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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영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17
한자 金瓚泳
영어공식명칭 Gim Chanyeong
이칭/별칭 심농(心農)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연표보기 - 김찬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김찬영 서울 법관 양성소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김찬영 대한 제국 영동 지원 판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김찬영 공주 지방 재판소 관할 영동구 재판소에서 판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김찬영 일제 치하의 판사직을 거부하고 면직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김찬영 흥농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김찬영 변호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김찬영 대법원 법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김찬영 탄핵 재판소 재판관 및 헌법 위원회 위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김찬영 대법원 대법관 및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김찬영 대법관 정년 퇴직
몰년 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 김찬영 사망
출생지 김찬영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 지도보기
묘소 김찬영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삼룡동
성격 법조인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경력 대법관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법조인.

[개설]

김찬영(金瓚泳)[1889~1973]은 한말에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판사로 재직하였다. 국권이 일본에 강탈되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재판 과정에서 변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법원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가계]

김찬영의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심농(心農)이다. 아버지는 김종윤(金鍾胤)이고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활동 사항]

김찬영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6년 서울 법관 양성소에 입학한 김찬영은 1908년에 법관 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한 제국 영동(永同) 지원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조선 총독부의 공주 지방 재판소 관할인 영동구 재판소에 판사로 근무하였지만, 1911년 일제 치하의 판사직을 거부하고 면직되었다.

김찬영은 일제 강점기 동안 안재홍, 정인보, 신채호 등과 민족주의 사상 고양에 힘을 다하였다. 1921년 조선 변호사 협회 창립총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고, 1921년에는 ‘흥농회(興農會)’를 조직하였다. 흥농회는 농사에 관한 연구 조사와 농업 증진 발전을 도모하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또한 1927년부터 조선 공산당 사건을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김찬영은 해방 후인 1946년 대법원 법관에 임명되었고, 1951년 탄핵 재판소 재판관과 헌법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52년 대법원 대법관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대법관을 정년 퇴직한 김찬영은 성균관 부관장에 선출되어 유학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 기념 사업회와 곽재우 기념 사업회 고문, 한국 종교 협의회 고문, 국악원 고문, 대한 변호사회 회장, 충남 향우회 회장, 5월 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찬영은 1973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김찬영이 사망하자 장례는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러졌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삼룡동에 김찬영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김찬영의 묘비는 1990년에 세웠는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념 사업회 회장인 김석원(金錫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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