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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07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역사.

[개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9일 대한 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화하고, 민족 말살 정책 및 식민지 수탈 정책을 추진하였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한 외진 고을이었다. 철도와 도로 확충이 미흡하여 육상 교통이 불편하였고 각종 정보 교류와 물자 보급에서 도외시되었다. 하지만 ‘내포(內浦)’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해상 교통의 발달을 통해 경향 각지와 연결할 수 있었다. 기호학파의 핵심인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하여 항일 의병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진 지역의 역사는 조선 총독부의 폭압과 이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주민의 항쟁이 격렬하게 부딪친 투쟁의 기간이었다.

[행정 구역 개편]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지방 행정 조직을 개편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 중이던 1913년 전국의 부군을 폐합 정리하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했고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행하도록 했다. 총독부는 통폐합의 이유로 ‘시정상의 편의와 경비의 절약을 도모’를 제시하였지만, 실제는 일제의 편의대로 통합하여 식민 지배를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통폐합에 의하여 충청남도 지역의 경우 총 37개 군에서 무려 23개 군이 감소하여 14개 군으로 편제되었고, 홍성군·대전군·논산군이 새로 만들어졌다. 특히 홍성군은 홍주군과 결성군을 통합하면서 생겼는데, 이로써 역사적인 ‘홍주(洪州)’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당진 지역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구한말 당진군은 8면 130동리를 관할했고 군청 소재지는 군내면 성내리였다. 면천군은 22면 308동리를 관할했으며 소재지는 읍내면 성내리였다. 일제는 당진군과 면천군을 통합하고 명칭을 당진군으로 하고 10개면, 123동리를 관할하게 했으며 군청 소재지는 이배면 읍내리로 정했다. 당진군과 면천군의 군폐합 관계 및 군·면 통폐합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군 폐합 관계〉

당진군[당진군 면천군을 합병 조직한다]

1) 군세 면적 3,670, 호수 12,513, 인구 59,194.

2) 군청 소재지는 현재의 당진군청 소재지로서 병합후 ○와 군의 중앙에 위치함을 ○하게 되었다.

3) 군명은 현재 군청 소재지의 군명에서 답습한다.

4) 군청 소재지에서 최원군계(最遠郡界)의 거리 4리 27정.

〈군·면 통폐합 현황〉

· 당진군은 8개 면을 3개 면으로 통폐합하고 여기에 면천군을 합병하였다.

1. 이배면(螭背面)-군내면·동면·남면을 통합하였으며, 면명은 남면에 있는 유명한 산에서 이름을 채용하였다.

2. 고대면(高大面)-상대면·하대면·고산면을 통합하였으며, 면명은 통합된 면명에서 한 자씩 채용하였다.

3. 석문면(石門面)-외맹면·내맹면을 통합하였으며, 면명은 내맹면에 소재한 유적지 명칭에서 채용하였다.

·면천군은 22개면을 7개면으로 통폐합하고 당진군으로 합병되었다.

1. 마암면(馬岩面)-읍내면·마산면·송암면을 통합하고 합병면 중 큰 면의 이름에서 각각 한 자씩 채용하였다.

2. 순성면(順城面)-죽림면·가화면·덕두면·정계면을 통합하고, 합병면 중 죽림면에 과거 순성역이 있었던 데서 착안하여 면명을 정하였다.

3. 송산면(松山面)-기존의 송산면에 감천면·창택면을 합병하는 것이므로 현재 면명을 습용하였다.

4. 범천면(泛川面)-기존의 범천면에 이서면을 합병하는 것이므로 현재 면명을 습용하였다.

5. 합덕면(合德面)-합남면·비방면·합북면을 통합하고, 합병면 중 합남면에 둘레 8㎞에 달하는 유명한 합덕 제방이 있으므로 여기서 면명을 채용하였다.

6. 신평면(新平面)-신남면·현내면과 신북면[10개 동리 제외]을 통합하고, 면명은 과거의 현내면에 신평 면청이 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채용하였다.

