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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67
한자 南陽洪氏
영어공식명칭 Namyang Hongsi|Namyang H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남양(南陽) -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입향지 남양홍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남양홍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
묘소|세장지 남양홍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
성씨 시조 홍은열(洪殷悅)
입향 시조 홍박연(洪博淵)

[정의]

홍은열이 시조이고 홍박연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남양홍씨(南陽洪氏)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입향 배경은 인조 때 반정 공신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1572~1645]이 초락도를 사패지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18세기 말, 홍박연(洪博淵)과 형제들이 입향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거지가 되었다. 남양홍씨는 당진 지역의 중요한 성씨다.

[연원]

남양홍씨는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洪天河)를 선시조(先始祖)로 모시고 있다. 홍선하는 삼국 통일 이후 신라 태자(太子)의 태사(太師)가 되었고,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다. 하지만 계통이 불명확하여 남양홍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 공신인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다. 당성은 나중에 남양으로 바뀌었고, 250여 년이 지난 뒤에 홍규(洪奎)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남양 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지면서 당성 홍씨가 남양홍씨로 바뀌게 되었다.

남양홍씨는 본관만을 두고 볼 때 매우 특이한 성씨이다. 홍은열을 시조로 하는 ‘당홍계(唐洪系)’와 고려 고종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토홍계(土洪系)’가 있기 때문이다. 당진 지역에는 토홍계 남양홍씨도 일부 거주하지만, 대부분은 석문면을 위주로 당홍계 남양홍씨 집안이 거주하고 있다.

[입향 경위]

남양홍씨석문면 초락도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배경은 조선 후기의 문신 홍서봉이 인조반정의 공신전으로 석문면 초락도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후손 가운데 6대손인 홍박연이 초락도에 입향하였다. 입향 경위는 알 수 없으나 홍박연이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시기는 18세기 말 정조 때로 추정된다. 홍박연이 정착하자, 홍박연의 형제들도 점차 낙향하여 자연스럽게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현황]

입향조 홍박연은 섬 주민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돌다리를 놓았다. 섬과 육지 사이 약 500m 개펄에 큰 돌을 운반하여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이로써 개펄이 드러나는 간조기에 주민들이 신을 신고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 돌길을 ‘유두’라고 불렀다. 하지만 바닷물이 들어오면 다시 나룻배를 타고 왕래하였다.

홍박연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다. 그중 셋째 아들이 홍병필(洪秉弼)인데 학문도 뛰어났지만 상당히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고 한다. 홍병필은 평소 초락도에서 현재의 삼봉 초등학교 쪽을 지나 교로리까지 해변을 따라 말을 달리곤 하였는데, 어느 날 세미(稅米)를 실은 배 한 척이 심한 풍랑에 교로리 쪽으로 떠밀려 오자 이를 발견한 홍병필은 관아에 알리지 않고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당진 현감에게 고초를 겪었으나, 그해 농사를 지어 조세미를 모두 갚았다.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홍병필의 선행에 감복하고 오래도록 칭송하였다고 한다.

초락도는 1960년대 중반에 간척 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1984년 대호 방조제가 준공된 이후, 이제 바닷물은 초락도에 이르지 못한다. 초락도 주변에 펼쳐 있던 개펄은 모두 평야 지대로 바뀌었다. 초락도는 평야 지대 속의 섬이 되었다. 한편, 초락도의 남양홍씨는 해방 전후에는 총 100여 호 가운데 40호 정도에 이르렀다.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고 현재는 20호 정도만 남아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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