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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62
한자 羅州林氏
영어공식명칭 Naju Imsi|Naju Im Clan
이칭/별칭 회진 임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48년 - 나주임씨 당진 입향조 임관 출생
본관 나주(羅州) - 전라남도 나주시
입향지 나주임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나주임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묘소|세장지 나주임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성씨 시조 임비(林庇)
입향 시조 임관(林鸛)

[정의]

임비가 시조이고 임관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나주임씨(羅州林氏)는 고려 후기 문신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16세기 중엽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에 입향한 인물은 임관(林鸛)[1548~?]이다. 임관이 생원(生員)를 지냈기에 후손들을 ‘생원공파’라고 부른다. 임관의 손자인 임항(林恒)이 석문면 교로리에 분가함으로써 집성촌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연원]

나주임씨 시조 임비는 충렬왕이 원나라로 떠날 때 시종한 공으로 후일 보좌공신(輔佐功臣) 2등이 되었고, 대장군과 충청도 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에 오른 인물이다. 나주임씨 문중사의 특이한 점은 임비를 ‘시조(始祖)’가 아닌 ‘원조(遠祖)’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는 임비 이전의 선대에도 조상들이 많았다고 전해 오기 때문이지만, 나주임씨는 임비를 1세로 여기고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관향을 ‘나주’로 삼은 것은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 감무를 지내던 중,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회진(會津)으로 낙향하여 세거지를 이룬 까닭에 정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본래 회진 임씨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회진현이 나주에 속하게 됨에 따라 관향을 나주로 변경하게 되었다.

나주임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인구가 증가해 분파를 거듭하였다. 전국 각지에 수많은 동족 마을을 형성했으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시대 정조 때의 임한호(林漢浩)[1752~1827]를 들 수 있다. 임한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순조 때 대사간과 우의정에 올랐다. 임한호는 서얼의 등용을 주장한 인물로 매우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 거주하는 나주임씨는 13세 임귀량(林貴樑)에서 비롯된다. 임귀량이 진사(進士)였기 때문에 후손들을 진사공파(進士公派)라고 부르며, 임귀량의 손자인 15세 임관이 석문면 삼봉리에 입향함으로써 나주임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임관의 관직은 알 수 없으나 생원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을 생원공파(生員公派)라고 부른다.

[현황]

나주임씨는 17세 임항(林恒)에 이르러 석문면 교로리로 나뉘어 정착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석문면 삼봉리교로리에 집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삼봉리에 있던 임관과 아들 임예(林豫)[1576~1597]의 묘는 실전되었다. 현재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80-1번지에 조성된 1만여 평의 선산에는 17세 임항의 묘부터 조성되어 있다.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교로리에 거주하는 나주임씨 진사공파는 14대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주임씨 족보에는 후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상당수가 부호군(副護軍)과 호참(戶叅)의 벼슬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부호군과 호참은 지방 양반인 향반에게 주어진 명예직 벼슬이다. 나주 임씨석문면의 지역 유지로서 자리매김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문면 교로리 2구에 거주하던 나주임씨는 한때 80여 호에 달했는데, 현재 40여 호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했다. 이는 교로리를 떠나 석문면 내, 신평면, 당진 관내로 확대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관련 유적]

나주임씨의 사당은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80-1번지에 있는 '나주임씨 진사공파 회관'이다. 이곳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시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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