7. 송악면(松嶽面)-승선면·초천면·손동면·중흥면에 신북면 10개 동리를 합병하였으며, 합병면 중 중흥면에 과거 민보군(民堡軍) 터가 있던 송악이 있으므로 여기서 면명을 채용하였다. 신북면 10개 동리를 송악면으로 이속한 것은 월경지를 정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8개 면을 관리하던 당진군과 22개 면을 관리하던 면천군이 통합되었으며, 군의 명칭과 군청 소재지는 당진으로 하였다. 이로써 500년 넘게 지속된 지역적인 역사와 전통, 그리고 지역 상호간 유대 관계가 붕괴되었다. 면의 통폐합도 마찬가지다. 조선 총독부는 면적과 호수, 인구를 고려해서 적당히 면을 통합했다. 때에 따라서는 두 개의 면을, 혹은 4개의 면을 통합했다. 면의 명칭을 정할 때는 면에 독특한 유적이 있을 경우에는 유적의 명칭을 계승했다. 그러지 않은 경우에는 두 개의 큰 면에서 한 자씩 따서 면의 명칭을 정하거나, 큰 면의 이름을 고정시키고 작은 면은 복속하는 형태를 취했다. 조선 총독부는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교통 현황]

당진 지역은 철도나 1등 도로가 없어서 육상 교통은 열악하였다. 그 결과 서산에서 당진을 경유하여 예산으로 넘어가는 국도 32호선이 건설되면서 교통상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각종 신문 기사를 보면, 아산군 선장역에서 신종리를 거쳐 구양 포구에 이르는 도로를 개설하여 우평 강문 평야의 미곡을 운송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1927년에는 예산의 신례원에서 당진군 합덕면까지 도로가 개수되었으며, 당진~합덕 간 직통 도로[기지시 경유 3등 도로] 공사를 1928년에 시작했으나 민가가 밀집한 남원을 경유하는 문제를 놓고 주민들 간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1928년에는 합덕~선장 간 철도 부설을 건의하여 경남 철도 당국에서도 실지 조사를 했다고 하는 데 실현되지 못했다.

도로 건설은 주민들에게 편리함만 준 것은 아니었다. 도로 정비는 순전히 주민들 몫이었다. 주민들은 비가 와서 땅이 파인 도로를 다듬어야 했고 자갈을 가져다 도로에 펴기도 했다. 한 평의 자갈을 줍자면 원근에 따라 10일 내지 15, 16일이 걸렸다. 경제 공황이 터진 1930년대에 그것도 춘궁기에 부역을 나가는 것은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조선 일보』 1930년 5월 19일자 기사를 보면, 춘궁기를 당한 농민들이 과중한 부역에 고통스러워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당진 읍내에서 오도항에 이르는 도로는 송산면 지역 주민들에게 할당되었는데, 주민들은 어김없이 오도행 도로에 나와야 했다. 그리고 산에 가서 돌을 파다가 지게로 날랐고, 길바닥에 앉아서 돌을 잘게 부쉈다. 송산면에 사는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에라, 이놈이 군수 대가리다, 이놈은 면장 대가리다.” 하면서 돌을 깼다고 한다.

[인구 현황]

1914년 12월 충청남도 인구 현황에 의하면 당진의 호수와 인구는 1만 3138호에 6만 4620명이었다. 이는 충청남도 전체 호수 20만 4508호의 6.4%에 해당하고 인구도 충청남도 전체 인구인 102만 4497명의 6.3%에 달한다. 이는 충청남도 14개 군 가운데 11위에 해당했다. 일본인 호수도 62호로 충청남도 전체 일본인 호수인 4,419호의 1.4%에 해당했다. 충청남도 전체에서 가장 적은 호수를 차지하고 있고 일본인 인구수도 168명으로 가장 적은 청양군의 132명보다 34명이 많다. 일본인이 적은 이유는 당진 지역에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교통이 낙후되어 이동하기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당진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도 행정 중심지인 당진 읍내와 평야 지대가 발달한 합덕 읍내에 국한되었다.

