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당진 의법 청년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13
한자 唐津懿法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1년 2월 6일연표보기 - 당진 의법 청년회 설립
최초 설립지 당진 의법 청년회 - 충청남도 당진시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감리회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군에 있었던 감리교회 청년 운동 단체.

[개설]

당진 의법 청년회는 일제 강점기 당진 지역의 감리교회 청년 신앙 운동 단체로 발족하여 신앙 운동과 사회 운동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조선 총독부는 3·1운동 이후 한국인에 대한 통치 방식을 헌병 경찰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변경하고 한민족에 대한 유화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의 유지와 지식인들은 각종 청년 단체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당진 지역에서도 여러 형태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지역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진 의법 청년회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감리회의 선교와 청년 계몽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당진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이며, 대표적인 청년 단체 중 하나가 당진 의법 청년회다. 원래 ‘의법 청년회(懿法靑年會)[엡윗 청년회, Epworth League]’는 1897년 5월, 미 감리회 한국 선교 연회가 서울에서 결성한 청년 단체였다. 그 후 감리회 의법 청년회는 1906년에 해체[1906년]와 재건[1916년]을 하고, 조선 엡윗 청년회 연합회[1931년]를 조직했다. 다시 1938년에 해산했다가 1939년에 ‘공려회’로 개명을 했다. 그리고 1945년 조선 기독교 청년 동맹 등으로 변천되었다. 이들은 전도 대회를 개최하여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유치원, 야학, 주일 학교를 열어 부녀자와 아동을 대상으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법 청년회가 당진 지역에서 결성된 것은 1931년 2월 6일이다. 즉 당진 교회에서 이종권 목사의 사회로 엡윗 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이철규를 회장으로 선출하면서 조직을 구성하였다. 한편 1933년에 등록된 177개 청년회 조직 중에서 홍성 지방에는 홍성·예산·당진·서산·대천·삽교·해미 등 7개 지역이 있었다고 하였고, 1933년에는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 삼화 교회 엡윗 청년회에서 교회 청년들의 활동을 도시와 농촌 중 어느 지역을 집중해서 시행할 것인가를 토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동아 일보』 1923년 9월 18일자 기사를 보면 합덕 의법 청년회(合德懿法靑年會)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합덕면과 범천면[현 우강면]에 극심한 해일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구제하기 위한 의연금을 모금한다는 것이다. 합덕 의법 청년회는 동아 일보 당진 지국, 조선 일보 당진 지국과 연합으로 당진 수해 구제회(唐津水害救濟會)을 구성하여 지속적으로 광고와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모금 현황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볼 때, 합덕 의법 청년회는 당진 의법 청년회가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이전부터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합덕 의법 청년회의 설립에 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 이후 감리회 청년회에서는 복음 전도와 교육 활동, 체육·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특히 당진 엡윗 청년회가 조직된 이후에는 교회 내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전도 강연과 각종 계를 조직하여 지역 공동체 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교육 활동으로는 부인 및 문맹 아동에 대한 교육과 토론회·강연회를 통한 의식 개발 및 금주 운동·절제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합덕면과 우강면 지역에 발생한 해일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의연금 모금에도 앞장서 농촌과 농민 구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당진 지역 엡윗 청년회 소속 청년들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농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문제를 찾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 주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농촌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인식하였고, 농촌의 개선과 발전이 교회의 성장과 동일함을 직시하여 농민에게 근대 의식의 고취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기 위한 당진 지역 농민의 민족 의식 함양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