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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25
한자 3·10沔川學生獨立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면천 공립 보통학교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면천 공립 보통학교 일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성격 독립만세운동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

[개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원용은(元容殷)은 귀향한 후,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10일, 4개 학년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주동자인 원용은과 박창신은 일제 경찰에 체포당했고, 결국 퇴학당하였다. 면천 학생 만세 운동은 인근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우리의 국권을 유린한 일제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가혹한 식민 통치를 전개하였다. 헌병 경찰 통치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통치는 지극히 삼엄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온 국민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어났다.

[경과]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도 1919년 3월 10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은(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결과]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은 당진 지역에서 최초로 전개된 만세 운동일 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지역 학생 만세 운동 중 처음 전개된 것이어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와 같이 3·10 면천 공립 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은 순수한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고 주변 지역 3·1 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당진시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3·10 학생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