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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502
한자 扶安金氏
영어공식명칭 Buan Gimsi|Buan G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부안(扶安) - 전라북도 부안군
입향지 부안김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두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부안김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두산리
묘소|세장지 부안김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두산리
성씨 시조 김일(金鎰)
입향 시조 김선(金瑄)

[정의]

김일이 시조이고 김선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 태자 김일(金鎰)[?~?]이다. 본격적인 가문의 발전은 4세손 김경수(金景修), 9세손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1211~1278]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대호지면 두산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인물은 20세손 김선(金瑄)[?~?]이다. 김선의 아들인 한성 판윤 김봉수(金鳳壽)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서당을 중심으로 학문을 보급하고 후손들을 양성하였다. 그 후 가문은 계속 번창하여 500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부안김씨 대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연원]

부안김씨의 시조는 경순왕의 맏아들인 마의 태자 김일이다. 또한 부안김씨를 빛낸 인물은 시조의 9세손 김구이다. 김구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인 1222년(고종 9) 성균 진사에 올라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스물두 살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을 시작하였다. 1263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 참문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신종, 희종, 강종, 및 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당시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에 외교의 일도 잘 처리하였다. 원나라에 갔을 때에 『북정록(北征錄)』을 남겼고 저서로는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특히 김구는 제주 판관에 재직 중 민생 안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제주도의 돌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도처에 깔려 있는 돌을 정리하여 논밭의 경계에 쌓아 야생 동물의 침입을 막는 데 이용하였고, 집집마다 울타리를 만들어 바람을 막게 하였다. 그러한 김구의 공적을 기록한 '돌 문화의 은인, 판관 김구 선생 공덕비(判官金坵先生功德碑)'가 제주 민속 박물관에 있다. 1991년 6월 제주 민속 박물관장 진성기(秦聖麒)가 글을 짓고 후손인 김세길(金世吉)이 비명(碑銘)을 썼다.

그 후 김일의 14세손으로 중랑장을 지낸 김인정(金仁鼎)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에 의하여 부안김씨는 주요한 분파가 이루어졌다. 맏아들인 소윤공(少尹公) 김세영(金世英)의 후손을 소윤공파, 둘째 아들인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의 후손을 군사공파, 셋째 아들인 소감공(少監公) 김광신(金光信)의 후손을 소감공파라 한다. 김인정의 아우인 김신정(金信鼎)의 후손은 시승공(侍承公)파라고 부른다. 그 외에 몇 개의 분파가 더 이루어져 지금은 10여 개의 소파가 형성되어 있다.

부안김씨는 시조 김일의 생존 시기인 10세기에서부터 현재까지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간직하면서 대대로 많은 학자와 충신, 열사를 배출하여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문과 급제자만 고려 때 10명, 조선 때 31명 등 41명에 이르고, 무과 급제자는 55명, 생원 진사 등 사마시 합격자도 105명에 이르며, 문집을 남긴 학자도 19명에 달한다.

[입향 경위]

대호지면 두산리부안 김씨 당진 입향조는 20세손 김선이다. 고려 말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낸 김광신의 직계 후손이라 두릉골 부안김씨는 모두 소감공파이다. 김선의 고향은 부령현(扶寧縣)[현 전라북도 부안군] 선학동(仙鶴洞)이다. 김선은 1483년(성종 14년) 식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곧바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하지만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한 후 성균관의 학생을 내쫓고 유흥장을 만드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벼슬에 나가기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충청도 면천군 정계면 유곡동[현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의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선은 유곡동에 정착한 후 인근 지역에 나들이를 나섰다가 대호지면 두릉골[두산리]에 들르게 되었고, 낙후된 민중의 생활상을 접하였다. 김선은 군주의 폭정과 조정의 혼란상을 경험 삼아, 나라가 바로 설려면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이곳에서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두릉골에 서당을 세우고 무지한 주민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두릉골에 부안김씨의 집성촌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다.

