데, 1910년에 발행된 『조선 지지 자료』에 의하면 “1906년에 면천군에 편입되어 이서면 남원리에 남원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원천에서 최하류에 위치한 포구로, 40여 년 전까지도 인천으로 증기선이 다니던 포구이다. 남원천신평면우강면의 면 경계에 위치하여 실제는 신평면민들이 많이 이용하여 인천이나 서울로 왕래하였다. 필자도 신평면 소재지인 금천리에 거주했는데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매번 인천 갈 때는 망객산 고개를 넘어서 남원포까지 1시간 동안 걸어와서 증기선을 타고 3시간 30분 걸려서 인천에 도착하였다. 우강면민이나 합덕면민들은 더 가까운 부리포에서 인천 가는 배에 주로 승선하였다. 남원천에 토사가 퇴적하여 배가 더 이상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항해할 수 없자 상류의 홍주 북창포는 폐쇄되고 더 넓은 삽교천 변에 가까이 위치한 하류의 남원포가 활성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지지』 면천군 신남면 포구명 편에, “주언포(酒堰浦)[슐원이포]가 면천군 신남면 북창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남면은 신평현 소속의 면으로 현재의 신평면 남부 지역이다. 현재의 홍주 북창포가 있는 중방리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신남면 창리와 통폐합되었다. 『홍주읍지』에 의하면 홍주 북창포를 신평창이라고도 부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창이 창리에 위치하여 아마도 ‘북창리’로 부른 것 같다. 아니면 술원리보가 1960년대까지 신평면 신송리 평리(坪里)[지나들기] 마을에 있었는데, 이곳에 포구가 있어서 지칭했지만 위치를 잘못 기록했을 수도 있다.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남원천 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 면천군 가화면 지역으로서 중방들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중방들[중방평]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의 군면 통폐합에 따라 상중방리, 하중방리, 공수동 일부와 신남면의 창리, 일양리를 병합하여 중방리라 해서 당진시 순성면에 편입되었다.

중방리 가운데 옛 신남면 남원천변 창리(倉里) 지역이 현재의 북창(北倉) 마을이다. 이 북창 마을은 현재 ‘홍주 북창(洪州北倉)’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홍주군 관할의 신남면을 면천군에 편입시키고, 다시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면천군이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옛날 홍주군 관할의 신남면 창리 지역이 면천군 신남면 창리 지역이 되고, 다시 당진군[현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 북창 마을로 바뀌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부터 이곳 남원천 변에 북창(北倉)이 있었고 배가 드나들었으며, 여기에서 ‘북창’이란 마을지명이 생겨났다. 현재 이곳에는 북창 다리(北倉橋), 북창 초등학교(北倉初等學校) 등 북창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다.

『여지도서』에 나오는 홍주읍지 창고 조를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이 보인다. “북창-삼십이간북거칠십리재신남면(北倉-三十二間北距七十里在新南面).” 즉, “홍주에서 북쪽으로 70리 떨어진 신남면에 32간의 홍주 북창이 위치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한말에 나온 또 다른 『홍주읍지』에도 더 자세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즉, “북쪽으로 70리 떨어진 신남면에 홍주 북창이 있는데 관할 면으로는 합남면, 합북면, 신남면, 신북면, 현내면의 5개 면이다. 그리고 환미 553석(石) 4두(斗) 9승(升) 5작(勺)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남면(新南面)은 현재 당진시 신평면 남산리(南山里) 남원천변 일대에 있었다.

『당진군사(唐津郡史)』 사적 조 ‘순성면 중방리’ 편을 보면 “옛날에 홍주 관할에 속했고 40여 년 전에 조세 납입을 위한 대동미 저장 창고가 건설되었고 건물은 현재 퇴락하여 잔존하지 않고, 지명만 현재 홍주 북창(洪州北倉)으로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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