한편 1930년 당진 지역 국세 조사 보고에 의하면 당진 지역 총인구 8만 4908명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은 1만 1179명을 보유한 송악면이었다. 송악면은 당진군 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면에 해당된다. 다음은 1만 643명을 보유한 당진면으로 당진군청이 있는 행정 중심 도시였다. 세 번째는 합덕면으로 1만 30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합덕면은 우평 강문 평야를 배후로 하는 산업[농업]의 중심지이자 미곡의 집산지로 각광받는 도시였다. 결국 당진 지역의 인구는 면의 규모가 큰 송악면과 정치 행정의 중심지인 당진면, 경제의 핵심 거점인 합덕면을 위주로 밀집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 현황]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에 식민지교육을 시행하면서 철저히 한민족은 통제하고 억압하였다. 이들은 한민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식민지의 영속화를 꾀하였고, 학교장은 경찰서장과 더불어 반드시 일본인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민족 교육을 실시하던 기존의 학교를 폐쇄하고 건물과 학교를 빼앗아 보통학교로 만들었다. 그 결과 면양 학교(沔陽學校)를 폐쇄하고, 1911년 9월 1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를 개교시켰다. 또한 당진 객사(唐津客舍)에서 교육하던 당성 학교(唐城學校)와 석문면 통정리의 통명 학교(通明學校)를 없애버리고 1913년 5월 20일 당진 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를 개교시켰다. 민족 교육과 식민 교육을 동시에 습득한 학생들은 다양한 행로를 보였다. 그중에서 정학원(鄭鶴源)[1894~1933, 2007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1913년 3월 2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를 제1회 졸업하여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면서 공립 보통학교에 대한 주민의 의식이 바뀌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일제를 축출할 수 있다는 실력 양성 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선 총독부의 ‘3면 1교주의’라는 문화 정치도 한 몫 하였다. 그 결과 1920년 10월 1일 송악면 중흥리에 송악 공립 보통학교[현 송악 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22년에 합덕 공립 보통학교조금 공립 보통학교, 신평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1923년에 송산 공립 보통학교, 1924년에 석문 공립 보통학교정미 공립 보통학교, 1929년에 범천 공립 보통학교[현 우강 초등학교], 1932년에 순성 공립 보통학교, 1936년 고대 공립 보통학교까지 각 면에 보통학교 설립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공립 보통학교의 설립 비용을 해당 지역민에게 부담시켰다. 학교 토지와 건물, 교육 기자재 비용은 모두 주민 몫이었다. 심지어 조선 총독부는 학교 설립 위치를 교묘히 조정하면서 지역 내 주민 갈등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송악 공립 보통학교는 송악면사무소가 있던 기지시리가 아니라 중흥리에 세웠고, 정미 공립 보통학교는 면사무소가 있는 정미면 천의리가 아닌 매방리에 세웠다. 이 때문에 주민들 간에는 면민 대회를 개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1929년 5월 27일에 개교한 면천 공립 농업 보습 학교도 면천면 주민과 당진면 주민 간의 치열한 대립을 겪은 끝에 면천면 성상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당진 지역 주민들의 순수한 학교 설립 운동조차 식민 통치의 한 방법인 ‘주민 분열’로 유도하였다.

당진 지역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야학 운동으로 이어졌다. 야학은 일제의 공교육 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형태로, 1919년 3·1 운동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었고 1930년대 전국적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동아 일보』 1929년 1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당진 지역의 야학으로 노동 학원(勞動學院), 영화 학원(永化學院), 당성 학원(唐城學院), 면양 학원(沔陽學院), 영신 강습회(永新講習會), 덕흥 학원(德興學院), 배영 학원(培英學院) 등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야학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송산면 금암리에 있던 송산 강습소, 당진 향교에 있던 숙명 사숙, 송악면 가교리에 있던 송남 학원, 석문면 삼봉리에 있던 삼일 강습소, 석문면 삼화리 삼화 강습소, 순성면 성북리의 미산 학원, 합덕면 대합덕리의 삼호 야학회 등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신평 한글 야학, 부장 한글 야학, 송산 한글 야학, 원치 한글 야학, 내경 한글 야학, 성원 한글 야학 등이 각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다.

