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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02
한자 驛院
영어공식명칭 Station and Inn for Government Official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학로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주요 역로에 세워졌던 조선 시대 국영 교통, 통신 및 관원들을 위한 숙박 시설.

[역]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 및 외국 사신의 왕래 숙박, 말을 공급하여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한 기관이며, 교통로를 따라서 30리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각 역에는 역장, 역리, 역졸, 역정, 노비 등이 있어서 역무를 수행하고 또 여러 명목의 역둔토(驛屯土)가 지급되어 역의 경비와 역원의 생활비로 융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토(驛土)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역의 규모 및 역민의 수와 비례하였다. 역은 대역, 중역, 소역 등으로 나뉘어 차등 지급되었는데 대역은 300~400결, 중역은 200~300결, 소역은 100~200결 정도를 받았다. 역민들은 직무에 동원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역토의 생산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조정은 역민이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대부분의 역민들은 생계를 전적으로 토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토지를 집약적으로 이용하고 벼, 보리, 조, 콩, 수수, 채소를 심었고 일부에서는 황금 작물로 목화와 삼을 재배하였다.

역(驛)은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성종 대에 더욱 구체화되었고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만들어졌다. 1390년(공양왕 2) 에 중앙의 외방 지역 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관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승제(驛丞制)를 조준(趙浚) 등 개국 공신들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충청도에는 6도 71역이 있었는데, 현재의 당진에 속하는 역으로 순성역과 홍세역 등이 있다.

[원]

원(院)은 공무로 지방에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 시설로, 역과 역 사이에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했던 국가 경영의 여관이다.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공민왕 때 이미 그 경비를 위해 원위전(院位田)을 마련했지만, 조선 초부터 확실하게 정비되었다.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각 도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승려를 주인으로 하여 원(院) 부근에 절이 있기도 했으며, 세종(世宗) 때는 부근 주민 중에서 주인을 선발하여 관리하게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개경과 가까운 곳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자 인명과 통과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을 세운 듯한 일도 있다.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으나, 실제로는 소홀함으로 인해 일찍 없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원은 18세기 이전에 혁파되어 여점, 야참, 점막, 주막 등으로 불리는 상업적인 전문 숙박 업소로 대치되었다.

[당진의 역]

면천과 당진 관할의 역으로 순성역과 흥제역, 대호역, 고역이 있었고, 원으로는 동제원과 통포원이 있었다. 순성역순성면 양유리 역말에 있었는데 구화역이라고도 부른다. 『면천읍지』에 보면, "순성역에는 말 14필, 역리 20명, 노(奴) 15명, 비(婢) 1명이 있었으며, 금정역에 속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순성역에 관해서는 이행 등이 1531년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 역원 조에 보면 "순성역은 군의 동쪽 4리에 있고 동제원은 군의 동쪽 5리에 있다."라고 하여 면천군이 관할하였던 순성역과 동제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순성역 주변에 동제원이라는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제원에 대한 기록은 이후에 발간된 『대동지지』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흥세역순성역에 비해 규모가 작았는데 위치는 용연동에 있었다. 흥세역에는 기마(騎馬)가 4필, 짐 싣는 복마(卜馬)가 4필, 역리가 17명, 노(奴) 2명, 비(婢) 2명이 있었고, 금정역에 속해 있었다. 대호역은 합덕읍 대합덕리 역대라는 마을에 있었다. 조선 세종 때까지 역이 있었는데 순성역과 합쳐졌다. 고역은 신평면 부수리의 부수골 동남쪽에 있었다. 조선 시대 홍주의 월경지로 역의 기능을 했는데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통포원은 신평면 신흥리의 원절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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