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신간회 당진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18
한자 新幹會唐津支會
영어공식명칭 Dangjin Branch of the Singanho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12월 6일연표보기 - 신간회 당진지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30년 3월연표보기 - 신간회 당진지회 해소
최초 설립지 신간회 당진지회 설립지 -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 지도보기
성격 민족 운동 단체|항일 단체

[정의]

1927년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신간회 당진지회는 1927년 12월 6일 민족 협동 전선의 노력으로 결성한 민족 운동 단체였다. 시기상으로는 충청남도 지역 7곳 중에서 홍성 지회, 공주 지회, 예산 지회에 이어서 네 번째로 결성되었다. 당진지회는 1931년 3월 해소될 때까지 홍성 지회와 함께 충남의 대표적인 신간 지회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당진지회는 1920년대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을 선도한 단체였다.

[설립 목적]

신간회는 사회주의 운동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 계열 간의 통합을 꾀한 단체였다. 즉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실력 양성 운동이 각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각 운동 세력 중에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운동 단체 간의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신간회 당진지회는 이러한 운동 단체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 협동 전선으로 통합하고자 결성한 단체였다.

[변천]

신간회 당진지회는 1927년 12월 6일 창립하여 1931년 3월 해소할 때까지 만 3년 4개월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 과정을 설립기[1927년], 활동기[1928~1930년], 해소기[1931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설립기의 운영진은 홍종관(洪鍾寬)을 회장으로 삼아 20여 명의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 면 지역을 대표하였고, 천도교와 개신교를 신앙으로 하는 운동가들이 많았다. 정환석은 당진 천도교의 핵심 인물이었고, 심종관과 정형택도 감리회 소속 인물이었다. 또한 회원 가운데 동아 일보 당진 지국과 조선 일보 당진 지국의 기자들도 있었다. 신문 지국의 기자들은 당진 지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활동기의 운영진은 설립기와 비슷한 체제로 유지되었지만, 1929년경에 이르면 홍종관 회장 대신 송병혁(宋秉爀) 집행 위원장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설립기보다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특히 당진 지역 혁신 청년 단체인 신합 청년회(新合靑年會)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배기영(裵基英)과 인원수(印鵷洙)가 대표적이다. 설립기의 보수적 성향에서 점차 개혁적 성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소기의 운영진은 정형택(鄭亨澤) 집행 위원장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활동기와 비슷한 운영진이다. 정형택은 합덕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해소기에는 설립기에 활동하였던 천도교 계열의 실력 양성 운동가들이 정환석(鄭煥奭)을 제외하고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신간회 당진지회의 운영진이 후기로 갈수록 더욱 급진적인 성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활약한 임종만(林鍾萬), 정학원(鄭鶴源)은 대표적인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당진지회의 주요 활동으로 첫째, 재만 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당진 주민 경제의 궁핍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곡창 지대인 당진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통제를 가하였다. 주민들은 곤궁한 삶 속에서도 미곡증산을 위해 동원되었다. 하지만 증산된 미곡은 농민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대부분 수탈되었다. 셋째, 우리 주민의 일상에 대한 불이익을 개선하도록 주장하였다. 그것은 조선어 교육의 확대와 문맹 퇴치 문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당진지회의 활동은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신간회의 각종 집회는 일제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제한적인 활동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현황]

신간회 당진지회의 창립 시 회원은 총 153명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1년여가 지난 1929년 1월에는 178명으로 증가되었음이 확인된다. 신간회 당진지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간회 당진지회는 일제 경찰의 억압 속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1920년대 말 당진 지역 민족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별적이고 은밀하게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을 조직화하였다. 특히 당진 지역에 만연했던 소작 쟁의를 체계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써 식민지 지배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나아가 해방 직후 당진 지역 정치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