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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96
한자 大村里密陽孫氏世居地
영어공식명칭 Ancestral Village of Milyang Son Clan in Daechon-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에 있는 밀양손씨 세거지.

[개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통일신라 흥덕왕[826~835] 때의 효자인 손순(孫順)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손순은 신라 개국 당시 사로 6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 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31세손이다. 구례마는 32년(유리왕 9) 6촌장에게 성을 내릴 때 손성(孫姓)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손씨(孫氏)가 시작되었다.

손순은 신라 때 나라에서 인정받아 칭송받을 만큼 유명한 효자였다. 손순은 일찍이 아내와 함께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어린 아들이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어머니의 굶주림을 가슴 아프게 여기던 손순손순의 아내는 아이를 땅에 파묻게 되었다. 이들이 땅을 파는 순간 석종(石鐘)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들은 흥덕왕손순에게 집과 쌀을 하사하였으며 월성군(月城君)에 봉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손순의 효행은 손씨 가문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손익감(孫翼減)은 손순의 손자인데, 신라 때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응천(凝川)’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손익감 덕분에 밀양(密陽)이라는 본관을 갖게 되었다.

밀양손씨가 세력을 갖게 된 것은 고려 초 태조 왕건의 개국 공신인 손긍훈(孫兢訓)에 의해서다. 손긍훈은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었고 광리군(廣理君)에 올랐다. 936년(태조 19)에 왕식렴 등과 함께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을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때부터 밀양손씨는 고려 시대 문벌 귀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밀양손씨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가장 대중적인 인물은 19세기 말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1861~1922]를 들 수 있다. 손병희는 동학 농민 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북접을 이끌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또한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고, 일제 강점기 국내 민족 운동의 구심체로 발전시켰다. 역사적인 1919년 3·1 운동도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족 운동이었다. 그 외에 역사학자 손진태(孫晋泰)[1900~?], 손기정(孫基禎)[1912~2002] 등을 들 수 있다.

[명칭 유래]

밀양손씨 세거지는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 2구 ‘개정 한천(蓋井寒泉)’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에 샘이 있고 샘 위에 돌을 다듬어 뚜껑을 덮었다고 하여 ‘개정’이다. 샘물은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차갑고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한천’이라 하였다.

밀양손씨들은 이 샘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기에 이 마을을 ‘한천동’이라 부른다. 또한 ‘한천동’ 안쪽에 있는 마을은 ‘안갯말’이라 부른다. 그리고 ‘한천동’ 바로 위에 ‘강당골’이 있다. 강당골은 밀양손씨의 어린 자제들을 교육하던 강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와 같이 ‘한천동’을 중심으로 ‘안갯말’, ‘강당골’은 밀양손씨 세거지의 근본을 형성하는 자연 마을이다.

[형성 및 변천]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밀양손씨 세거지는 손순의 30세손 손윤생(孫潤生)에서 비롯되었다. 자는 신지(身之), 호는 명천(明泉)이다. 세조가 왕이 될 때 도만호(都萬戶)로서 공을 세워 3등 원종공신(元宗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청 관찰사(忠淸觀察使)가 되었다. 손윤생은 관찰사 재임 시 당진포진성을 순시하면서 고대면 대촌리 한천동을 지나게 되었다.

손윤생은 한천동의 맑고 찬 샘물에 감동한 나머지, 여생을 이곳에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한천동의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났고, 바다로 흘러갔다. 손윤생은 한천동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명천이라 하면서 한가롭게 소요하였다. 그 후 500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이 번성하고 세거지를 이룬 것이다. 손윤생의 후손들을 ‘명천공파(明泉公派)’라고 한다.

명천공의 11세손 손경(孫璟)은 ‘의추재(依楸齋)’를 1896년 선영 옆에 건립하여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겸하게 하였다. 즉, 밀양손씨의 어린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시설물이면서 동시에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광복 이후 후손들은 의추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으며 교육은 폐지하고 사우(祠宇)로서의 역할만 하도록 조치하였다.

[자연환경]

고대면 대촌리 한천동고대면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당진시의 중심에서 보면 서부 지역이다. 고산봉 줄기가 영랑사가 있는 영파산으로 가는 줄기에 해당한다. 한천동의 남쪽은 영랑사를 거쳐 채운포를 지나 당진으로 나간다. 한천동의 북서쪽은 고산 봉수를 지나 당진포진성으로 올라간다. 한천동의 북쪽은 전답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예전에는 개펄이었다. 한천동의 맑은 물이 밭과 논을 적시고 바다로 들어갔다.

[현황]

고대면밀양손씨는 긴 연륜에 걸맞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당진시와 고대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선 손건학(孫建學)[1906~1969]은 고대면 소방 대장으로 유명했고, 손기빈(孫炁彬)[1870~1936]은 한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손낙범(孫洛範)[1911~1984]은 경성 제국 대학을 졸업한 국문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손낙성(孫洛成)[1909~1990]은 교육자로 고성 강습소[고산 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손영세(孫榮世)[1914~1950]는 고대 초등학교 교장 재직 시에 한국 전쟁을 당하였다. 손영세는 "태극기를 잘 보존하라."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1984년 8월 15일 ‘순국 반공 고 손영세 교장 선생님 위령비’가 고대 초등학교 교정에 건립되었다. 또한 한말 의병장이었던 손응현(孫應鉉)[1880~1950], 당진시 합덕읍 신리 출신으로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孫慈善)[1844~1866]도 밀양손씨 명천공파다.

밀양손씨고대면 대촌리 2구와 진관리 2구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1970년대만 하여도 대촌리 2구 총 124가구 중 94가구가 밀양손씨였다. 진관리 2구도 전체 가구의 80% 이상이 밀양손씨이다. 밀양손씨 명천공파 종중에서는 현재 당진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을 대략 290호, 6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한때는 1,000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농 현상으로 인하여 급격히 감소하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밀양손씨 명천공파는 당진의 대성(大姓)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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