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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천도교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964
한자 唐津侍天道敎區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창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2년 10월 - 충청남도 당진군 남면 토곡리에 천도교 전교실 설립
설립 시기/일시 1892년 - 면천 천도교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07년 12월 - 토곡리 천도교 전교실이 당진 교구로 승격
설립 시기/일시 1911년 1월연표보기 - 당진시 천도교구, 당진 교구를 설립
이전 시기/일시 1924년 4월 30일 - 천도교 당진 교구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47년 9월 - 천도교 당진 교구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에서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수청리로 이전
설립 시기/일시 1974년 - 당진 교구 천도교 교당 설립
최초 설립지 전교실(傳敎室) - 충청남도 당진군 남면 토곡리 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당진 천도교 교구 - 충청남도 당진읍 읍내리 지도보기
현 소재지 당진 천도교 교구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 지도보기
성격 종교 단체
설립자 박용태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에 있는 천도교 소속 교구.

[개설]

천도교의 모체는 동학이다. 옛부터 유(儒)·불(彿)·선(仙)교 등 기성 종교가 전래되어 고유 신앙인 천신 숭배 사상을 가지고 이를 시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아 사회를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와 탐관오리의 행패가 극심하여 삼정은 문란해지고 사회는 부패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져 들어 각 지방에서 민란이 거듭 일어났다. 이때 새로운 문물이 전래되어 일반 백성들은 사상적으로 성장하고 자각하게 되어 기성 종교는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내세 사상은 집권층의 권력이나 폭력에 억눌려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서민층에게는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새로 나타난 것이 최제우에 의하여 창설된 동학[천도교]이다.

[설립 목적]

최제우는 사회적 혼란을 개탄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려는 열렬한 구도심(求道心)에서 전국 지역을 다녔다.수도와 기도 생활을 계속 정진하던 중 1860년(철종 11) 4월 5일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한울님의 덕을 온 세상에 편다는 말로 교화·포교·선교와 같은 의미로 ‘포덕천하(布德天下)’하고, 이와 같은 사회 상황을 직시하여 고통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광제창생(光霽蒼生)’ 근거로,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는 보국 안민(輔國安民)의 정신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시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1860년 조선조 25대 철종 11년에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창건한 동학은 포교 3년만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그와 관련되어 처형당했다.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했다. 당진 천도 교회[동학]는 1892년 10월에 박용태(朴容台)가 김란수(金蘭秀), 차동로(車東老), 김재근(金齋根), 김현구(金顯九), 신태순(申泰舜) 등이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용태가 최초의 접주가 되었다. 면천 천도교도 같은 시기에 설립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박희인(朴熙寅), 이창구(李昌九) 등이 있다.

1907년에 당진의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은 충청남도 당진군 남면 토곡리[현 당진 대덕동 토골]에 설립되었으며 1910년 10월 15일경 대덕리 차동로의 집에서 천도교 전교실을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에 교인이 급증하여 전교실은 당진 교구로 승격되어 중앙 총부로부터 교구 설립의 인허가를 받어 1911년 1월에는 당진 교구를 설립하였다.

1923년 10월 5일에 당진 천도교구가 백남덕(白南德), 박기신(朴基信), 신태순(申泰舜), 손동용(孫東涌), 정환태(鄭喚台), 김재근(金齋根) 등의 주선으로 1924년 4월 30일에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에 이전하였다. 1947년 9월경부터 교인 수가 외적 요인으로 점점 줄어들어 경제적 곤란으로 교구 유지상 부득이 이를 매각하여 전금액을 천도교 중앙 총부에 입금하고 정환철(鄭煥哲), 박영호(朴映浩)의 주선으로 전교실은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수청리로 이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천도교가 내포 지역에 처음 전래된 것은 천도교 제4세 교주 박인호가 1883년 3월 18일에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입교한 것이 최초로 보인다. 당진, 서산, 태안 등은 원암 최형순이 1890년경 문중일로 관향인 경주에 왕래하면서 최씨 문중에서 동학의 1, 2대 교주가 나오고 1890년 3월 16일에 최시형을 찾아가 입도함으로써 최형순에 의해 처음 전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동학 혁명 이후 1898년 8월 의암 손병희가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수청리 모동(茅洞)[띠올 마을]으로 은둔하다가 1899년 10월에 청양군 정산으로 이주할 때까지 1년 2개월 동안을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동학이 전파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된다. 손병희가 은거하도록 주선한 사람은 춘암 박인호인데, 그의 측근인 수청리 출신인 김현구, 김명배에게 은신처를 물색하게 해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당진 지역의 동학에 관한 기록은 동학 혁명에서 유일하게 일본군에 승리한 승전곡 전투가 있다. 당진에서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蜂起)하던 일을 통해 승전곡 전투에 참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여미벌에 모인 2만여 명의 동학군은 서산·태안·당진 등지에서 참가한 교인들이기 때문에 다수의 교인들이 참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06년 동학이 천도교로 선포되어 중앙 총부가 설립되고 전국에 280여 개의 교구와 73개의 대교구가 설립된 이후 당진 교구의 설립 과정은 일제 강점기 3·1운동 이후 거국적 민족 운동인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 운동과 함께 단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현황]

2017년 1월 현재 당진 지역의 천도교는 유일하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창리에 당진 교구 천도교 교당이 있다. 1974년에 설립되었고 초대 교구장은 윤국관이며, 2대는 신천균(申天均), 3대는 2016년 현재 조재득이다. 교세가 빈약하여 천도교인은 남자 27명, 여자 16명에 총 43명이다. 활동인은 13인 정도이다. 전부 노인들이며 어린이, 학생, 청·장년 등의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에 천도교는 청년 동맹을 통해 인내천 종지에 따라 정신·사회·민족의 3대 개벽을 가치로 활동했다. 3·1운동 이후에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 운동 등의 전개는 대표적인 항일 민중 투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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