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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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復興-決意-唐津 |
영어공식명칭 | Dangjin, Land of Baekje Revival Resolu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충청남도 당진을 포함한 내포 지방에 있는 백제 부흥 운동 전적지.
[개설]
백제 부흥 전쟁은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망한 이후 곧바로 시작되었다. 백제 부흥 전쟁은 663년 풍왕이 백강구 전투에서 패해 고구려로 망명하고 지수신(遲受信)이 이끌던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에서 마지막으로 항전하다 패할 때까지 3년간 지속된 전쟁이다.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 백제를 부흥하려 했던 백제 부흥 전쟁은 바로 당진을 포함한 내포 지방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내포 지방에는 백제 부흥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전적지가 남아 있다. 내포 지방에 존재하는 백제 부흥 전쟁 전적지 중 예산의 임존성이나 두솔산성처럼 역사적 사실로 인정 받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막무덤이나 용무치 해변의 경우는 전설로 남아 전해지고 있고, 주류성이나 피성의 경우는 하나의 학설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내포 지방에 남아 있는 백제 부흥 전쟁과 관련된 전적지는 각종 사료와 유물, 유적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당진을 비롯한 내포 지방이 백제 부흥 전쟁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볼 때, 당진을 비롯한 내포 지방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백제 부흥 전쟁 전적지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백제 부흥군의 군사적 중심지 임존성]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봉수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이다. 임존성은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백제 부흥군을 조직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곳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9월 공주로 피신했던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를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두어 관리하면서 가혹한 통치를 하였다. 『신당서』「흑치상지 열전」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처음에 백제의 패망과 함께 항복하였는데 백제가 패망한 후 나당 연합군의 횡포에 분노하여 뜻을 함께하는 주변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 전쟁을 시작하였다.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 전쟁을 시작하자 “10여일 만에 3만 명이 모였고, 소정방이 군대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흑치상지는 200여 성을 되찾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하자 복신이 매우 화가 나서 임사기산(任射岐山)에 웅거하고, …진을 치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신라군을 물리쳤다. 무기가 전의 싸움에서 다 없어졌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물리쳤다. 백제군이 그 무기를 빼앗았으므로 얼마 후 백제 군사들이 다시 날쌔져, 이후 당(唐)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흑치상지와 복신이 백제 부흥 전쟁을 시작한 곳이 바로 임존성, 임사기산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임존성’과 ‘임사기산’은 같은 지명이다. 바로 오늘날 예산 대흥에 있는 봉수산 임존성인 것이다. 임존성은 봉수산 중턱에 능선을 따라 석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임존성은 백제 부흥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 백제 부흥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으며, 백제 부흥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이후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의 왕성 주류성]
주류성은 백제 부흥군의 행정적 중심지로 왕성에 해당한다. 임존성에서 봉기한 백제 부흥군이 임존성과 기각지세를 이루고 버틸 수 있는 곳으로 주류성을 선택하여 왕성으로 정하였다. 이 주류성에 대해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목(洪州牧) 조에서 "홍주목 본 백제 주류성 당개 지심주(洪州牧本百濟周留城 唐改支潯州)"란 기록을 남겼다.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나라가 지심주로 고쳤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내포 지방에서 주류성을 비정하여 보면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에 있는 학성산성(鶴城山城)과 석성산성(石城山城)의 '대부동 분지'로 볼 수 있다. 대부동 분지의 장곡산성은 임존성과는 남쪽으로 12㎞ 지점에 있어 백제 부흥군이 전선을 형성하고 저항하였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주류성을 왕성으로 삼아 백제 부흥 전쟁을 이끌었던 풍왕과 복신 등 백제 부흥군은 한때 금강까지 진출하여 웅진성과 사비성을 둘러싸고 압박하기도 하였다. 제2차 나당 연합군이 부흥군을 공략한 663년 8월 시점에서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에 밀려 크게 패하였다. 당시 주류성에 머물던 병력은 애당초 임존산[예산 대흥]의 대책(大柵)으로 모였던 3만여 명의 의병과 일본으로부터 풍왕을 호위하고 와서 주류성에 머물렀던 5,000명의 일본군이 주류였다. 이를 고고학적으로 확증하기 위하여 홍성군에서는 1995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상명 여자 대학교 박물관 팀에게 홍성군 장곡면 일대의 지표 조사와 주류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의뢰했다. 광대한 건물터[폭 13m, 길이 30m]와 '사시라(沙尸羅)'와 '사라(沙羅)'가 새겨진 명문(銘文) 기와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로써 대부동 분지 일대의 장곡산성이 백제 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이라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왕이 천도한 피성]