[3.1 운동]

당진 3·1 운동은 일제에 침탈당한 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항쟁한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당진 지역 3·1 운동은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말까지 전개되었다. 3월 10일의 독립 만세 운동은 당진 읍내와 면천 공립 보통학교에서 발발하였다. 하지만 당진 읍내에서의 만세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독립 만세 운동은 면천 공립 보통학교에서 일어났다. 즉 면천 공립 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元容殷)과 원용은의 형 원용하(元容夏)가 서울의 고종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면서 시작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을 설득하고 동원하여 3월 10일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천 시내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주동자로 지목된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지청에서 검사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결국 퇴학 처리되었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은 당진 지역에서 최초로 전개된 만세 운동일 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지방 학생 만세 운동에서도 처음으로 전개된 것이라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4월부터 전개된 당진 지역 3·1 운동은 봉화 시위로 발전되었다. 당진 지역 3·1 운동은 대호지 주민들이 주도하고 4월 4일, 정미면 천의리 천의 장터에서 발발한 독립 만세 운동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대호지면 유생 남주원(南柱元)·남상돈(南相敦)·남상락(南相洛)·남계창(南啓昌)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대호지면 이인정(李寅正) 면장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들은 ‘도로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대호지면 9개 마을 주민을 동원하여, 4월 4일에 5일장이 열리던 정미면 천의리로 행진하였다.

천의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주민들은 이들을 제지하는 천의 주재소 순사들을 물리쳤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이 결과 수백 명의 주민들이 피체되었고, 총 199명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120명에 달하는 독립 유공자가 서훈되었다. 이 만세 운동 이후 4월 8일에는 대호지면 송전리정미면 수당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4월 13일 송악면 기지시리에서도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8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당진 지역 주민들은 일제 탄압에 맞서 치열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회 운동]

1920년대 당진 지역의 지식인들은 청년 운동과 신간회 당진 지회 운동을 추진하였다. 당진 지역 청년 운동은 1920년대 초기는 관료와 유지, 지식인을 중심으로 실력 양성과 민중 계몽 운동에 주력했다. 또한 1924년부터 1927년까지의 청년 운동은 신평·우강·합덕 중심의 신합 청년회(新合靑年會) 회원들이 주도하여 혁신적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지막으로 1928년에는 당진 청년 동맹(唐津靑年同盟)이라는 통일된 단체를 결성하여 신간회 당진 지부와 협력하면서 지역사회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소작 운동을 전개하는 등 경제적으로 열악한 빈곤층의 권익 보호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충남의 타 지역과의 연대를 통한 조직 확대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진 지역 청년 단체들은 지역사회 운동의 구심체였을 뿐만 아니라 충남의 청년 운동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진 지역 지식인들은 신간회 당진 지회 설립에도 앞장섰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서울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민족 협동 전선으로 창립한 것이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소될 때까지 전국에 120~150여 개의 지회를 설립하였고, 회원수도 2만~4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의 지방 조직이 확대되어 가던 1927년 12월 당진 지회가 설립되었다. 당진 지회는 8월 25일의 홍성 지회, 9월 27일의 공주 지회, 11월 4일의 예산 지회에 이어 충청남도에서는 네 번째로 설립되었다. 당진 지회의 핵심 인물은 홍종관(洪鍾寬), 송병혁(宋秉爀), 배기영(裵基英), 인원수(印鵷洙), 임종만(林鍾萬), 정학원(鄭鶴源) 등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당진읍에 거점을 두고 있던 천도교 계열이 주도하였고 회원은 153명이었으나, 1920년대 말에는 신합 청년회의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이 주도하였고 회원은 178명으로 증가되었다.

신간회 당진 지회의 주요 활동으로 첫째, 재만 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당진 주민 경제의 궁핍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곡창 지대인 당진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통제를 가하였다. 주민들은 곤궁한 삶 속에서도 미곡 증산을 위해 동원되었다. 하지만 증산된 미곡은 농민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대부분 수탈되었다. 셋째, 우리 주민의 일상에 대한 불이익을 개선하도록 주장하였다. 그것은 조선어 교육의 확대와 문맹 퇴치 문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당진 지회의 활동은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신간회의 각종 집회는 일제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제한적인 활동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간회 당진 지회는 1920년대 후반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별적이고 은밀하게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을 조직화하였다. 특히 당진 지역에 만연했던 소작 쟁의를 체계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써 식민지 지배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해방 직후 당진 지역 정치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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