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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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受泰 |
영어공식명칭 | Bak Sutae |
이칭/별칭 | 박응래(朴應來),상운(祥雲),향은(鄕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박수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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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4년 - 박수태 사망 |
출생지 | 박수태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74 |
거주|이주지 | 박수태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74 |
묘소|단소 | 박수태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64-4 |
사당|배향지 | 박수태 효행비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74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밀양(密陽)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효자.
[개설]
박수태(朴受泰)[1870~1944]는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효자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양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가계]
박수태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처음 이름은 박응래(朴應來), 자는 상운(祥雲), 호는 향은(鄕隱)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司諫) 박항신(朴恒臣)이고,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창원 황씨(昌原黃氏)다.
[활동 사항]
박수태는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74번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 큰아버지에게 의탁하다가 열다섯 살 때 박항신(朴恒臣)의 양자로 들어갔다. 박수태는 매우 근면 성실하였고 주경야독에 힘써 가산(家産)을 크게 일으켰다. 그 후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안 식구들의 양육은 물론 각종 채무까지 변제해 주었다.
1906년 10월에 아버지 박항신 중병에 걸리자, 박수태는 온갖 약을 구입하여 아버지의 치료에 전념하였다. 특히 아버지 보양을 위한 고기를 구입하기 위해 한내장[大川場][예산군 고덕면]을 거의 매일 왕복했다고 한다. 박수태는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하자 손가락을 찢고 피를 먹여 3일간 더 연명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간 초려(草廬)에 거주하며 애도하였다.
[묘소]
박수태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 164-4번지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9년 6월 27일, 성균관에서 박수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표창장[제122호]을 추서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1981년 10월에 마을 사람들이 박수태가 살던 집터에 ‘향은 처사 박공 수태 효행비(鄕隱處士朴公受泰孝行碑)’라는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이숭령(李崇寜)이 짓고, 조병호(趙炳鎬)가 두전(頭篆)을 썼으며, 송원빈(宋元彬)이 비문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