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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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以文俱樂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대 초기 - 이문 구락부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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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20년대 중반 - 이문 구락부 해체 |
최초 설립지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
성격 | 청년 단체 |
[정의]
1920년대초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단체.
[개설]
1919년 3·1 운동의 결과 전국적으로 청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었다. 청년들은 각 지역의 유지와 지식인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은 어린이와 주민에게 신문화를 알려주고 문맹을 퇴치하며 근대 의식을 주입하는 데 노력하였다. 1920년대 초기, 충청남도 당진에서 설립된 이문 구락부(以文俱樂部)도 대표적인 청년 단체였다. 이 단체는 야학과 강습소 설립, 각종 재난 구제 활동 등 실력 양성 운동에 입각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억압에 맞서 구체적인 항쟁을 전개한 혁신 청년 단체로 성장하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
[설립 목적]
이문 구락부는 1920년대 초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청년 단체 중 가장 먼저 등장한 단체였다. 이문 구락부는 주민 교육을 위한 야학의 설립, 보통학교 수준의 강습소 설립, 각종 재난 구제 활동, 강연과 계몽을 통한 근대 의식의 고취 등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변천]
『동아 일보』 1923년 10월 7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문 구락부가 총회를 열어 각종 업무를 논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이를 고려하면 이문 구락부는 1920년대 초기 결성된 청년 단체로 추정되며, 해체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결성된 혁신 청년 단체의 등장과 함께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조직과 회원 현황]
이문구락부의 조직은 부장과 간사, 서기와 평의원 약간 명을 두었다. 부장은 당시 당진읍장인 이춘세(李春世)였고, 간사는 고준식(高準植), 서기는 유진원(兪鎭遠)·박상열(朴商烈), 평의원은 고인환(高麟煥)·오추전(吳湫鈿)·홍종관(洪鍾寬)·김홍기(金弘基)·박제○(朴濟○)이었다. 이춘세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당진면장을 지냈고, 당진에서 결성된 각종 단체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1923년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의 당진군 대회에서는 당진의 유지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어서 민립 대학 지방부의 당진 지역 집행 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유진원은 해방 이후 당진면장을 지낸 인물이고 고준식은 소비조합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홍종관은 1919년 창설된 당진 금융 조합의 조합장을 지냈으며 1924년 충청남도 평의회에 당진군 대표로 선출되었다. 홍종관은 1929년에 창립된 신간회 당진 지회장을 역임하였다. 나아가 당진면장[1932~1935]에 재직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문 구락부는 당진 지역의 면장·상공인·지식인·지주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문 구락부의 주요 활동내용은 우선 어린이 교육이다. 당시 당진 지역의 교육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공교육은 1911년에 세워진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 1913년에 세워진 당진 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뿐이었다. 학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청소년은 지극히 많았다. 이문 구락부에서는 부족한 학교를 대신하여 학원이나 강습소를 세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 이춘세가 원장인 당성 학원이 대표적인 학원이었다. 이춘세는 당진 향교 명륜당에 세운 당성 학원을 경영하기 위해 충남도 당국에 호소하여 보조금을 끌어오고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기부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이들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도 많은 참여를 하였다. 1923년 초 당진 지역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발기인 총회에 지역 유지 약 40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회장에는 홍종관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회원에는 이문 구락부 회원 대부분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각종 재난이 당진 지역에 닥쳤을 때, 의연금을 납부하고 주민들을 구제하는 일도 이문 구락부 회원들 몫이었다. 이들은 조선 일보 당진 지국, 동아 일보 당진 지국 등의 언론사를 활용하여 각종 기금을 모았고, 스스로도 많은 의연금을 출연했다.
이문 구락부는 경제 운동에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0년대 물산 장려 운동이 당진 지역에 확산되었을 때, 이들은 당진 소비조합을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고준식·이인세·홍종관·이춘세·이홍세·심완택·유진영 등 이십여 명이 참여하였다. 조합장은 이문 구락부 회원이면서 당진면장인 이춘세가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이문 구락부는 1920년대 초기 당진 지역 민중 운동을 이끌던 대표적인 청년 단체였다.
[의의와 평가]
이문 구락부는 당진면장과 후일에 면장이 되는 인물들, 그리고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 지국장과 지식인, 재력가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이문 구락부의 활동은 지방 유지 친목 모임의 성격에 한정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교육과 자선 활동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근대 의식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였고, 교육받은 청소년들은 1920년대 중후반보다 적극적인 청년 운동을 전개하는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문 구락부는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의 근원을 제공한 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