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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육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529
한자 近代敎育
영어공식명칭 Modern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진행된 근대적 교육.

[개설]

개항 이후 근대화 물결의 도래와 함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도 신학(新學)이 수용되었다. 비록 충청도의 서북단의 벽지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신문물이 전래되었다. 근대 교육의 수용은 여러 형태의 학교를 곳곳에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학교는 주로 근대화에 개명한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하여 사립의 형태로 세워졌고, 천주교 성당에서도 선교 차원의 학교를 세웠다. 특히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그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립 학교는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설립의 주체는 민족주의 운동가들이었다.

[현황]

개화기 당진 지역에는 관학(官學)은 없었고 다만 의식 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사립 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의 주체로는 각 마을에 형성되어 있던 문중, 근대 지식인, 종교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문중에서는 고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종중과 인근 마을의 어린이를 교육했다. 이들은 유학의 경전을 교재로 사용했고, 사승 관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학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유학을 교육하던 사숙으로 주목되는 곳은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던 도호의숙(桃湖義塾)정미면 수당리에 있던 정재학(鄭在學)의 서당이다.

당진 교육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움직임은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에서도 이루어졌다. 주인공은 운양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었다. 그는 1881년 영선사로 청의 텐진에 파견되었을 정도로 정가의 유력한 인물이었으나 권력에서 배척되어 1887년에서 1894년까지의 7년간 이곳에 유배 왔다. 그가 이곳에서 작성한 『속음청사』라는 일기를 보면 당시 면천 지역의 사회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면천 지역의 주요 인물과 빈번히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읍 고대리오곡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광주 안씨안종화였다. 안종화(安鍾和)[1860~1924]는 1894년 조선 시대 마지막 과거 시험인 식년시에 3등으로 급제하여 궁내부 낭관에 올랐다. 그가 34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기까지는 김윤식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안종화는 18세의 이른 나이에 『동사 절요』라는 역사서를 저술할 정도로 풍부한 식견을 소유하고 있었다. 안종화의 관력은 두어 달에 불과할 정도로 짧지만 1905년 정2품 가선대부에 오를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은 가속화되었고 조병세, 장지연 등과 함께 을사늑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묵살되자, 근대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안종화는 교육과 언론, 학생을 위한 각종 교과서 집필과 근대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역사서 저술 등 국학 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는 휘문의숙의 4대 숙장을 지냈으며, 『초등대한지』, 『초등본국역사』 등 1907년부터 1910년까지 8권의 교과서를 썼다. 1909년에 간행한 『국조인물지』는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서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안종화는 한말에 설립된 대한 자강회와 기호 흥학회에 활발하게 참여했고 회보를 발행할 때마다 논설을 게재하여 근대 교육과 근대 의식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기호 흥학회의 창립 회원에 안만수와 같이 송악면광주 안씨들이 참여한 것은 그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내용]

개화기 당진 지역에 세워진 근대 학교로는 매괴 학교(玫瑰學校), 당성 학교(唐城學校), 통명 학교(通明學校), 면양 학교(沔陽學校), 남산가숙(南山家塾), 미산 학교(嵋山學校) 등이 있다.

매괴 학교는 당진 지역 천주교에서 설립한 학교로 크렘프(Kremff, 慶元善) 신부가 합덕 성당에 세웠다. 개교일은 1908년 6월 14일이다. 당시 『경향 신문』에는 매괴 학교의 개교식을 보도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과 긴요한 학문이 무엇인가를 크게 강조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매괴 학교의 설립 목적이 교육을 통해서 문맹 퇴치와 애국심을 앙양하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매괴 학교는 설립기의 취지를 계승하여 종교 교육보다는 일반 교양 교육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종교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비신자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입학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성당 측에서는 교인의 증대를 위하여 1908년부터 도덕과 종교에 대한 강의를 시도하였고 학생들의 냉담함에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때 교육한 일반 과목은 국어·산수·체조·음악 등이었다. 그 후 매괴 학교합덕 성당의 지원 속에서 1910년 8명의 수료자를 배출할 수 있었고, 1920년대 중반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당성 학교(唐城學校)는 1908년경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에 세워진 사립 학교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당성 학교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08년에 발행된 『충청남도 도세일반』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조선신사보감』과 『당진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 학적부』를 참고해 볼 때 당진 읍내에 세워진 한말의 대표적인 사립 학교로 여겨진다.

또한 면천군 성상리에 있던 면양 학교(沔陽學校)의 설립자는 면천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면천군수 박지양(朴芝陽), 면천 향교 도유사(都有司) 허용(許溶), 유지계장(維持稧長) 이두영(李斗榮), 평의원 유석록(柳錫錄), 김동욱(金東旭) 등이었다. 면양 학교는 1908년 4월 5일에 설립되었고 1908년 9월 1일 개교했다. 초대 원장은 이두영이었다. 교사는 면천 향교 유지계 총무 안인식(安寅植), 동계 평의원 이돈순(李敎淳)이 재직하였고, 교과목은 한문·조선어·수신·지리·역사 등이었다.

미산 학교(嵋山學校)는 1907년 당시 면천군수로 있던 박지양이 면천의 유지들과 협의하여 설립한 근대 학교이다. 처음에는 면천의 유지들이 설립 자금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참여 유지로는 동화 200원을 기부한 박지양을 중심으로 오복선(吳復善)·유석록(柳錫祿)·남진희(南震熙)·강인기(姜仁基)·김동욱(金東旭)·이교성(李敎性)·신흥교(辛興敎)·강노술(姜魯述)·구연표(具然彪)·이종상(李鍾祥)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한문교사로 홍경유(洪慶裕), 일어교사로 홍종관(洪鍾寬)을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증언에 의하면 오복선은 당시 면천에 귀양을 왔던 김윤식에게서 한학을 사사받았고 1907년 면천 향교 도유사로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남산가숙은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자개리 남산에 있었는데 문종구(文鍾龜)가 1896년 설립하여 4~5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학교는 불과 2년 정도 경과 후 1898년에 폐교되었다고 전한다.

[의의]

개화기 당진 지역의 근대 교육은 전통적인 유림 계층과 근대 문물을 접한 근대 지식인, 천주교로 대표되는 종교계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권 피탈에 직면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고 국권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한말의 의병 활동이 당진과 면천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근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이 당진과 면천 지역에서도 꾸준히 전개되었음은 근대 교육의 형성과도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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