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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락도리 남양홍씨 세거지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1497
한자 草落島里南陽洪氏世居地
영어공식명칭 Ancestral Village of Namyang Hong Clan in Cholakdo-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석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리에 있는 남양 홍씨 세거지.

[개설]

홍씨(洪氏)는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洪天河)를 선시조(先始祖)로 모시고 있다. 그는 삼국 통일 이후 신라 태자(太子)의 태사(太師)가 되었고,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다. 하지만 계통이 불명확하여 남양홍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 공신인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다. 250여 년이 지난 뒤에 홍규(洪奎)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남양 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지면서 당성 홍씨가 남양홍씨로 바뀌게 되었다.

남양홍씨는 본관만을 놓고 보면 매우 특이한 성씨이다. 즉 홍은열을 시조로 하는 '당홍계(唐洪系)'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토홍계(土洪系)'가 있기 때문이다. 당진 지역에는 토홍계 남양홍씨도 일부 거주하지만, 대부분은 석문면을 위주로 당홍계 남양홍씨 집안이 거주하고 있다.

[명칭 유래]

초락도리(草落島里)의 의미를 살펴보면 '초(草)'는 풀 초라고 하는데 이는 '뻘'[개펄]을 뜻한다. 또 '락(落)'은 '어귀'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뻘어귀', '펄어귀', '푸레기'라고 부르는데 '넓은 펄 입구에 있는 섬마을'이다. 그래서 초락도에 사는 남양홍씨들을 '푸레기 홍씨'라고 부른다. 예전에 섬이었던 초락도는 석문면 삼봉 4리와 접해 있는데 밀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고 썰물이 나가면 연륙되었다.

한편 예전에 이곳에 살던 남양홍씨들은 편지 봉투에 '청학동 홍 아무개'라고 기록하였다. 이점을 주목하여 초락도의 원래 이름은 '청학동(靑鶴洞)'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청학동의 유래는 16세기 전기인 인조 때 반정 공신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에게 내린 사패지에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世居)하며 학곡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뜻에서 불리었다. 하지만 홍서봉의 어머니가 손자에게 내린 유시문(遺示文)에 보면 '사패지(賜牌地) 당진(唐津) 초락도(草落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락도를 '초호리(草湖里)'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석문면 초락도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남양홍씨는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서봉[1572~1645]의 자손이다. 홍서봉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석문면 초락도를 공신전으로 하사받았다. 특히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작은 외딴 섬을 받길 청하여 초락도가 사패지[功臣田]가 되었다고 전한다.

석문면 초락도리에 입향한 인물은 홍서봉의 6대손인 홍박연(洪博淵)이다. 입향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전한다. 18세기 말 정조 때로 추정된다. 홍박연이 정착하자, 그의 형제들도 점차 낙향하여 자연스럽게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홍박연은 섬 주민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돌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즉 섬과 육지 사이 약 500m 개펄에 큰 돌을 운반하여 돌다리를 세웠다. 이로써 개펄이 드러나는 간조기에 주민들이 신을 신고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 돌길을 '유두'라고 불렀다. 하지만 바닷물이 들어오면 다시 나룻배를 타고 왕래하였다.

홍박연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홍병필(洪秉弼)이 학문도 뛰어났지만 상당히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초락도에서 현재의 삼봉 초등학교 쪽을 지나 교로리까지 해변을 따라 말을 달리고는 하였는데, 어느 날 세미(稅米)를 실은 배 한 척이 심한 풍랑에 교로리 쪽으로 떠밀려오게 되었다. 이를 발견한 홍병필이 관아에 알리지 않고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그 결과 당진 현감에게 고초를 겪었으나, 그해 농사를 지어 조세미를 모두 갚아 버렸다.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그의 선행에 감복하고 오래도록 칭송하였다고 한다.

[자연환경]

초락도는 1960년대 중반에 간척 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1984년 대호 방조제가 준공된 이후, 이제 바닷물은 초락도에 이르지 못한다. 초락도 주변에 펼쳐 있던 개펄은 모두 평야 지대로 바뀌었다. 초락도는 평야 지대 속의 섬이 되었다.

[현황]

광복 전후에는 총 100여 호 가운데 40호 정도가 남양 홍씨였다.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갔다. 현재 남양홍씨는 20호 정도만 남아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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