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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호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66
한자 新平扈氏
영어공식명칭 Sinpyeong Hosi|Sinpyeong H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신평(新平)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세거|집성지 신평호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덕동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신평호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덕동
성씨 시조 호종국(扈從國)

[정의]

호종국을 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이 관향인 세거 성씨.

[개설]

신평호씨(新平扈氏)의 시조는 고려 말의 문신 호종국(扈從國)[1352~1418]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신평(新平)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신평을 중심으로 학문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호종국은 많은 자손을 두었는데, 호장손(扈長孫)[1405~1466]과 호정일(扈精一)[1544~1619]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정일의 딸은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여 인조 때 효녀 정려를 받았다.

[연원]

신평호씨 시조 호종국의 자는 원발(元發), 호는 송곡(松谷)이다. 어릴 적부터 신평 이씨의 대학자인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1345~1405]에게서 배웠다. 1371년(공민왕 20)에 이첨의 추천으로 한림원 직원(直院)으로 등용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중정대부(中正大夫) 수찬관(修撰官)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호종국은 벼슬을 버리고 고려의 유민으로 남고자 신평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오로지 학문에만 심취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사망하였다.

신평호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호장손과 호정일이 있다. 호장손은 조선 세종 때의 무신이며,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신평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호장손의 묘소는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 산65번지에 있다.

호정일은 조선 선조 때 문신이며, 시조인 호종국의 7세손이다. 호정일은 1567년(명종 2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진사(進士)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 후 참봉(參奉)을 역임하고 면천 향교 훈도(訓導)와 홍주 향교 교수를 역임하는 등 평생을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조 때 딸이 효녀로 정려(旌閭)를 받아 호정일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현황]

신평호씨는 관향인 신평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면천, 당진, 아산, 논산 등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3,000여 호, 1만여 명에 달하는 문중을 만들었다.

[관련 유적]

충청남도 당진시 대덕동에는 ‘신평호씨 효행 정려(新平扈氏孝行旌閭)’가 있다. 호정일의 딸 신평호씨는 어릴 때부터 효심이 남달랐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밤마다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냈고 부모의 병이 나아야 그만두었다. 결혼한 후에는 시부모에게 정성을 기울였는데, 불행히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친정에 돌아와 다시 부모를 봉양하였다. 아버지 호정일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먹여 연명케 하였고, 임종에 이르자 다리 살을 베어 드려 나흘을 더 살게 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산소에 올라 울부짖고 눈물을 잣나무에 뿌리니 나무가 말라 죽었으며, 꿇어 앉아 무릎이 닿은 자리에는 돌이 부서져 있었다고 전한다. 조정에서는 1636년(인조 15) 효녀 정려를 내리고 숙부인(淑夫人)을 하사하였다. 또한 죽은 호정일에게도 이조 참판을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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