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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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津靑年會 |
영어공식명칭 | Danjin Young Adult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설립 시기/일시 | 1925년 8월 9일 - 당진 청년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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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0년대 초기 - 당진 청년회 해체 |
최초 설립지 | 당진 청년회 설립지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
성격 | 민족 운동 단체 |
설립자 | 홍종관|신태순|김남제|고인환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설립된 청년 단체.
[개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면서 당진 청년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노동자와 농민 해방을 강조하는 혁신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 당진 청년회는 1925년 당진 읍내에서 지역 유지층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1927년 신간회 당진 지회, 1928년 당진 청년 동맹을 통해 혁신 청년 단체와 통합하였고 더욱 적극적인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배경]
청년 운동은 1920년대 들면서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1 운동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각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한국 청년들에게 더욱 적극적인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이념으로 무장된 각종 청년 단체를 조직하였고 실력 양성 운동과 함께 지역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청년 운동은 1920년대 초기부터 전개되었다. 이들은 부인 및 문맹 아동에 대한 교육과 야학 운동을 전개하는 교육 운동, 각종 강연회 개최를 통한 의식 계발 운동, 금주와 금연을 통한 절제 운동, 공립 학교를 유치하여 공교육의 확대를 위한 학교 설립 운동, 학교 체육의 활성화와 예술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청년 운동의 주체는 지역 유지, 면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관료층, 대토지를 소유한 부유층, 각 신문사의 지국장과 기자, 천도교와 개신교의 종교인 등이었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 청년 운동의 대표적 단체가 당진 청년회였다. 당진 청년회는 1925년 8월 9일 당진 지역 유지인 홍종관·신태순·김남제·고인환 등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당진 읍내리에 있던 당진 회관에서 설립된 당진 청년회는 ①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마음을 합하여 단결을 지을 것, ② 우리는 허영에 들뜨지 말고 시대적 인물이 될 것, ③ 우리는 용감한 청년이 되어 문화 운동의 일꾼이 될 것 등을 3대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20년대 초기에 전개되었던 문화 진흥, 실력 양상을 강조하던 활동 방침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에 활발하게 조직되던 혁신 청년회와도 구분되고 있다. 당진 지역의 경우, 혁신 청년회는 합덕과 우강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곳은 광활한 평야 지대가 발달한 곳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농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반면, 당진 읍내는 지역 유지층을 위주로 온건적이며 보수적인 청년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보수 단체가 당진 청년회였다.
[결과]
1927년경 서울을 중심으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신간회가 대표적인 좌우 합작 단체였다. 당진 청년회를 비롯한 당진 지역 내 각 청년 단체들도 통합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특히 합덕과 우강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혁신 청년 단체인 신합 청년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통합의 길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27년 12월 6일, 신간회 당진 지회가 당진 읍내리에 있던 당진 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이어서 1928년 1월 28일, 같은 장소에서 당진 청년 동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통일된 협의체로서 더욱 조직적이고도 적극적인 대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 운동은 신간회가 해소되던 1930년대 초기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진 청년회는 1920년대 당진 지역의 각종 사회 운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당진 청년회는 낙후된 당진 지역의 교육과 경제, 체육과 예술 등 많은 부분에서 민중 의식을 고취시키는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지역 유지층이었기에 혁신적인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신간회 당진 지회와 당진 청년 동맹의 설립으로 극복되었고 더욱 적극적인 대중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