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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441
한자 慶州李氏孝婦門
영어공식명칭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Gyeongju Yis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5년 4월연표보기 - 경주이씨 효부문 건립
현 소재지 경주이씨 효부문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 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주이씨 효부문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
성격 효부문
양식 한옥 맞배지붕
정면 칸수 1간
측면 칸수 1간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에 있는 경주이씨의 효부문.

[개설]

경주이씨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에 살던 김국진의 아내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잘 섬겨 벼슬길에 내보냈고, 가산을 크게 일으켰다. 하지만 남편은 소실을 얻어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든 시부모는 끊임없이 경주이씨를 괴롭혔다. 그래도 경주이씨는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셨고, 효부문을 받게 되었다.

[위치]

경주이씨 효부문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출포리에 있다.

[형태]

한식 맞배지붕으로 1.3평 크기이다. 현판에는 ‘효부 경주이씨 숙부인지문(孝婦慶州李氏淑夫人之門)’이라 쓰였다.

[관련 내용]

경주이씨는 1876년에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 대호지면 출포리에 사는 김국진과 혼인하였다. 경주이씨는 정성을 다해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하였다. 경주이씨는 남편을 끊임없이 격려하였고, 밤을 지새우며 길쌈을 하였다. 남편 김국진은 경주이씨의 노고에 감동하였고, 학문에 최선을 다해 참봉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승진하여 정3품 통훈대부에 올랐다. 경주이씨도 남편의 벼슬에 따라 숙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편은 소실을 얻었고,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시어머니는 성미가 괴팍하여 며느리 경주이씨를 모질게 학대하였다. 시어머니는 다리를 못 쓰는 좌각병을 앓아 15년간이나 움직이지 못하였다. 경주이씨는 시어머니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온갖 시중을 들었다.

가세는 더욱 기울었고,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은 첩에게 정신이 팔려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경주이씨의 고통은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는 경주이씨의 효행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일제 강점기 서산 유림은 뜻을 모아 경주이씨를 표창하고자 하였으나, 경주이씨는 부모 섬기는 일이 상 받을 일은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그 후 1925년 4월, 당진시[당시는 서산군] 대호지면 출포리에 효부문을 세웠다.

[의의와 평가]

유림은 고통을 감내하는 며느리를 ‘효부(孝婦)’라고 칭송하면서 정숙한 여인의 표본으로 삼고자 ‘효부문(孝婦門)’을 세웠다. 여성에게 최대한의 희생만을 요구하던 성리학적 세계의 유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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