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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대호지 당진 통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29
한자 貞美大湖芝唐津統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대 - 정미, 대호지 당진 통합 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정미, 대호지 당진 통합 행정 구획 완료
발생|시작 장소 당진 번영회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당진시에 통합시킨 행정 구획 변경.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대호지면은 원래 서산시에 속했다. 하지만 두 면은 서산시보다 당진시에 가깝다는 이유로 당진군 편입운동이 1930년대부터 전개되었다. 줄기차게 진행된 이 움직임은 1957년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다. 그 결과 당진군의 군세(郡勢)가 확장되었고, 1958년 치른 제4대 민의원[국회 의원] 선거에서 두 명의 의원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충남 당진시 정미면(貞美面)대호지면(大湖芝面)은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소속이었다. 해미현은 1914년 조선 총독부의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서산시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당진 번영회(唐津繁榮會)를 중심으로 당진으로의 편입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지리적으로 서산군청보다 당진군청이 10~15㎞ 정도 가깝다. 이 때문에 정미·대호지 면민의 행정적·경제적 편리함을 도모한다. 둘째, 당진군청을 평야 지대가 발달한 합덕으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차단한다. 세 번째는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두 명의 의원을 배출하자는 것이다.

[경과]

‘당진 번영회’는 1929년 10월 24일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에서 창립되었다. 당진 번영회는 당시의 현안 문제였던 당진과 오도항 간의 도로 확장 문제, 당진의 시장 확장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에는 「당진 번영상(唐津繁榮上) 시설 급개선(施設及改善)을 요(要)하는 사항」이라는 문건을 만들었는데, 주요 내용이 당진읍과 접하고 있는 정미면과 그 이웃면인 대호지면을 당진군에 편입하여 당진 군세를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한편 합덕 번영회는 1932년 2월 21일 설립되어 합덕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합덕 번영회에서 당진군청을 합덕에 옮기고자 노력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합덕은 우평강문 평야와 합덕 평야를 지니고 있으면서 농업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었다. 당진 번영회에서는 당진군청이 합덕으로 옮겨질 수 있겠다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해방 이후 공식적인 행정력이 미약했던 시기에 당진 번영회는 당진군의 최대 유지 단체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각종 정치 단체를 운영하였고, 당진 중학교와 당진 상업 고등학교의 설립 운동도 전개하였다. 한국 전쟁을 치른 1957년 당진 번영회장은 당시 최대 갑부인 인운식(印雲植)[1903~1994]이 역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의원[국회 의원]이 같은 일가인 인태식(印泰植)[1902~1975]이었다. 다음 해인 1958년에는 제4대 민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출신의 원용석(元容奭)[1906~1989]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들은 동반 당선을 위한 방법으로 당진의 인구를 늘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연되었던 정미·대호지의 당진 편입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당진 번영회는 정미면대호지면 의회 의원들을 설득하였고, 서명을 받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면 의회 의원들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정미면 대운산리에 국민학교 교사를 신축하고 분교를 신설할 것, 둘째, 정미면 천의리에 중학교를 신설할 것, 셋째, 미호 고등 공민학교에 40만 원을 즉시 기부할 것, 넷째, 대호지면과 당진 사이에 수백 정보의 간척지를 조성할 것, 다섯째, 도로 교량을 확장 건설할 것, 여섯째, 저수지를 수 개소 설치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조건이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당진 편입은 각 면 의회를 통과하였다.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1957년 5월 ‘행정 구역[정미, 대호지] 당진군 편입 반대 투쟁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면민 대회를 개최하여 면 의회 결의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서산시에서도 나창헌(羅昌憲) 의원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국회 내무 위원회 소속 유진산(柳珍山), 김선우(金善佑), 전만중(田萬重) 등도 조사 위원으로 정미면대호지면을 방문하고 조사에 참여하였다.

조사 위원들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미면에는 천의 시장이 있다. 하지만 극히 빈약하고 대다수 주민들은 당진 읍내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학생들의 통학 사항은 당진이 우세하다. 정미면에서 당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135명, 서산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모두 45명이다. 대호지면에서도 당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68명인 데 반하여 서산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총 21명이다. 셋째, 거리가 당진에 가깝다. 일제 강점기부터 금융 조합, 전매서, 우체국 등이 당진에 본청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1957년 6월, 인태식 의원은 자유당 의원 108명의 서명을 받아 「군 행정 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 내무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결과]

「군 행정 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것은 1957년 11월 1일의 제27차 국회 본회의에서였다. 재석 111인, 가(可)에 74표, 부(否)에 0표로 원안대로 가결되었다. 정부는 1957년 11월 6일자 법률 제456호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정미면대호지면은 서산군에서 당진군으로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미면·대호지면의 당진 편입 문제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어 해방 후까지 줄기차게 전개되었고 1957년에 들어서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결국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당진군의 군세는 크게 확대되었고 지형적으로도 확장되어 당진읍이 당진군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또한 인구도 증가되어 선거구가 두 개로 늘어 제4대 민의원은 2명[인태식, 원용석 의원]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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