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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59
한자 廣州李氏
영어공식명칭 Gwangju Yisi|Gwangju Y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624년 - 광주이씨 당진 입향조 이윤만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82년 - 광주이씨 당진 입향조 이윤만 사망
본관 광주(廣州) - 경기도 광주시
입향지 광주이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광주이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
묘소|세장지 광주이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
성씨 시조 이자성(李自成)
입향 시조 이윤만(李允蔓)

[정의]

이자성이 시조이고 이윤만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선대 시조는 이자성(李自成)이고, 실질적인 시조는 고려 말 인물인 이당(李唐)이다.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의 입향조는 이윤만(李允蔓)[1624~1682]이다. 이윤만은 17세기 후반 정치 혼란기에 화를 피하기 위하여 낙향하였다. 당진 지역의 광주이씨는 350년간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또한 영정각(影幀閣)을 세워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영정을 봉안하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기리고 있다.

[연원]

광주이씨의 선대 시조 이자성은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역임하였다. 이자성의 후손들은 칠원(漆原)[현 경상남도 함안군]에 성백(城伯)이 되어 대대로 거주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자 이들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하였다. 왕건은 크게 노하여 성을 점령한 후 성백을 호장으로, 그 휘하 가솔들을 모두 회안(淮安)으로 옮겨 역리(驛吏)로 일하게 하였다. 그 후 대대로 살아오던 중, 고려 성종 때에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회안이 광주(廣州)에 속하게 되고 고려 후기 원종 때 이들의 신분도 광주 향리로 바뀌게 되었다. 동시에 관직으로의 진출이 본격화되어 이들을 광주이씨로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자성과 그 후예들의 세대 및 연대에 대한 내용이 사라져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고려 말에 이당(李唐)이 출세하였고 아들인 둔촌공(遁村公) 이집(李集)[1327~1387] 같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면서 이당을 시조로 삼고 오늘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당은 고려 말 충숙왕 때 국자 생원시에 합격하여 광주의 관리로 부임해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집은 문장과 절개가 높고 성리학에 심오하여 정몽주, 이숭인과 교류하였으며 벼슬은 공민왕 대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광주이씨는 조선 시대에 큰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정승을 지낸 명신 이극배(李克培),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다 숨진 이극균(李克均), 선조 때 ‘서정 쇄신’의 기수로 역사에 남은 이준경(李浚慶),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명외교관, 명전략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음 이덕형 등이 있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광주이씨는 시조 이당의 5세손이며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이극균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라고 부른다. 이극균은 150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바로잡기 위하여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금곡리의 입향조는 이당의 13세손이며, 이덕형의 증손자인 이윤만이다. 17세기 후반 현종 대의 정치적 혼란에 직면하여 벼슬을 버리고 당시 면천군 초천면 원사동[현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로 낙향하게 되었다.

[현황]

광주이씨금곡리에서 350여 년간이나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윤만의 아들인 이성인(李性仁)은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 그리고 여러 후손들이 진사, 참봉 등을 지냈다. 21세손인 이석두(李錫斗)[1892~1923]는 주사(主事)를 지냈는데 큰 재산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들인 이긍순(李肯淳)[1911~?]에 이르러 천석꾼의 큰 부자가 되었다. 이긍순은 송악읍 금곡리에 큰 집을 짓고 살며 인근에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였고, 송악읍 전대리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광주이씨들은 금곡리 외에도 송악읍 전대리·영천리·중흥리 등에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많을 때에는 300여 호가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많이 감소하여 금곡리에 40여 호, 전대리에는 10여 호, 영천리 5호, 석포리 4호, 중흥리에 3호 정도만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 유적]

한음 이덕형의 영정을 봉안한 한음 선생 영당(漢陰先生影堂)이 송악면 금곡리 50번지에 있다. 이덕형의 영정은 1988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되었다. 종중에서는 이곳에서 시향을 지내면서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시향은 10월 10일에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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