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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84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3년 - 조선시대 면천군과 당진현 설치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조선시대의 군현은 1413년(태종 13)에 개편되었다. 이때 당진 지역에는 면천군(沔川郡)당진현(唐津縣)이 설치되었다. 이곳을 관할하는 도(道)도 양광도(楊廣道)에서 충청도(忠淸道)로 개칭되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명칭이었다. 하지만 충주와 청주의 고을이 강등되면 공주와 홍주의 머리글자를 도명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충공도·청공도·청홍도라는 도명이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충홍도·공홍도·공청도·홍청도·충공도·홍충도 등의 도명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관직 조 기사에는 수령의 입사 유형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홍주 목사(洪州牧使)는 정3품으로 문과 출신이 부임하며, 면천 군수(沔川郡守)는 종4품으로 음관(蔭官)이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당진 현감(唐津縣監)은 종6품직으로 문과 출신이나 음관 출신이 모두 부임할 수 있었다. 면천 군수가 당진 현감보다 높은 품계에 있는 것은 면천군의 규모가 당진현보다 현저히 컸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면천군 편에 의하면 군수와 훈도 각 1인씩을 두었다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면천읍지』에 의하면, 군수는 음직으로 종4품이고, 좌수(座首) 1인·별감(別監) 2인·창감(倉監) 2인·군관(軍官) 50인·아전(衙前) 53인·영리(營吏) 6인·지○(知○) 19인·사령(使令) 28인·노(奴) 22인·관비(官婢) 19인이 소속되었다고 한다. 관아에 소속된 구성원이 모두 203명이다. 이는 당진현의 현감 6품·좌수 1인·별감 2인·군관 7인·아전 18인·통인(通引) 5인·사령 8인·관노 5인·관비 4인등 총 51명과 비교하면 관리 인원 면에 있어서도 면천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면리 조직]

당진 지역의 면리 조직을 보면 당진현은 현내면·동면·남면·상서면·하서면·고산면·외맹면·내맹면 등 8개 면을 관할했고, 면천군은 읍내면·죽림면·덕두면·가화면·범천면·손동면·초천면·중흥면·감천면·송산면·승선면·정계면·송암면·마산면 등의 14개 면을 관할했다. 현재의 읍면과 비교해 보면, 당진현은 현재의 당진읍고대면·석문면을 관할했으며, 면천군은 현재의 면천면 지역과 순성면·우강면·송악면·송산면을 관할했다. 문제는 고려 시대 이래로 합덕과 신평 지역, 그리고 우강면의 일부 지역을 다른 군·현에서 관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월경지의 존속이다.

월경지(越境地)는 어떤 군현의 행정 관할이 이루어지는 범위 내에서 토지가 연결되지 않고, 타 행정 구역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관할되는 형태를 말한다. 일명 비지(飛地), 비월지(飛越地), 비입지(飛入地) 라고도 한다. 그래서 월경지는 타 영내에 만처럼 끊어지지 않은 채 깊숙이 침입하여 마치 어금니가 맞물려 있는 형태의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상입처(相入處), 두입지(斗入地)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러한 월경지삽교천 연변의 당진 지역에 많았다.

예로부터 삽교천 주변에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막대한 미곡을 생산하는 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세력이 있는 군·현일수록 타군의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여 자신의 군·현에 할당된 조세 곡식을 처리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지역에 창고가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력이 미약한 군·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래저래 불리한 점이 많았다.

[군사 제도]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했다. 태종 이후 사병 제(私兵制)를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했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편성되었다. 정군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교대로 복무했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궁궐과 서울을 수비하는 5위로 구성되고, 그 지휘 책임은 문반 관료가 맡았다. 중앙군은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영이나 진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요충지의 고을에 성을 쌓아 방어 체제를 강화했다. 연해 각 도에는 수군을 설치했다. 수군은 육군에 비하여 힘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렸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당진현 군사를 보면 시위군(侍衛軍) 2명, 진군(鎭軍) 8명, 선군(船軍) 120명이 있고, 면천군의 경우는 시위군 11명, 진군 8명, 선군 195명이 있다고 한다. 면천군의 해안 지대는 현재의 송산과 송악 지역이므로, 선군은 이곳의 해안 지대를 방어하는 군인이라고 하겠다.

충청도의 군사 조직을 보면 충청도 관찰사가 병사와 수사를 겸하였고 전임의 병사와 수사가 각 1인 있었다. 전임의 병사가 관리하는 병영은 태종 2년에는 덕산에 두었다가 1418년(태종 18)에 해미로 옮겼다. 또 충청 수영은 1466년(세조 12) 보령에 두었다. 육군은 각 고을의 지방관이 관할했고, 수군의 경우에는 소근포진관(所斤浦鎭管)[태안], 마량진관(馬梁鎭管)[강진]에 첨절제사(僉節制使)[종3품]가 배치되었고, 당진포(唐津浦)[당진]와 파지도(波知島)[서산], 서천포(舒川浦)[서천]에 만호(萬戶)가 있었다. 당진포의 수군만호는 원래 박지포(朴只浦)[현 석문면 웅포]에 있었으나 진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진포 만호에 배치된 병선은 13척이고 선군수(船軍數)는 790명이다.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에는 군사 조직과 아울러 교통과 통신 체제도 정비되었다. 군사적인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하여 봉수제(烽燧制)가 정비되었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이 설치되어 국방과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한층 용이해졌다. 충청도의 봉수제는 충주목에 4곳의 봉수대가 있는 것을 비롯하여 총 41개소의 봉수가 있었다. 그중 당진현에 1개소, 면천군에 1개소, 해미현에 1개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당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당진현고산 봉수(高山烽燧)고대면 당진포리 고산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창택산(倉宅山)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해미현 안국산(安國山) 봉수에 응했다. 해미현의 봉수는 정미면 수당리 안국산에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서산군 북산(北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 고산 봉수에 응했다. 또한 면천군 창택산 봉수송산면 삼월리 창택산에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당진현고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현의 괴태길곶(槐台吉串) 봉수에 응했다. 송산면 삼월리 창택산[봉화산]에 있던 봉수는 일제 강점기 만세 시위가 발생했던 곳으로 민족 운동 차원에서도 중요한 유적지이다.

역참제로는 면천군 소속의 순성역(順城驛)당진현 소속의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다. 순성역은 현재 순성면 양유리 역말에 있었는데 일명 구화역(仇火驛)이라고도 하는데 『면양읍지』에 보면 순성역에는 말 14필, 역리 20명, 노(奴) 15명, 비(婢) 1명이 있었으며 금정역에 속해 있었다. 흥세역은 당진읍 용연리 역말에 있었다. 흥세역은 현재 용연 초등학교가 있는 당진시 용연동에 있었다. 이곳 지명이 역말이고, 앞을 흐르는 하천의 명칭이 역천인 것은 흥세역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곳에는 역리 17명, 노(奴) 2명, 비(婢)가 2명, 기마 4필이 있었고 복마(卜馬)가 4필 있었다. 복마는 짐을 싣는 말이다. 순성역흥세역은 모두 소역(小驛)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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