김선은 아들 셋을 두었다. 맏아들은 순성에 남아서 살다가 손자 대에 가족을 거느리고 송도로 이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둘째 아들 김봉수(金鳳壽)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를 역임한 후 한성 판윤이 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져 백성들의 분노가 쌓이고 중종반정의 기운이 감돌던 때라 김선은 아들의 신변이 걱정되어서 관직을 사임하고 두릉골에 내려와 자신의 서당을 이어 받기를 원하였다. 결국 김봉수는 한성 판윤을 사직하고 두릉골로 낙향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진 양성과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이후 두산리 부안 김씨는 날로 번창하게 되어 자체 내의 소파가 형성되었는데, 현재 4개 파를 이루고 있다. 김봉수의 맏아들인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同知中樞府事) 김윤(金胤)의 후손인 사간공파(司諫公派), 그리고 첨정공파(僉正公派)와 둘째 아들인 호조 좌랑(戶曹佐郞) 김연(金衍)의 후손인 사헌공파(司憲公派), 참의공파(叅議公派)이다.

두산리 부안김씨는 주로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유학을 보급하면서 지역 지도 세력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경제 생활은 광대한 농경지가 형성되지 않은 관계로 중소 지주이거나 자경을 하여 자급자족하는 경제 구조를 유지하였다. 결국 부호도 없고 빈한한 사람도 없이 대부분 안정된 경제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무술 연마에 열중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두산리[두릉골] 부안김씨는 대호지면 두산 1리, 2리를 중심으로 장정리까지 거주하고 있는데 『대호지면지』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두산 1리에 53호, 두산 2리에 40호, 그리고 장정리에 20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관련 유적]

부안김씨 문중에서 선조에게 제향을 받드는 사우(祠宇)는 두 곳이다. 하나는 ‘경성재(敬誠齋)’이고 또 하나는 ‘계지재(繼止齋)’이다. 경성재는 부안김씨 입향조인 김선과 아버지 김윤려(金潤礪), 그리고 김선의 아들인 김봉수 등 3위를 배향하고 봉사하는 재실이다. 경성재는 관향인 부안에서 중시조 김구의 제향을 지내는 재실인 경지재(敬止齋)에서 '경(敬)' 자를 따고 두산리 부안 김씨 소감공파의 파조인 김광신의 제향을 올리기 위한 재실인 치성재(致誠齋)에서 '성(誠)'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재실의 정문은 계선문(繼先門)이다.

경성재는 대호지면 두산 2리 도매기[都會幕] 마을의 북쪽 산기슭에 있다. 두산 2리에서 도이리로 넘어가기 직전에 삼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주치는 산깃 마을이 도매기 마을이다. 경성재는 2001년에 착공하고 2002년 봄에 준공하였다. 입향조 김선의 묘는 원래 입향지인 정계면 유곡동[현 순성면 성북리 산 10]에 있었는데 2000년 3월 8일에 이곳으로 옮겼다.

계지재는 부안김씨 24세손인 부호군(副護軍) 김해(金海)의 후손들이 자신의 선조인 김해를 비롯하여 김해의 둘째 아들인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 김효증(金孝曾), 32세손인 선략장군 사과(宣略將軍司果) 김현식(金賢植)에 이르는 9위를 모시고 봉사하는 재실이다. 계지재의 ‘계지(繼止)’는 후손들의 번성과 영광이 그침이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선조들의 소망과 평소에 “자기의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지지(知止)”의 덕목을 중히 여겼던 중시조 김구의 유훈(遺訓)을 받들고자 한 것이다.

김구는 일찍이 중서시랑평장사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고향 선학동(仙鶴洞)으로 돌아가서 인근 변산포(邊山浦)에 새로운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이곳을 ‘지지포(知止浦)’라 이름지었다. 또한 자신의 호도 지지포와 같은 뜻인 지포(止浦)로 부르면서 이 지지의 덕목을 훈육의 지표로 삼고 무언 실천으로 후학을 가르쳐 깨우치게 한 바 있었다. 결국 ‘계지’는 이러한 김구의 정신을 대대손손 계승시켜 나간다는 후손들의 의지를 함께 담은 재실 이름이라 한다. 계지재는 대호지면 두산 1리 구티 마을에 있다. 제향일은 음력 초5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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