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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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快仁 |
영어공식명칭 | Bak Kwae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5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박쾌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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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박쾌인 3·1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박쾌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박쾌인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박쾌인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54 |
거주|이주지 | 박쾌인 거주지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54 |
묘소 | 박쾌인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154-62번지[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밀양(密陽)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쾌인(朴快仁)[1898~1950]은 1919년 서울 경성 고등 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박쾌인은 일제 경찰에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9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이후 귀향하여 당진 향교 명륜당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가계]
박쾌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활동 사항]
박쾌인은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54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경성 고등 보통학교[현 경기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중,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탑골 공원에서의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군중과 함께 공원 밖으로 나와 종로, 숭례문, 대한문 등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벌였다.
박쾌인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20년 2월 27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박쾌인은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당진으로 귀향하여 당진 객사(唐津客舍)가 있던 현재의 당진 성당 자리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당진 향교 명륜당으로 이동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묘소]
박쾌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154-62번지 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쾌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10월 2일에는 경기 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