『일본서기(日本書紀)』 662년(천지 원년) 12월 조에 의하면 풍왕은 왕성(王城)을 주류성으로부터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가 2월 2일 다시 귀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풍왕은 산이 높고 토지가 척박한 주류성이 왕성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는데 "풍왕은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면서 끝내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피성으로의 천도는 불과 3개월에 그쳤는데, 다음해 2월 신라가 백제의 거열성, 거물성, 덕안성, 사평성(沙平城)[신평면 운정리 신평현성] 등을 공략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성을 빼앗자 이에 놀란 풍왕이 다시 주류성으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일본서기』 기록을 토대로 피성을 둘러싼 방위와 지형을 검토하여 보면 피성은 지금의 당진시 면천면에 있는 몽산성에 해당한다. 피성으로 추정되는 몽산성은 지난 1995~1997년 사이에 상명 여자 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한 학술 조사 결과 백제 시대 성곽으로 판명된 바 있다. 서북쪽에 흐르는 '고련단경'은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목을 흐르는 칼바위내[검암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동남쪽의 깊은 수렁과 커다란 제방은 오늘날 합덕제를 의미한다. 사평성은 지금의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에 있는 신평현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몽산성은 사방을 둘러싼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지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주류성을 버리고 피난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평성이 피성과의 거리가 불과 16㎞로 하루 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평성이 함락되자 풍왕은 황급히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백강 전투지와 막무덤]
백강구 전투는 나당 연합군에 맞선 백제 부흥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벌인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백강구 전투에 관해 『구당서』에는 “인궤(仁軌)가 백강(白江)[백촌강(白村江)] 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00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라고 기록하였고, 『삼국사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 기록에는 "장수들이 백제왕(白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적 우세만을 믿고 싸우다 참패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백강구 전투에 참전한 군사의 수에 대해서는 문무왕이 설인귀(薛仁貴)에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000척이 백강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 왜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다.”라고 한 『삼국사기』 기록과 "당의 군장(軍將)이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라고 기록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볼 때, 백강구 전투지는 1,000척이 넘는 배가 일시에 정박할 수 있는 백사장이 반드시 필요한 지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 부합하는 지형은 서해안에서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의 용무치 해변밖에 없다. 용무치 해변은 1㎞가 넘는 백사장으로 천연 정박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산 넘어 웅포[곰개] 해변 역시 당의 선박 170척이 정박하여 왜군을 기다리고 있을 만한 천연의 요새였다. '백사'에 정박한 일본과 당나라 수군 간의 백촌강[백강] 해전은 8월 27일(음) 일본군의 선제 공격으로 개시되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당의 반격에 의해 일본 병선 1,000척 중 400척이 불타고, 1만 명 장병 거의 대부분이 전사한 것이 663년 8월 27~8월 28일(음)의 전투 상황이다. 당시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체는 조류를 타고 바다 안쪽 갯벌인 고대면 장항리 장항만과 대촌리 해변에 떠밀려 있었을 것이다. 당시 문헌은 그 시체를 강시 즉 누에처럼 물에 부푼 시체로 기록하고, 당나라 총사령관 웅진도독 유인궤(劉仁軌)는 전투가 끝난 9월 2일(음) 당나라 군대, 일본군 포로, 백제 유민들을 동원하여 흩어진 일본군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고 조제(弔祭)[위령제]를 지내 주어 일본군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매장된 곳이 바로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 '막무덤'인 것이다. 막무덤이란 아무렇게나 정성없이 묻은 무덤이란 뜻인데 현지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말로 막무덤, 막무데미 밭으로 불렀다. 『삼국유사』 기록인 손량(孫梁)의 상류쪽 약 1.5㎞ 지점, 분진[분나루]에서 약 400m 거리에 있다. 지금은 장항만이 논이지만 당시에는 모두 바다였다. 이를 입증하는 문헌이 1916년 조선 총독부 발행 당진군 편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 고분(古墳) 조에 있다. 고대면 대촌리 서쪽 산위 흙 만두 모양으로 높이 1간[약 2m], 둘레 약 80간[약 140m]으로 기록돼 있고, 1965년 충남도청 발행 『충남도지』 고적 조에서도 위의 문헌을 인용하여 고 홍사준 관장[국립 부여 박물관]은 전쟁으로 인한 무명용사의 집단묘[孤魂墓]로 생각된다고 기록하였다.
[백강구 전투지 유적 손량과 지벌포, 장암]
손량(孫梁)과 지벌포(只伐浦)는 고대면 장항리 배다리[선교(船橋), 현 장항교] 아래에 있는 곳으로 서기 663년 8월 27일~8월 28일(음) 당과 일본 해군과의 백촌강 해전 당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지명이다. 손량은 당진시 고대면 슬항리에 있는 장항만, 즉 장항교 하류쪽 약 500m에 있는 옛 선착장이고, 지벌포는 역시 장항만 안 보덕포 부근 옛 선착장 자리인 '지섬'이다[강진성 증언].
‘장암(長巖)’은 석문면 삼봉리 차돌배기 마을 해변부터 황새 바위까지 약 100m 이상 되는 긴 암맥(巖脈)으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기록에 나오는 지명이다. ‘장암’은 옛 태창 염전[한승 염전] 제방 축조 당시 장암 바위를 부수어 제방을 축조하는데 써 버렸으므로 현재는 그 자취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백제인이 일본으로 집단 이주한 무테]
무테[데레성, 牟弓]는 백제 부흥군이 패망한 이후 일본으로 집단으로 이주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당진시 송악읍 석포리 지역을 '무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곳이 '무테'이고, 송악읍 정곡리 배울 마을 및 돌무지[정설미]에 500~600평 정도의 석축 성터가 있었는데 이 성곽이 '데레성'이다. 서기 663년 9월 7일(음) 백제 부흥군의 최후 근거지인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일본서기』는 "이때 나라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주류성은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볼 수 있겠는가! 오직 데레성으로 가서 일본의 군장들을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여 볼 수 있을 뿐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부흥 운동이 백강구 전투의 패배로 끝이 나자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이주하기로 하고 일본군 패잔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데레성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백제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였고, 백제 부흥군의 전적지는 돌볼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된 채로 1300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진을 비롯한 내포 지방에 산재해 있는 백제 부흥군의 전적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백제 유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이 깃든 곳으로 깊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