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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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崔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Choesi|Gyeongju Cho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본관 | 경주(慶州)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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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주최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 고잔 마을 |
세거|집성지 | 경주최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탄우마을 |
묘소|세장지 | 경주최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탄우마을 |
성씨 시조 | 최치원(崔致遠) |
입향 시조 | 최기선(崔己宣) |
[정의]
최치원이 시조이고 최기선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최씨(慶州崔씨)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탄우 마을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당진 입향조는 최치원의 24세손 최기선(崔己宣)[?~?]이다. 최기선은 18세기 초에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에 거주하다가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에 입향하였다. 그 후 25세손 최차봉(崔次奉)이 송산면 매곡리에 들어왔고, 세거지로 번성하게 되었다.
[연원]
경주최씨의 시조는 신라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다. 최치원은 868년(경문왕 8) 열두 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7년 만인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고 882년에는 자금 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토황소격(討黃巢檄)」이라는 명문을 남기기도 하였던 최치원은 885년에 신라로 귀국했고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 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천령군(天嶺郡)[현 경상남도 함양군]·부성군(富城郡)[현 충청남도 서산시]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 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유랑하다가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냈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다음 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최치원의 선계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 후손들이 대대로 경주에서 세거지를 이루며 살아왔기에 최치원을 득성조로 하고 본관을 경주로 삼게 되었다. 경주최씨 가문의 인물로는 최승로(崔承老)[927~989]가 있는데 고려 성종 때에 28조에 달하는 시무(時務)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조선 시대에 와서는 1860년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와 조선 말의 거유(巨儒)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최익현은 개항 당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가이며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장이다. 거병 당시인 1905년에는 74세의 고령이었다. 최익현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옥사하였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탄우 마을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경주최씨는 화숙공파(和淑公派)다. 화숙공파는 최현우(崔玄祐)의 후손으로 시조 최치원의 9세손 최현우가 화숙(和淑)이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최현우는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대의 인물로 광정대부 문하시중(匡靖大夫門下侍中)을 지냈다.
화숙공파는 경주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거주하였는데,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의 화숙공파는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에서 갈려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24세손 최기선(崔己宣)은 남포면 옥서리에서 많은 문중 사람들과 거주하다가 면천군 감천면 고기리(高機里)[현 송산면 무수리 고잔 마을]에 정착하였다.
최기선의 입향 경위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보령 남포에 경주최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최기선이 남포에 거주하던 최익행(崔益行)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포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해상 교통이나 어업과 관련해 입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향 시기는 18세기 초엽인 숙종 때로 보인다.
[현황]
경주최씨가 송산면 매곡리 탄우 마을로 들어온 것은 25세손 최차봉부터다. 이때부터 경주최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숯골’이라는 의미의 탄우 마을은 최씨들만 살았다고 하여 ‘최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역 내 농토를 바탕으로 농업을 영위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과거에 응시하는 등 양반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주최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들 수 있는 최구현(崔九鉉)[1866~1906]은 송산의 매염리[현 매곡리] 출신으로 1866년(고종 3) 최영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고종 24) 12월에 무과에 급제하고 1888년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올라 군부에서 군무하던 중인 1904년 일본에 의해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는 것을 보고 군부 참서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 4월, 기지시에 병오 창의도소를 설치하고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여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최구현은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했다. 이후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화성 창의소 홍일초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6월 7일에는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 의병 차상길이 15명을 인솔하여 합류했다. 이들 120여 명의 소난지도 의병은 8월 24일, 일본 경찰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항쟁하였으나 결국 최구현 의병장은 체포되었고, 면천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그해 12월에 40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최구현은 2004년 광복절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되었다.
24세손 최기선의 입향 이래 10대를 내려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경주최씨는 해방 직후 2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현재 7~8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 제향 시설은 없고 보령으로 시향을 다녔으나 현재는 성주산 선산에서 10월 15일(음)에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